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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룻다, 욥바, 가이사랴를 지나 예루살렘에서(행 11:1~18)

by 청파비둘기 2025. 5. 18.


우울한 출발
사도 베드로가 룻다, 욥바, 가이사랴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오늘 사도행전 말씀이 시작됩니다. 잠시 베드로의 여정을 되짚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룻다로 가기 전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9장 32절입니다. 

9:32   베드로는 사방을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내려가서, 거기에 사는 성도들도 방문하였다.

사방을 두루 다녔다는 표현은 그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움직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딱히 갈 곳이 없어 이곳저곳을 목적 없이 돌아다녔음에 더 가깝습니다. 이상하지요. 초대 교회의 지도자이자 사도 가운데 대표인 그가 갈 곳이 없어 여기저기 사방으로 다녔다니 말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상황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신실한 일꾼이었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교회에 대한 공격은 노골화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던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의 대표이자 교회의 지도자 베드로를 교회 바깥에서 사역하도록 결정했습니다. 가령 집사 빌립의 사마리아 복음 사역이 크게 성공하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상황을 확인하는 역할을 부여하지요. 사도행전 8장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사도행전 9장은 교회의 박해자이자 스데반 살인의 주동자였던 바울의 회심을 다룹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나 변화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아나니아를 보내 바울을 돕고, 바나바를 붙여서 바울을 돌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때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당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온 바울과 베드로가 서로 만났다는 보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예루살렘 바깥으로 돌아다녔던 모양입니다(바울이 직접 쓴 그의 서신 갈라디아서 1:18에서 바울은 게바 곧 베드로를 만났다는 보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베드로와 사울이 서로 만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도행전의 서사를 따라가며 두 사도의 만남보다는 만남 보도의 부재에 집중하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연구가 있지만,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를 지키려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라는 사도의 대표가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행여 로마 군대에 붙잡히거나 과격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웠기에 교회는 베드로를 최대한 바깥으로 돌리는 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에게 이 여정은 처음부터 우울한 출발이었습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야했고, 쉽사리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좋을리가 없겠지요. 그저 사방을 두루 다닐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인지 아니면 성령님의 이끄심 때문인지 베드로는 룻다라 불리는 마을에 들어갑니다. 


룻다와 욥바에서
베드로는 룻다에서 8년 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었던 여인 애니아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룻다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주님께 돌아왔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합니다. 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룻다를 작은 촌락으로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복음과 놀라운 기적이 이렇게 작은 동네에도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시로부터 베드로는 거듭하여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룻다에 가서 애니아의 병을 치료해주던 바로 그 즈음, 오늘날 거리로 20km에서 조금 모자란 거리에 있던 욥바라는 큰 항구도시에 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큰 슬픔이 닥칩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핀 말씀입니다. 유대 말로 다비다, 헬라 말로 도르가라는 여인이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다비다는 헌신적으로 살아온 주님의 참된 제자였습니다. 부유한 도시 욥바의 가난한 여인들을 모아 품고 그들에게 옷을 지어주고 먹을 것을 나눠주며 잃어버린 존엄을 찾아 주었습니다. 다비다는 이 일을 제 몸을 살피지 않고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가난한 이들을 섬겼습니다. 결국 그녀의 몸은 버텨내질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다비다의 도움을 입은 많은 여인들이 울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입은 여인들은 생명 바깥으로 내몰린 다비다를 살려냈습니다. 욥바의 베드로를 찾아가 서둘러 방문해 주길 청했고, 베드로는 응답했습니다. 그가 욥바에 당도했을 때 다비다는 이미 죽어있었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다비다의 사랑과 은혜를 입은 많은 여인들의 눈물과 노력, 지체하지 않고 달려온 베드로의 결단, 그리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게 욥바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룻다라는 작은 촌락에서 욥바라는 크고 부유한 항구 도시에도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는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다비다의 헌신과 여인들의 사랑이 만들어낸 생명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 역시 예상치 못한 경험이었습니다. 실패감에서 시작한 여정이 룻다에서 기적을 보여주더니 욥바에서도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실패한 것 같은데, 복음은 계속해서 일하고 있구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말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이 일이 있은 후 베드로는 욥바에 머물렀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사도행전 5절부터 읽은 내용이며, 이 환상과 환상으로 말미암은 사건은 사도행전 10장에서 펼쳐집니다. 

큰 보자기 네 귀퉁이에 끈이 매달려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 안에 네 발 집승들, 들짐승들, 기어다니는 짐슴들,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음성은 이것들을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거절합니다.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단지 음식으로서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이 동물들은 모두 율법이 금한 부정한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늘의 음성, 우리에게 유명한 말씀이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이 환상은 세 차례 반복됩니다. 바꾸어 말해 베드로가 하늘의 음성을 세 번이나 거부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삼이라는 숫자는 참 여러 의미를 지니는 듯 합니다.

이 환상은 베드로에게 닥치게 될 어떤 일의 전조였습니다. 알쏭달쏭한 환상 때문에 생각이 복잡해지던 때, 가이사랴에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이들은 로마의 백부장, 그러니까 지위가 높은 로마 장교의 휘하들이었습니다. 로마 장교라는 말에 베드로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변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생각을 바꿉니다. 베드로는 이들과 함께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떠납니다. 가이사랴에 당도하자 고넬료가 베드로를 환대합니다. 베드로는 이 순간 자신을 근심케했던 환상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하신 것을 인간이 속되다고 할 수 없음을 말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서 세례를 베풉니다. 그리고 성령이 고넬료의 집에 내립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이사랴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도시였습니다. 가이사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뜻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그의 본명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에 아우구스투스의 본명, 카이사르를 붙인 것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겠습니까? 로마의 심장부와 같은 도시에 복음이 전해졌고 그리스도교 역사 최초의 완전한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도시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율법이라는 자신의 금기를 넘어서 하나님 앞에 순종했을 때 말입니다. 그래서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베드로 개인에게 중대한 사건으로 이는 베드로의 두 번째 회심입니다. 베드로를 잡고 있던 마지막 아집이 무너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릴없이 사방을 다니다 룻다, 욥바, 그리고 가이사랴를 여행했던 베드로를 생각합니다. 룻다라는 작은 동네에서의 회복, 욥바라는 도시에서 만난 아름다운 공동체와 부활의 기적, 가이사랴에서 만난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을 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도구 삼아 애니아를 치유하시고, 다비다를 살리시고, 고넬료에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았습니다. 베드로의 여정은 실패에서 시작했으나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복음이 살아있음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도인 베드로 그리고 당신의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실패라는 감정, 자기 한계, 비좁은 자아를 뛰어 넘음으로 이에 응답했습니다. 

복음은 우리 생각보다 큽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크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작지 않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보다 큽니다. 복음을 좁고 납작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작은 자아입니다. 나의 인생이 실패에서 시작해 실패로 귀결되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우리의 자아를 비좁게 만듭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자아 안에 갇혀 있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룻다, 욥바, 가이사랴를 따라가지 않고 본래 자기 업이 있던 디베랴 바다로 돌아가 어선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믿은 자이기에 디베랴 바다가 아니라 룻다, 욥바, 가이사랴로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자기 틀을 넘어서 복음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가이사랴에서 고넬료의 회심을 목격하고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참뜻, 곧 온 인류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그 원대한 계획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는 것, 성숙한다는 것은 옛 신앙의 틀을 깨고 나오는 것입니다. 더 넓은 세상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정말 크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정말 많구나! 우리의 선입견, 신앙 습관, 믿음의 양태보다 더 높은 곳에서 복음은 유유히 흐르고 있음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제 베드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앞서 고넬료의 회심과 세례를 통해 베드로가 두 번째 회심을 맞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 예루살렘을 나와 목적없이 사방을 다닐때와 이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베드로는 다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고 복음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루살렘에 제한되지 않음을, 유대인과 이방인 가릴 것없이 온 세상이 퍼져야 함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가이사랴를 떠나 그의 여정의 마지막 장소, 그가 여정을 시작했던 곳, 그가 사랑하는 그의 교회, 예루살렘 교회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만만치않은 현실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소식은 이미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그가 이방인 그것도 유대 민족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의 백부장과 먹고 마셨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날을 잔뜩 세우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1장 3절입니다. 

3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여기서 나무랐다는 말은 '비난하다'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이방인 교회를 태동시킨 세례를 준 사도를 비난한 것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한심하게까지 느껴집니다. 하지만 교회는 교회대로 사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룻다, 욥바, 가이사랴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직접 보았고, 그 또한 회심을 경험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교우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실상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 끔찍한 박해를 경험했고, 교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흩어졌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군대는 예루살렘 교회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잔뜩 몸을 웅크려야 했습니다. 자칫하다간 남아있는 교회마저 완전히 파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습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유대의 율법을 준수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대표자인 사도 베드로가 돌출 행동을 한 것이지요. 이방인과 먹고 마셨습니다. 이것으로 유대의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방인이 로마의 관료입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입니다. 교회는 두려웠습니다. 또다시 스데반 사건이 일어날까 전전긍긍했습니다. 하여 여장을 풀지도 못한 베드로를 데려다가 따져 물었습니다. 두려움이 자아의 벽을 높고 두텁게 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좁은 자아게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태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자아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도 결국은 두려움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상황이 답답할만도 한데 그의 태도와 행동은 매우 놀랍습니다. 4절입니다. 

4   이에 베드로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베드로의 이미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열변을 토하거나, 특별한 능력을 보이거나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흥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의 베드로는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자기보다 크고 앞서 계심을 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흥분할 이유도 화낼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차례대로 말하면 그만입니다. 

회심한 사람의 자세가 이러해야 합니다. 좁은 자아를 넘어 넓은 세상을 본 사람의 여유가 바로 이 모습입니다. 다그칠 필요도 험한 말로 윽박지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교회보다 크다면 그 나라를 보여주고 들려주면 그만입니다. 5절부터 17절까지 베드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차례차례 설명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그대로입니다. 성령이 부르셨고, 베드로는 응답했고, 성령이 모두에게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전하며 예루살렘 교회가 부디 두려움의 감옥을 깨고 크고 넓으신 하나님의 세계를 보길 바랐습니다. 자기도 그랬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답했을까요? 18절입니다. 

18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잠잠했습니다. 회중은 침묵했으나 그 안에는 자기들의 고집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자아의 감옥이 깨지는 파열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답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길이 열렸음을. 

바로 이 시점이 교회의 위대한 시작입니다.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교회보다 큼이 확인되었습니다. 교회는 본격적으로 복음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의 바통은 바울에게 넘어갑니다. 이 위대한 시작은 실패의 여정 속에서 자기 자아를 넘어선 베드로와 두려움의 감옥에 갇혀 있던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들의 좁은 세상을 박차고 나왔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더 넓은 하나님의 꿈과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 공동체와 교회가 하나님의 세상을 바라볼 때 위대한 사건이 시작되게 됨을 잊지 마십시오. 

준비한 말씀은 여기까지지만, 한 마디만 더 보탬을 양해바랍니다. 저는 어제 광주에서 광주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슬픔을 딛고 넘어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폭력의 기억속에 있었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넘어서려는 모습, 평화가 폭력보다 강함을 온 몸으로 증명하려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어떤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가 있다면, 여기에서 시작한 것이 맞음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 함께 하나님의 꿈을 생각합시다. 다름을 인정하고 자아의 고집을 버리고 평화와 생명으로 창조되었던 그 모습을 회복하길 바라는 하나님의 꿈이 우리 모두 동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