말씀41 무의미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눅 5:1-11), 주현 후 다섯째 주일 무의미를 극복하는 힘, 성실우리는 이따금 무의미의 심연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대단히 철학적인 표현같지만, 이런 경우입니다. '이거 해서 뭐하나' 그리고 '이런다고 바뀌는 것도 없는데'와 같은 어딘가 객쩍은 말을 우리는 이따금 읊조릴 때 우리는 '무의미' 앞에 서게됩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미를 찾는 동물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엄혹해도 그 안에 의미가 있다면 인간은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도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의미만 발견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반면 제아무리 최적의 조건 속에 있다고 한들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간은 시들어갑니다. 뭐랄까요. 분명히 의미가 있을 거야! 라며 열심히 바위를 치고 있었는데, 불현듯 내가 쥐고 있는 것이 계란임을 깨닫게.. 2025. 2. 9. 한가운데를 지나서(눅 4:21-30) 벼랑 끝에 선 교회오늘은 우리가 마주한 본문의 맨 마지막 장면, 벼랑 끝에 서신 주님을 바라보며 시작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산 꼭대기에 섰습니다. 산천을 감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은 잡혀 왔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드셨고, 이성을 잃은 이들이 주님을 잡아다가 산 아래로 떨어뜨리기 위해 벼랑 끝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폭발한 것일까요? 우리가 살피고 있는 누가복음 4장은 주님 사역의 첫 장면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님은 당신의 사역 첫 페이지부터 사람들 뒤흔들어 놓으셨을까요? 사역의 초입이니 부드럽게 시작하실 만도 한데 주님의 사전에는 '적당히'가 없었습니다. 뜸을 들이거나 예열 없이 언제나 직격으로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헤집고 세상의 부조.. 2025. 2. 2. 버려두지 않기로 합시다(요 2:1-11), 주현 후 둘째 주 '나락'이라는 유행최근 저는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거나 콘텐츠를 살필 때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것, 눈여겨보지 않으려는 것,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른바 나락 콘텐츠라고 하지요. 주로 연예인이나 인기 있는 인플루언서들이 말이나 행동에서 실수하거나 잘못을 한 경우 혹은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어떤 비행이 드러난 경우 그들을 희화화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유의 기사나 '밈'이라 부르는 소셜미디어 콘텐츠를 가급적 피하려고 애씁니다. 제가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비위를 두둔하기 위함 역시 물론 아닙니다. 누군가의 실수나 과오를 유희거리로 만들어 조리돌리는 행위가 당사자의 인격을 파괴하고 사회적으로 복구 불가능으로 만들며 무엇보다 회복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 2025. 1. 19. 기대의 방향 (눅 3:15-17, 21-22), 주현 후 첫째 주일 벅찬 기대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단지 세례만 베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 살펴보았듯 그는 서릿발 같은 가르침으로 세례받으러 나온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부수었습니다. 서슴지 않고 독사의 자식이라 다그쳤고 닥쳐올 진노를 피할 생각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겼던 유대 혈통도 당신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조금 민망합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시를 떠나 광야로 나가 세례를 받는 일만으로도 벅찬 결단일 텐데, 생면부지의 예언자에게 질책과 훈계를 듣는다는 일이 선뜻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에 모인 사람들은 놀랍게도 요한의 예언자적 음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요한의 진심이 닿았기 때문에 .. 2025. 1. 12. 이전 1 ··· 4 5 6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