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덕목
공동체의 건강함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있다면, 그 공동체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 가장 어린 사람, 가장 바깥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가장 느리게 오는 사람을 넉넉히 기다릴 줄 안다면 그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보폭을 맞출 수 없으면 따로 오든가 아예 오지 말라고 한다면 효율적인 공동체일 수는 있으나 건강한 공동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한 사회, 나아가 국가의 건강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 배제된 사람들,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회와 국가의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국방력, 경제력, 무역수지, 종합주가지수 따위를 건강함의 척도로 여기지만, 믿음의 공동체는 그와 달라야 합니다. 뒤처진 사람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찾아가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주어서 되지 않으면 두 번 주어야 합니다.세상은 이를 가리켜 낭비요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고 말하지만,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는 그래선 안 됩니다. 우리가 성인군자라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3주간 함께 성찰한 바를 상기해 봅시다.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절망과 굴욕에 시달리며 마음에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들어간 그들을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라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악한 윤리를 주님은 걷어차셨습니다. 그들에게 자기 상흔을 보이시고 부활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제자들이 도피했던 디베랴 바닷가 또 한번 찾아가셨습니다. 세상의 논리대로 주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찾아와 위로하시고 길을 알려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은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 자격 잃은 사람들,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셨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정신을 이어나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처음부터 바깥의 사람들을 안으로 품는 공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남편을 여읜 여인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모두 당대 사회적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언제나 그들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여기 먹을 것이 있으니 나눠 먹자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회 초기 사역은 늘 가난한 이들을 챙기고 그들에게 구제 물품을 나누고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도행전 4장 34절 상반절입니다.
34a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이 부자들만 가득한 교회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난으로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 가난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이가 없었다는 것, 가난이 지위가 되고 가난이 수치가 되고, 가난으로 공동체 경계 밖에서 서성이는 이가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런 곳을 가리켜 '사람 사는 곳'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다가 푸근한 마음으로 서로 나누고 정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라는 말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런 세상을 꿈꾸고 바랍니다. 사람들이 바깥에서 죽지 않도록 모으고 끌어안고 나누는 곳,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며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교회는 그러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살만한 곳, 사람이 살아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욥바의 한 공동체
'욥바'라고 불리는 지역에 사람이 살만한 교회, 사람이 살아나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 공동체의 중심에는 다비다 또는 도르가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36절입니다.
36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욥바는 성경에서 중요한 지역입니다. 구약의 예언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주님의 낯을 피해 도망한 곳이 욥바입니다. 요나는 그곳에서 배를 탓고 결국 그 배에서 버림받았습니다. 요나가 욥바에서 바를 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욥바는 항구 도시였고 고대의 여느 항구도시들이 그러하듯 욥바는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로마는 일찌감치 욥바의 가치를 알아보고 점령하여 로마의 복속 도시로 삼았습니다. 제국마저 탐내는 항구 도시인 욥바는 윤택하고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여느 도시들이 그렇듯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힘겨운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욥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시의 가난한 이들은 도시 바깥으로 내몰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리도 이들 대부분은 여성들이었습니다.
다비다는 내몰린 여성들을 끌어모은 여인이었습니다. 풍요의 도시에서 사라진 여인들, 주로 고아이거나 남편을 여의고 아무런 재산을 갖지 못한 채 쫓겨난 여인들을 모아 품었습니다. 다비다는 풍요의 그늘에 가려진 여인들을 찾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먹이고 입혔습니다. 짐작건대 그 집은 분명 욥바의 교회였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당대의 교회는 모두 집이었습니다. 회중 가운데 살림이 비교적 넉넉하고 모임이 가능한 공간을 지닌 이의 집이 교회 역할을 했습니다. 다비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녀가 부유층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사도행전은 다비다의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많이'는 우리가 보는 새번역이 선택한 번역으로 헬라어 프렐레스(πλήρης)를 옮긴 말인데,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한 번역입니다. 플렐레스는 충만하다, 심히 많다, 가득하다, 완전하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단순히 '많다'보다 월등한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 부분만큼은 개역개정의 번역, '심히 많더니'가 더 나은 표현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다비다의 사역은 1회성 생색내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넘치는 사랑이었습니다. 다비다는 화려한 항구 도시 욥바에서 버려진 사람들을 품고, 사력을 다해 자기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목숨을 잃기까지 말입니다. 말씀을 따라 다비다의 삶을 조금더 깊게 들어가보겠습니다.
사슴의 뜻을 지닌 여인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퍄보면 이야기에서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다비다의 남편이나 다비다의 자녀 혹은 가족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숨을 거두었을 때 곁에 서서 슬피 울던 이들 가운데 가족은 없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다비다 역시 홀로된 여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자녀 없는 과부, 혹 자녀가 있었다면 아주 어렸거나 아니면 버거운 삶을 버티지 못하고 자녀들 역시 세상을 먼저 등졌을 가능성 또한 있습니다. 일찌감치 남편과 가족을 잃었다는 것은 당대 유대 사회 안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여 살기 위해 모진 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닥치는 대로 일했겠지요. 여러분, 이 여인의 이름이 다비다 혹은 도르가입니다. 다비다는 유대식 표현, 도르가는 헬라식 표현인데 모두 같은 뜻이 있습니다. 사슴입니다. 정확히는 영양, 영어로는 gazelle입니다. 다비다의 부모가 갓난아기인 다비다에게 사슴이란 이름을 붙여준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슴처럼 곱고 아름답게 살아가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말씀을 통해 유추해 보면 사슴이라 부르는 여인 다비다의 삶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다비다는 자기 이름이 원망스러웠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고된 삶을 살아가는데, 내 이름이 사슴이라니 말이지요.
그러나 다비다는 운명을 탓하고 운명에 복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살기 투쟁했고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삶이 조금씩 나아지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여인들, 힘없고 내쫓긴 여인들, 남편을 여의고 자식을 잃은 여인들, 사회에서 천대받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렵게 살다 형편이 좋아졌다 해서 갑자기 타자를 돕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살림이 좀 피면 구제하는 일에 동참하고 돕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말처럼 공허한 다짐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청산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한 번도 가난해 본 적이 없다는 듯 행동하지요. 하지만 다비다는 달랐습니다. 같은 처지의 여인들이 당하는 고통을 모른 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끌어안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형편이 나아졌다고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다비다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39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39b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다비다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녀 곁에 서 있던 다비다의 도움을 입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생전 다비다가 지어주었던 속옷과 겉옷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속옷과 겉옷의 의미는 오늘날과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이야 옷이 넘치는 시대이지만 당대의 옷은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속옷은 존엄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속옷조차 없었던 여인들이 말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적 존엄을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자기 몸을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그야말로 가난하고 쇠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여 다비다의 사역은 단지 형편을 낫게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인간적 존엄이 없었던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고 최소한의 존엄을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이것이 다비다의 사역입니다. 그러니 다비다/도르가라는 이름의 뜻 사슴, 곧 사슴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그녀는 비로소 살아낸 것입니다.
욥바의 여제자
이와 같이 다비다에 대하여 성찰하고 그녀의 삶을 깊게 들여다볼수록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도대체 다비다 또는 도르가라 부르는 이 여인이 누구이길래, 무슨 사연이 있길래 자기 삶 전부를 바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무엇이 이 여인에게 자기와 같은 아픔을 가진 여인들을 모르는 체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비다를 수식하는 한 가지 표현, "여제자"에 있습니다. 여제자는 헬라어로 마세트리아(μαθήτρια)로 남성 제자라는 뜻의 마세테스(μαθητής)의 여성형입니다. 그런데 성경 모든 곳에서 제자는 모두 남성, 곧 마세테스를 사용합니다. 단 한 사람 다비다를 제외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여성에게 제자라는 칭호를 부여한 이는 단 한 사람 다비다입니다. 다비다는 욥바라는 풍요의 도시에 유일했던 주님의 제자, 참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다비다의 헌신적인 사랑, 나눔의 실천, 가난하고 내쫓긴 여인들을 품고 그녀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성품들, 그리고 자기 생명을 소진하면서까지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 위대한 삶의 여정은 결국 그녀가 그리스도이었기에, 주님의 제자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제자란 누구입니까? 스승의 뒤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란 무엇입니까? 예수님 따라 사는 자입니다. 주님과 같이 사람 사랑하고 나누고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을 안으로 들이고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는 것, 그것이 주님 제자의 삶입니다. 다비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제자, 참제자였습니다.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을 닮았던 여제자 다비다는 주님의 마지막 모습까지 닮아 헌신과 봉사의 노고 끝에 그만 삶의 등불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노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병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 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병의 원인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았던 탓이겠지요. 주변에서 좀 쉬어가며 하라 만류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 다비다의 눈에 밟히는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과부들을 그녀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녀들에게 나눠줄 옷을 깁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환은 악화했고 결국 다시 일어설 수 없었겠지요. 그녀의 사망 소식에 과부들은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생전 다비다에 의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옷을 입음으로 존엄을 되찾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 이들이 다비다 곁에 모여 슬피 울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곁에서 울어줄 이들의 면면이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입니다. 다비다의 삶이 얼마나 거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욥바의 교회는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다비다가 생명으로 돌아오다
여인들은 망연자실했으나 정신을 바로 차렸습니다. 이대로 우리가 사랑하는 다비다를 돌려보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몇몇은 근처에 있는 사도 베드로를 찾아 모셔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머지는 다비다의 시신을 씻기고 다락방에 올렸습니다. 여러분, 시신을 씻기고 다락방에 올린 행동, 그리고 베드로를 부르는 장면은 결코 다비다의 장례식을 위한 준비가 아닙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사도가 올 필요가 없으며, 다비다를 장례 지낼 생각이었다면 유대의 전통에 따라 시신에 기름을 붓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시신에 붕대를 감아 무덤을 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다비다를 다락방으로 옮깁니다. 초대 교인들에게 다락방은 단지 옥상 아래 작은 공간이 아닙니다. 다락방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던 방이고, 오순절의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태동했던 생명의 공간입니다. 그러니 여인들이 베드로를 부르러 달려가고, 다비다의 시신을 다락방에 올린 행동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녀를 살리겠다는 뜻입니다.
여기 이 여인들의 간절함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모인 여인들은 모두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비다의 헌신으로 존엄의 사람이 되어 생명을 찾은 이들입니다. 도시 바깥으로 내쳐져 있다가 다비다에 의하여 안으로 들어온 이들입니다. 지금 다비다는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 바깥으로 내쳐졌습니다. 평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그만 생의 바깥으로 내몰려 버린 것입니다. 여인들은 생의 바깥에 내쳐진 다비다를 생의 안쪽으로 데려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비다가 자신들에게 그러했던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윽고 사도 베드로가 도착했고 다비다는 살아났습니다. 욥바의 이 작은 교회 공동체는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이런 곳이 교회입니다. 다비다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이들이 이제는 다비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곳, 헌신이 헌신을 낳고, 사랑이 사랑을 잇는 곳, 받은 사랑을 그대로 돌려주는 곳, 그래서 죽음이 한치도 틈타지 못하는 곳, 바로 그곳이 교회요, 주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공동체가 이러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가장 바깥에서 서성이는 이들에게 함께 가자고, 말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배제된 사람들이 한 명도 없는 공동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깥에 있는 한 사람을 안으로 데리고 올 수는 있습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는 이런 공동체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비다가 없는걸요? 저는 다비다처럼은 못 살 것 같은데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에겐 다비다는 물론 다비다 비슷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다비다는 아니지만, 주님의 제자이기는 하지 않습니까? 다비다처럼은 못 살겠지만, 그녀의 헌신 가운데 한 부분 정도는 닮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청년부 가장 바깥에서 서성이는 이에게 함께 가지 않을래? 라고 말을 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이에게 그간 별일 없었는지 물어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배제당하는 이가 한 명도 없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바깥에 있는 한 사람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올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다비다가 될 때 우리의 공동체가 생명으로 움트는 생명의 공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죽음이 이기지 못하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함께 이러한 공간을 만들어 갑시다.
'⌞ 청청 말씀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룻다, 욥바, 가이사랴를 지나 예루살렘에서(행 11:1~18) (0) | 2025.05.18 |
---|---|
기쁨이 지니간 자리(요 21:1-9), 부활절 셋째 주 (0) | 2025.05.04 |
숨을 불어넣으시고 (20:19-31) (0) | 2025.04.27 |
울다가 몸을 굽혀서(요 20:1-18) (0) | 2025.04.20 |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눅 19:28-41), 종려주일 (0) | 2025.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