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과 부활
성탄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기둥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도 성탄과 부활은 가장 규모 있는 절기이지요. 성탄과 부활이 드러내는 심상들도 비슷합니다. 가령, 기쁨, 회복, 새로운 시작, 희망, 승리, 빛 등이 그것입니다. 두 절기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성탄은 부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탄 없이 부활 없고, 부활 없는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과 성탄이 세상에 드러나는 방식과 서사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그 위대한 시작이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그 임박한 시점에서부터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우주가 알려주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천사가 주님의 탄생을 사람들에게 미리 고지했습니다. 물론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이었지만요. 요셉의 아내 마리아에게 주님의 천사는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이름을 예수라 하라 했으며, 그가 세상을 구원할 자라는 계시를 내렸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시자 한밤중에 양 떼를 돌보던 목동들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구원자의 탄생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을 보고 위대한 분의 탄생을 직감했습니다. 심지어 헤롯과 같은 악인조차 주님의 탄생을 예감했으니 말입니다. 복음서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주님의 탄생은 이처럼 세상에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반면 부활은 그 시작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성탄과 달리 감추어진 사건입니다. 부활은 하늘의 고지도 없었고, 천사들의 선언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무덤에 안치되신 후 사흘이 지나서 천사들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주님 부활했으니, 무덤으로 가보라는 계시적 메시지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누구도 이 소식을 전해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침묵 간에 고요하게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탄생, 성탄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선물이라면, 주님의 부활은 우리가 찾아야 할 숨겨진 보물입니다. 선물은 비록 예상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앞에 주어집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고 기뻐하고 그 기쁨을 나누며 즉각 그 기쁨의 원천, 이 선물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숨겨진 보물은 찾아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찾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당연한 대가로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 들어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빛으로 오십니다.
막달라 마리아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있는 주님의 부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요한이 그리는 부활에는 여러사람이 등장합니다. 막달라 사람 마리아,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그리고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별명을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후반에는 사람은 아니지만 흰 옷을 입은 천사도 둘이 등장하지요. 주님의 부활 장면을 담은 이야기치고는 꽤 많은 숫자입니다. 이 주인공들 사이에서 주님의 부활의 처음과 끝을 이끄는 인물은 누구이겠습니까? 막달라 사람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사람 마리아, 우리는 그녀가 요한복음에 이미 여러차례 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요한복음서 안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장면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바로 그 옆에 있던 여인들 가운데 하나로 나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입니다.
25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가 최초 등장하는 때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 복음서는 침묵합니다. 멀리서 주님을 뵈었을 수 있고, 예루살렘을 지나시는 모습을 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때에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주님의 시선은 땅으로 떨구어져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마지막 눈을 감는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주님의 마지막을 지킨 여인인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지키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언제나 마지막을 지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시작을 함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시작은 희망을 기약할 수 있지만, 마지막은 희망의 부재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마지막을 지킨 자였습니다. 주님의 남성 제자들은 그 마지막에 도피했으나, 여성 마리아는 주님 곁에 섰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기에 우리는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 마지막 날, 십자가 아래에서 올려다본 마리아의 시선과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본 예수님의 시선이 만났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시선에서 마리아는 내가 이분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결단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라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제자로 칭함을 받은 적은 없으나 주님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냄을 자기의 사명이라 믿었는지 모릅니다. 하여 마리아는 그 사명을 지키기 위해 이른 새벽 그 위험한 무덤가를 찾아간 것이겠지요.
울다가 몸을 굽혀서
그런데 너무나 무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돌 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시로 시몬 베드로에게 찾아가 이 일을 고합니다. 마찬가지로 놀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서둘러 무덤으로 갑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을 살피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잘 개켜진 삼베와 시신의 머리를 둘렀던 두건이었습니다.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탈취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임을 말입니다. 그러나 9절에서 요한은 이들은 아직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부활은 성탄과 달리 숨겨진 사건임이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눈앞에 부활의 증거가 있음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니 말입니다. 주님의 수제자라 불리던 시몬 베드로도,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라 불린 그 제자도, 주님의 부활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여전히 감추어진 사건입니다. 10절은 그래서 무척 아픈 문장입니다.
10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숨겨진 부활을 찾지 못한 이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채 울어버리고 맙니다. 그녀에게도 주님의 부활은 여전히 숨겨져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으니 괴롭습니다. 주님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키겠노라 약속했지만, 그 사명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마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때 마리아의 작은 행동 하나 큰 울림을 만들어 냅니다. 11절입니다.
11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눈물로 범벅이 된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덤을 지킵니다.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에 혹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울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이 마음, 울다가 몸을 굽혀 다시 한번 무덤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이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혹시 내가 놓친 것이 있지는 않은지, 혹 그 잠깐 사이에라도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갖다 놓은 것은 아닌지 부질없지만 간절한 그 마음 말입니다. 우리도 어린 시절 소중히 아끼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이와 비슷한 마음 아니었습니까? 잃어버린 곳을 추측해서 그 자리를 하염없이 맴돌며 잃어버린 것을 찾고자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던 그 기억 말입니다. 하여 울면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다는 이미지는 숨겨진 부활의 빛을 찾아내는 몸부림이며, 비로소 그 빛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도 없었던 무덤 안에는 전에 없었던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흰옷을 입은 두 천사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왜 우는지 묻습니다. 마리아는 울먹이며 말합니다. 누군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니 이번에도 역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을 봅니다. 복음서는 그가 예수이신 줄 마리아는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에 따라 면전의 주님을 마리아가 바라보지 못한 이유를 신비한 모습으로 변모하셨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저는 그녀가 주님을 이렇게 가까지 눈앞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그저 먼 발치에서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뿐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주님을 온전히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이후에 비로소 드러납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15절입니다.
15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여전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분이 동산지기인 줄 착각하고 혹시 주님의 시신을 어디에 옮겨 두었다면 나에게 그 위치를 알려달라고, 내가 찾으러 가겠다고 합니다. 귀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잘 따라가 보십시오. 주님은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마리아는 줄곧 울고 있었습니다. 무덤가에 서 있을 때부터, 제자들이 부활의 빛을 찾기를 포기하고 자기만 남겨두고 떠나버렸을 때부터 마리아는 속상하고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줄고 울었습니다. 천사들이 말을 걸 때에도 주님이 말을 걸 때에도 그녀는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빛을 찾는 사람들
눈물을 쏟아낸 적이 있는 분들은 아십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하면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빛은 그 반대입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할 때 그 빛은 더욱 또렷하게 보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야아 라고, 부르는 그 순간, 마리아의 눈물이 렌즈가 되어 감추어진 부활의 빛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눈물을 통과해 바라본 자기 앞에 선 분이 예수님임을 직감했습니다. 눈물이 부활의 빛을 보게 한 것입니다.
숨겨진 부활의 빛을 볼 수 있는 비밀을 막달라 마리아가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부활의 빛을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몸을 굽힐 때,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눈물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몸을 굽히고 눈에 눈물을 가득 담았던 한 여인에 의해 최초로 전해졌습니다. 하여 울며 몸을 굽힌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위대한 일을 감당합니다. 신약학자 톰 라이트는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를 향해 주님의 부활하심을 최초로 "사도들에게 전한 사도"라고 평합니다. 마리아는 사도, 또한 최초의 사도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은 막달라 마리아 사도에게 최초로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은 그 이후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을 기쁨으로 고백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부활의 빛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날 아침 부활은 고요 속에 일어났습니다. 이 부활을 볼 수 있었던 마리아는 몸을 굽혀 울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이라면 우리 역시 몸을 굽히고 눈에 눈물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신학자 로완 윌리엄스는 부활이란 세상을 짓누르는 폭력과 고통의 진실을 폭로하는 사건이며, 세상의 허망함과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진실이라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맞았고 기쁨의 칸타타를 불렀지만, 세상은 여전히 폭력과 고통으로 얼룩져있습니다. 허망하고 불안전합니다. 부활의 빛은 우리 세상 안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 감춰진 부활의 빛을 찾아내 세상에 드러내 알려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몸을 굽혀 무덤 안이라는 세상의 그늘을 살펴야 할 것이며, 눈물을 가득 담은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허무와 절망의 공간인 그 차가운 돌무덤 안에서 우리는 빛 되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눈물의 사도인 막달라 마리아의 가르침을 길잡이 삼아 오늘부터 부활을 드러내는 삶을 삽시다. 아멘.
'⌞ 청청 말씀 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쁨이 지니간 자리(요 21:1-9), 부활절 셋째 주 (0) | 2025.05.04 |
---|---|
숨을 불어넣으시고 (20:19-31) (0) | 2025.04.27 |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눅 19:28-41), 종려주일 (0) | 2025.04.13 |
식탁의 평화가 깨질 때(요 12:1-8), 사순절 다섯째 주일 (0) | 2025.04.06 |
있지만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눅 15:1~3, 11b~32) (0) | 2025.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