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이야기
장편 소설의 마지막 장을 에필로그라고 합니다. 영화에서도 전체 서사가 마무리된 후 마지막 시퀀스를 통해 에필로그의 효과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은 종결을 의미하는 에필로그에는 의외로 중요한 메시지가 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 작중 인물들의 후일담, 혹은 다음 작품과의 연관성 등이 에필로그에 담깁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복음서, 요한복음 21장이 정확히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 요한복음의 모든 서사는 20장에서 사실상 마무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간 이 이야기를 살폈지요. 주님이 부활하셨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부활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울고 있던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빈 무덤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희망의 끈이 끊어져 상심한 상태로 문을 닫아걸었던 제자들도 주님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상처를 보고 만지고 주님의 숨결을 받아마심으로 주님의 고통과 연결되었고 비로소 자신들의 사명, 곧 고통 가운데 있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위대한 이야기의 마무리는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로 끝맺음을 맺습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로써 요한복음의 여정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지 않고 짧은 후일담 하나를 더 기록해 둡니다. 바로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과 만난 이야기, 그 안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물고기 153마리를 잡은 기적, 제자들과 아침을 드신 주님,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말씀하신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에필로그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사명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모두 주님의 부활을 확인했습니다. 의심하던 제자 도마마저도요. 복음의 역사가 복음서를 지나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요한은 어째서 후일담을 담겨두었을까요? 오늘은, 이 의미를 성찰해 보겠습니다.
기억해야 할 상징
조금 전까지, 그러니까 요한복음 20장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제자들, 곧 기쁨이 가득한 다락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우리를 사로잡아 완전히 다른 장소, 곧 디베랴 바닷가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밤 중입니다. 무기력해 보이는 제자들이 항구에 모여있습니다. 서로 아무 말이 없습니다. 침묵을 깬 이는 베드로, 그는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며 배에 오릅니다. 다른 제자들도 따라서 배에 올랐습니다.
여러분, 지금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텍스트로만 기록된 말씀이기에 당시의 공기를 감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의 행동을 미루어 볼 때 유쾌한 상황은 아닙니다. 의미를 톺아보자면 이들은 과거에 자신들의 일, 자기들에게 익숙한 일, 자신들이 해왔던 생존으로서의 일로 돌아감을 말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미 부활의 기쁨을 눈과 손끝, 그리고 자신들의 폐와 심장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사도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물고기잡이 배입니까? 아니겠지요. 말씀을 전하러 흩어져야 합니다. 성전으로, 회당으로, 시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다시 배로 돌아갔습니다. 배를 타야 했다면 어선이 아니라 여객선을 타야 합니다. 바다 건너 멀리 헬라 땅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복음 20장과 21장 사이에 서사적 공백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사도로서의 사명감은 자취를 감췄고, 마치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양 패배감에 휩싸인 제자들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 이야기의 흐름이라면 이러한 공백은 없는 편이 좋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새롭게 회복된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러 온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 얼마나 멋진 결말입니까? 그런데 요한은 그렇게 복음서를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약간은 맥 빠지는 장면을 우리에게 다시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상한 멋진 그림을 요한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마치 부활을 보지 못한 듯 되돌아가 버린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한의 에필로그는 이런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입니다. 주님의 부활이라는 믿을 수 없는 기쁨과 벅찬 감동이 우리를 지나간 후,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혹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불유쾌한 손님인 신앙의 적막, 공허, 의심, 방향의 상실이 찾아왔음을 대면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 디베랴 바닷가에 모인 제자들의 상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았고, 부활의 기쁨이 온몸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이라는 감정 상태가 사그라들자 이내 찾아온 현실의 무게, 변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회적 상황, 여전히 살기등등한 유대인들, 자기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된 로마의 군병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지요. 요한은 은총의 기쁨과 언제나 짝지어 찾아오는 그림자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은총의 기쁨 그 후
은총의 기쁨 후에 찾아오는 의심과 적막의 그림자가 그리 대단한 무엇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주일 밤, 교회 일정을 다 마치고, 친구들과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홀로 방에 있는 그 시간 여러분은 어떤 상태인지요? 주일 예배를 드리며 마음에 남았던 말씀을 되새기며 기쁨으로 잠자리 드시는지요? 그렇다면 참으로 건강한 신앙입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음도 사실입니다. 예배를 드리며 마음에 담았던 경외와 기쁨의 감각은 사라지고 닥쳐올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이 우리를 뒤흔듭니다. 은총을 기억하려 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되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마음, 닥쳐올 내일 앞에 숨고 싶은 마음을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됩니다. 기쁨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다락방을 나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또다시 옛 삶의 흔적으로 돌아간 제자들과 같이 말입니다.
저는 어떠할까요? 저의 주일 저녁은 어떨 것 같습니까? 아, 오늘도 사역 잘했다! 수고했어! 나 자신! 이렇게 자족하며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까요? 물론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경우 후회와 자괴가 저를 괴롭힐 때가 더 많습니다. 주일 저녁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돌보고 재우고 난 후 홀로 방에 앉아 우두커니 모니터 앞에 서면, 오늘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반갑게 인사하지 못했을까? 몇 주째 보이지 않던 그 분은 오늘은 어디에 계신 걸까? 나 때문일까? 이런저런 상념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부분 저는 패배하는 편입니다. 아마 성실히 목회하시는 거의 모든 목회자가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야구 좋아하시는 분 계신지요? 패전이 확정된 투수가 앉아있는 팀의 더그아웃을 본 적이 계십니까? 침울합니다. 목회자의 주일 저녁은 많은 경우 패전투수의 더그아웃입니다.
부활 후 다시는 오지않을 것 같은 무의미의 심연을 만난 저와 여러분은 기쁨의 감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요한의 에필로그에 등장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회복의 시작
주님도 디베랴 바닷가에 나오셨습니다. 지금부터 나오는 장면들은 모두 상징들입니다. 제자들이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4절에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는 말씀을 보십시오. 전에도 이야기해 드렸지만, 갈릴리의 조업은 밤에 시작해 동 들 때까지 진행합니다. 유대땅의 태양은 무척 뜨겁기 때문에 한낮의 호수 표면이 달궈지고 물고기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수온이 떨어지는 밤과 새벽이 되어서야 물고기는 올라옵니다. 그럼에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오늘 조업은 허탕입니다. 그때 해변가를 서성이던 주님이 조업 중인 배를 향해 외치지요. 5절을 보겠습니다.
5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이어 그 유명한 말씀,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후 사건은 우리가 잘 압니다. 무수한 물고기가 잡혔고 제자들은 만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그제서야 이 서성거리던 남자가 주님임을 인지합니다. 제자들은 놀라고 베드로는 옷을 갖춰입고 바다로 뛰어 들어가 주님을 맞습니다. 화면은 '페이드아웃'되고 다시 '페이드인'되어 밝아집니다. 조반이 차려진 장면이 시작됩니다.
말씀드렸듯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 아침상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주님이 차려 놓으신 아침상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 생선과 빵이 있었습니다. 조촐하지만 따듯한 식탁입니다. 그런데 이 아침상이 다정한 이유는 단지 빵과 생선 때문만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이 빵과 생선을 어디에서 마련하셨을까요? 또 숯불은요? 부활이 기쁨을 누림도 잠시 이내 풀이 죽어버린 제자들을 위로하고자 장을 보시며 빵을 사시고, 또 물고기 몇 마리를 얻기 위해 어시장을 돌아보시지 않았을까요? 주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장을 보신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해안에 닿기 전에 불이 피우기 위해 숯에 마른 장작을 준비하시고, 부싯돌을 부딪쳐가며 불꽃을 내시고 당신의 그 숨결을 후후 불어가며 불을 피우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주님이 마법을 부리듯 손가락 한두 번 튕기며 아침밥을 지으셨겠습니까? 그러면 산해진미를 만드셨겠지요. 주님은 그 아침에 할 수 있는 조촐하지만 가장 적절한 아침을 손수 준비하셨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신 몸을 갖고 말입니다.
여러분, 회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아침밥을 먹고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렸다면, 그 이유가 빵과 생선에 있는 영양분 때문이겠습니까? 아니겠지요. 이 새벽에 아침을 차리기 위해 분주하셨던 주님의 마음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목도하고 감각하고 새로운 숨을 마시며 기쁨에 겨웠으나 이내 무기력과 의심,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대며 그저 익숙한 삶의 자리로 되돌아갔던 자기들의 한심스럽고 죄스러운 마음이 주님께서 차려주신 이 아침상 앞에 모두 녹아내리지 않았겠습니까?
과학자이자 농부이며, 싱어송 라이터이기도 한 '조윤석'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화학을 전공했고, 제주에서 귤농사를 하기도하며, 노래를 부를 때에는 '루시드폴'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저는 그의 노래를 퍽 좋아하는데요. 특히나 애정하는 곡 가운데 '고등어'라는 곡이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튼튼한 지느러미로
나를 원하는 곳으로 헤엄치네
돈이 없는 사람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나는 또 다시 바다를 가르네
몇 만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보다
맛도 없고 비린지는 몰라도
그래도 나는 안다네
그동안 내가 지켜온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난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루시드폴, 고등어)
저는 이상하게도 이른 아침 디베랴 바닷가에 차려진 아침상을 묵상할 때마다 이 노래가 떠오르곤 합니다. 선악과의 그 열매가 사과가 아니듯, 이 아침상의 물고기가 고등어가 아님에도 말이죠. 이 곡에 담긴 마음 때문입니다. 값비싼 꽃등심은 아니지만 싸고 맛 좋은 고등어, 없는 살림에 아껴가며 장을 보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 곡에 녹아있습니다. 주님이 손수 준비하신 그 아침상에는 이 마음이 오롯하게 새겨있습니다. 불안감에 괴롭고, 허무감에 무력해진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장을 보신 주님의 마음 말입니다.
하여 제자들은 이 따듯한 식탁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목이 멨기 때문이겠죠. 부활하셨는데, 그걸 스스로 보여주셨는데, 여전히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기들의 아둔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괜찮으니 밥을 먹으라 말씀해 주시는 그 마음을 제자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13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회복의 성찬
이 장면을 상상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성찬입니다. 지금 새벽 미명의 시각, 바닷가 해변에서 성찬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성찬은 회복의 성찬, 부활을 다시 기억하는 성찬, 위로와 기쁨의 성찬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주님과 최후의 식탁에서 마지막 성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저녁 식사를 최후의 만찬이라 부르며 마지막 식탁이라 생각하지만, 제자들과 나눈 진짜 마지막 식탁은 바로 지금, 디베랴 바닷가에서 나눈 아침입니다. 이 아침의 식탁, 마지막 성찬이 제자들을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의 나눔과 함께 고백의 문답이 있지요. 그 문답이 시작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 주님께서 두 번째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 떼를 쳐라." 세 번째 다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근심하며 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여라."
나눔과 문답이 끝났습니다. 이제 성찬은 마지막, 순서 곧 파송으로 이어집니다. 19절은 파송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리고 베드로를 대표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제자들의 잃어버렸던 감각은 이 말씀과 함께 되살아납니다. 부활의 기쁨은 만끽한 후 예기치 않게 찾아든 무의미의 심연을 주님의 다정한 아침과 말씀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 마지막 식사의 기억은 후에 사도가 된 제자들이 사역하는 모든 순간의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길이 가로막혔을 때, 적대자들에게 박해당하여 죽음이 목전에 찾아왔을 때, 공동체가 무너지고 갈등에 봉착했을 때, 모든 사역을 포기하고 이전 삶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제자들은 오늘의 식탁, 주님과 마지막 식사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은총의 기쁨이 지나간 자리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무와 무의미가 찾아왔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부활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지나간 감정을 되돌리려 애쓰는 일은 무익합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아침상을 차리기 위해 장을 보시고 숯에 불을 피우시던 그날 아침의 주님을, 주님의 그 분주 하셨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역을 떠나기 위해 먼 길을 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밥 한 끼 든든하게 먹이고프셨던 주님의 마음,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은 거대한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찾아가 이 마음 전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셨던 주님의 그 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록 근심할지라도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신앙의 여정은 깁니다. 때때로 무너지고 망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잃지 맙시다. 주님은 당신이 어디에 있든 여러분들 밥을 주시려 장을 보시고 오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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