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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식탁의 평화가 깨질 때(요 12:1-8), 사순절 다섯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4. 6.

새 일의 시작
우리는 지난 금요일부터 역사적인 순간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3일 그날 밤 이래로 오늘까지 우리는 매 순간 역사적 시간, 카이로스의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너무 많이 싸우고 갈등했습니다. 불필요한 다툼이 벌어졌고, 폭력 사태가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서로의 말은 거칠어졌고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했고, 적으로 삼은 이는 곧바로 악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부터의 시간은 책임의 시간입니다. 우리 청년들의 몫이 작지 않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만들어내는 파괴적인 메시지는 오늘도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로 저 어둠의 메시지를 삼켜버려야 합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 세상의 악함이 우리의 의로움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며 의로움과 다정함을 갖추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평화의 약속 앞에 두려워하고 냉소하는 이들
순전히 우연적 일치이기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일과의 구약 말씀은 참으로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바다에서 길을 내시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한 약속입니다. 이사야서 43장 18절과 19절을 보십시오. 

18   너희는 지나간 일을 기억하려고 하지 말며, 옛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19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이사야서 43장은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기라는 역사상 가장 어둡고 처참한 때에 쓰인 예언의 기록입니다. 포로가 되어 적국에 사로잡힌 지가 하루이틀 한 달 두 달이 아닙니다. 적어도 70년, 곧 한 세대가 지난 후의 시점입니다. 7년 전의 일도 아득한데 70년의 기간을 희망없이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희망이란 낱말이 사전에서조차 흐릿해질 즈음 예언자를 통해 바다를 갈라 길을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나간 70년의 세월을 기억하지 말고, 앞으로 보여줄 일을 기대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벅찬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유다 백성들은 어떠했을까요? 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희망의 예언 말씀을 한 명도 남김없이 아멘으로 받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다음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의 말씀 후에도 광명의 빛은 요원했습니다. 제국의 통치는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이사야의 희망과 회복의 예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두려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평화와 신원의 약속을 거부하고 깨뜨리는 이들은 바로 예언을 냉소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조차 막아내지 못한 하나님이, 이 포로 상태에서 우리 민족을 구원한다고? 약속을 냉소로 쳐내는 이들은 엉겅퀴처럼 자라나갔습니다. 평화의 약속에 대한 냉소의 표현이 잘 드러난 부분이 이사야 45장 9절과 10절입니다.

9   질그릇 가운데서도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를 지은 이와 다투는 자에게는 화가 닥칠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거냐?' 하고 말할 수 있겠으며, 네가 만든 것이 너에게 '그에게는 손이 있으나마나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10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나를 자식이라고 낳았습니까?' 하는 자와, 자기 어머니에게 '무슨 해산의 고생을 했다는 겁니까?' 하고 말하는 자식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토기장이로 자식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그릇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피조된 질그릇이 토기장이의 솜씨를 탓하고 장인의 손을 탓합니다. 한마디로 그 손으로 만든 것이 고작 이따위냐고 질타하는 것입니다. 10절 같은 의미입니다. 나를 자식이라고 낳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가 떠오릅니다. 누가 나를 낳아달라고 했느냐는 배은망덕한 자식의 말, 이럴 거면 뭐 하러 나를 낳았느냐는 바로 그 대사 말입니다.

회복과 신원의 말씀을 냉소하는 이들의 태도가 이러합니다. 구원하지도 못할 하나님의 손은 뭐 하러 갔고 계시냐, 고향으로 돌려보낼 능력도 없으면서 왜 우리를 당신의 자식이라 하며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칭하느냐는 참담한 말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적대의 최종 심급은 하나님에 대한 냉소인지 모르겠습니다.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평화를 주겠다는 말씀에조차 냉소로 반응하는 이들, 약속 받은 평화를 스스로 깨뜨리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 말씀을 통해 길을 찾고자 합니다. 


식탁에 어린 긴장
이스라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6일 앞에 둔 시점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인접한 베다니로 향합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가 살고 있는 집에 방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와는 특별한 관계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얼마 전 이미 죽어 동굴에 매장되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죽은 나사로와 슬피 울며 마음 아파한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오늘 본문 직전 11장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방문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지 보기 위함이요, 또 한 편으로 오라버니인 나사로를 살려주심에 대한 감사의 초대이기도 했습니다. 즉, 오늘의 식탁은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와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한 자리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베다니의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는 집에 차려진 식탁은 기쁨과 환희, 감사와 영광으로 넘치는 복된 식탁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저녁 식탁의 주제가 있다면 아마도 '축, 나사로 생환' 기념 파티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날 저녁의 식탁이 정말 그렇게 기쁘고 감격이 넘쳤는가? 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힘든 그림자같은 복선들이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이 저녁 식탁은 이상하리만큼 적막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마르다는 오늘도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리를 비우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오빠의 생환을 기념하는 파티에 동생 마리아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식탁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나사로 역시 아무 말이 없이 그저 주님 곁에 묵묵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더불어 주님의 제자들 역시 아무 말이 없습니다.

기쁨의 자리여야할 오늘의 식탁에 기묘한 긴장이 흐르는 이유를 우리는 오늘 본문 직후에 따라붙는 언급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9절에서 11절입니다. 

9   유대 사람들이 예수가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크게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를 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를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11   그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 사람이 떨어져 나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유대 사람들이 주님께서 베나니의 나사로 남매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떼를 지어 몰려옵니다. 주님을 보러 온 것만이 아니라 살아났다고 알려진 나사로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큰 무리가 나사로를 보기 위해 방문하는 이유가 살아 돌아온 우리의 친구 나사로를 축하하고 선물을 주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나사로가 정말 살았는지 확인하러 오기 위함이었으며, 만약 사실이라면 그가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 나사로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능력의 살아있는 증거인 나사로는 제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베다니는 물론 인접해 있던 예루살렘에도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나사로는 주님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그 순간부터 또다시 죽음의 공포에 짓눌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다시 살아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그는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난 육체를 바라보는 외인들의 시선이 놀라움과 함께 두려움, 의심, 이윽고 경멸과 저주의 눈빛이었음을 모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베다니에 차려진 식탁은 나사로의 생환을 기뻐하는 축하연이 아니라 엄습해 오는 살해 위협 속에서 두려움과 긴장으로 가득 찬 식탁인 것입니다. 어쩌면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을 초대한 이유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건 마냥 기뻐할 수 없음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주님과 주님이 부활시킨 나사로가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적대자들에게 폭력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기도 합니다.


긴장을 깨는 향기
무거운 공기로 꽉 메워진 이 식탁의 긴장을 깨버린 것은 놀랍게도 향기였습니다. 부재하던 마리아가 비로소 등장합니다. 그녀는 값비싼 나르드 향유 3백 그램 정도를 들고 왔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이 향유는 당대에 귀한 물건이며 일당 받는 노동자가 일 년을 꼬박 일해야 살 수 있는 그야말로 값비싼 사치품이었습니다. 이윽고 마리가 향유를 담은 옥합의 뚜껑을 열자 척박한 사막 기후에서 맡기 어려운 향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식탁의 긴장을 풀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야말로 놀라운 행동, 돌출 행동을 합니다.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마리아가 자기 언니 마르다와 달리 무언가 독특한 면이 있다는 것을 제자들도 모르지 않았으나 그녀의 지금 행동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시각으로는 알 수 없는 마리아의 행동을 홀로 간파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예언자적 행동을 실현한 것입니다. 12장 7절에서 주님은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마리아의 행동을 받아들이십니다. 

마리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만이 공포와 긴장으로 팽배한 이 식탁에 평화를 갖고 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식탁에서 오직 마리아만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이 식탁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죽음의 지배를 꺾으시고 나사로를 부활시킨 주님을 자기들 두 눈으로 이미 목도했습니다. 주님 앞에 죽음의 권세가 힘을 쓸 수 없음을 이들은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심지어 나사로조차 닥쳐온 죽음 앞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오직 마리아만이 죽음을 이기시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하여 마리아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을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식탁을 다시 기쁨으로 돌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녀가 깨뜨린 그 비싼 향유는 그 식탁 자리에서 패배감에 고개 숙인 모두를 일깨웠습니다. 그녀의 낭비는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순간 마리아는 참으로 예언자입니다. 식탁 자리에 앉은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냉소를 이기는 향기
하지만 예언자는 언제나 적대자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음을 오늘 본문도 여실히 드러냅니다. 이 낭비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한 가룟 사람 유다의 분노 때문입니다. 유다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가룟 사람 유다의 반발은 일견 이해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들고 온 향유 병과 그 향내를 맡는 순간 그는 이 향유의 값어치가 얼마인지 간파했습니다. 마치 명품이라 일컫는 물건을 보자마자 브랜드가 어디이고 그 가격이 얼마쯤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요즘 현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사치품의 가치와 가격이 머릿속에 가득한 이에게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민이 함께 있을지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은 6절에서 요한은 가룟 사람 유다가 실은 공금을 횡령하고 도둑의 심보가 가득했음을 분명히 기록해 둡니다.

따라서 가룟 사람 유다의 저 반발은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아픔이 아닌 냉소에 불과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기대하는 것보다 300데나리온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짐짓 의로운 척하는 유다의 태도는 그저 주님이 진정으로 하려는 일에 대한 냉소일 뿐입니다. 마치 바빌로니아 포로기에 회복과 신원에 대한 예언을 비웃었던 사람들과 같이 말입니다. 

여러분, 냉소로는 아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미국의 문필가이자 탁월한 그리스도교 작가였으나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난 레이첼 에반스는 그녀의 탁월한 책 <교회를 찾아서>에서 '냉소주의는 고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마취제'라고 했습니다(334). 마취제는 치료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깨닫게 하려고 값비싼 향유를 바닥에 버리는 쏟아붓는 행위에 대해 냉소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일이 더 중요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지막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한 데나리온씩 300명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삼백 한 명째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다음 날의 또 다른 삼백 명에게는요. 하여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믿고 사랑을 한껏 낭비하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라 말합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향기를 품는 사람이 되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냉소에 사랑의 낭비로 응답해야 합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에 새기시고 사랑을 한껏 나눠주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두려움과 냉소의 식탁에 향기를 뿜어내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을 기점으로 모든 판결이 끝났음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폭력과 불신과 분열이 가득합니다. 누군가는 이 결정에 냉소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정치 지도자가 등장한다 해도 세상을 똑같을 것이라고 비웃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세상의 통치자 한 명 바뀐다고 무정한 우리 사회가 단번에 변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 아니겠습니까? 냉소주의자들의 이죽거림처럼 세상은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아니 아마도 높은 확률로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저와 여러분들은 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낭비를 할 수 있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우리 함께 향기를 뿜어냅시다. 두려움과 냉대 가득한 우리의 식탁을 향기의 식탁으로 바꿉시다. 세상은 조금씩 향기롭게 변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