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직필(正論直筆)
언론의 정신과 철학을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표현이 '정론·직필'입니다. 말, 사실, 사태 등을 곡해하지 않고 바르고 정확히 쓴다는 뜻입니다. 정론직필은 언론의 사명이고 가치입니다. 기자를 비롯해 언론 기관에서 종사하는 분들은 예외 없이 정론직필의 마음과 자세로 일하리라 저는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정론직필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권력은 바르고 옳은 말을 하는 이들을 싫어했습니다. 서슬 퍼런 권력의 칼이 춤을 추던 군부독재 시절 언론은 기사 한 편 쓰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부패한 당대 권력을 정조준한 기사나 칼럼이 실리면 당시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기자를 겁박하고 신문을 폐간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정론을 직필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는 분명 불의의 시대입니다.
주전 6백 년 중엽, 유다와 예루살렘 또한 불의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의 권력자들은 정론직필의 마음을 가진 이들을 누구보다 심하게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자들, 바로 하나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주전 6백 년경은 유다는 역사적으로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유다왕국 주변에 여러 제국이 일어서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며 호시탐탐 유다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의 패권은 잔혹하기로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제국 앗시리아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제국인 바빌로니아가 등장했고, 앗시리아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약소국 유다는 그야말로 바람 앞에 선 등불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때 유다의 권력은 불행한 선택을 합니다. 위기의 시대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또 다른 제국인 이집트에 자신을 의탁해 버렸지요. 이집트의 힘을 활용해 바빌로니아를 견제할 심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불같이 일어섰습니다. 왕궁의 불의한 선택을 향해 권력자들의 비겁함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라! 왕은 이집트의 신들을 따르지 마라! 유다의 지도자들은 회개하라!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집트라는 제국에 신변을 의탁한 왕과 신하들은 자기 뜻에 반하는 예언자들을 그냥 둘리 없었습니다. 예언자들을 때리고 잡아 옥에 가두고 때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신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 우리야의 비극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26장 20절에서 23입니다.
20 (그 당시에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기럇여아림 사람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였다. 그도 예레미야와 같은 말씀으로, 이 도성과 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하였다.
21 그런데 여호야김 왕이, 자기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과 함께 그의 말을 들은 뒤에, 그를 직접 죽이려고 찾았다. 우리야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22 그러자 여호야김 왕이 악볼의 아들 엘라단에게 몇 사람의 수행원을 딸려서 이집트로 보냈다.
23 그들이 이집트에서 우리야를 붙잡아 여호야김 왕에게 데려오자, 왕은 그를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평민의 공동 묘지에 던졌다.)
예언자 우리야는 예레미야를 따라 당대의 왕 여호야김의 실책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왕은 우리야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리야는 이집트로 피신하지만, 왕은 이집트에 수행원들을 보내 그를 붙잡아 왕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잡아 옵니다. 예언자의 입을 닫게 할 심산이었다면 자객을 보내 피신한 예언자를 암살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굳이 도성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욕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나와 예루살렘이 멸망하리라 선포했느냐? 하나님이 나를 치시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치겠다. 너는 이곳에서 죽어라.
왕은 예언자에게 수치를 주고 비참히 죽였습니다. 그의 시체마저 안장하지 않고 평민의 묘지에 던져버립니다. 버려진 시신은 풍화에 상하고 들개들의 먹이가 될 뿐입니다. 망자에 대한 참혹한 모욕입니다. 예레미야가 동료 예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짧게라도 기록해 둔 이유는 당대에 정론 직필하던 예언자들의 처지가 모두 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에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자 성전이 터한 거룩한 도시이지만, 타락의 본산이요 이미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의 무덤이었습니다.
사론곡필(邪論曲筆)
조국의 흥망이 걸린 이 중차대한 시절에 다윗 왕가의 자손인 유다의 왕들은 어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국의 힘에 복속되기를 자처했을까요? 우리로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유다의 선택은 결국 멸망을 불러일으킨 결정적 계기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다의 왕들은 어려서부터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누구보다 성전 제사에 철저했으며 유다의 대제사장이나 율법 학자들의 말을 귀담아들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까?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거짓 예언자들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예레미야의 동료 예언자 우리야의 비극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 예레미야 26장에는 이런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릇된 선택을 한 왕과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전에서 전했습니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이 그 말을 듣고 내뱉은 반응입니다. 26장 7절에서 9절입니다.
7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예레미야가 주님의 성전에서 선포한 이 말씀을 다 들었다.
8 이와 같이 예레미야가 주님의 명대로, 모든 백성에게 주님의 모든 말씀을 선포하니,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9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을 빌려,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멸망하여 여기에 아무도 살 수 없게 된다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예레미야를 치려고,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예루살렘이 멸망할 테니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예언자의 말에 성전 안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제사장, 대제사장, 율법 학자, 또 다른 예언자들, 예배하기 위해 모인 일반인들을 포함해 너나 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성전 안에 모든 사람들이 정론 직필하는 예언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자기의 뜻과 욕망에 맞추어 왜곡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론 곡필했습니다.
사론 곡필은 정론·직필의 반대말입니다. 사론(邪論)은 도리에 어긋난 논설이란 뜻이고, 곡필(曲筆)은 왜곡된 글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자들과 고관 대신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사론 곡필하며 왕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습니다. 그들의 말은 일견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일단 강대국인 이집트에 의탁하는 일이 당장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원한다고 속였습니다. 눈엣가시 같은 정론 직필의 예언자들을 회유하고 통하지 않으면 처단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실된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들의 감언이설과 협박에 굴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음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칼날이 목에 들어와도 정론 직필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에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악하지 않은 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반대로 예언자는 날마다 억압당했고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언자의 입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언자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에겐 해야 할 일, 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사론 곡필의 사람은 정론 직필하는 사람을 멈추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언제나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입지를 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본문에서 예수님을 회유하려 했던 바리새인들이 그러합니다. 누가복음 13장 31절입니다.
31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첫째,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함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나오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과 기적 사건은 예루살렘 전체에 퍼져나갔고, 동시에 유대의 종교 및 정치 권력자들은 긴장했습니다. 특히 당대 유대땅의 통치자 헤롯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헤롯의 심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누가복음 9장 7절입니다.
눅 9:7 분봉왕 헤롯은 이 모든 일을 듣고서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죽은 세례 요한의 부활이라 생각할 만큼 헤롯은 주님이 두려웠습니다. 기회를 잡아 주님을 제거하고픈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 그렇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주님을 살리기 위해 선의를 베풀었던 것일까요? 그렇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누가복음은 바리새파 사람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법이 없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근거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죄인이라 낙인찍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며 경건한 척 행동하지만, 언제나 자기 이익을 위해 헤롯의 편에 서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멀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정론 직필하는 이들이 아니라 사론 곡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향해 헤롯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구하라는 말은 주님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 뉘앙스가 느껴지십니까? 선생님, 자꾸 그러면 죽습니다. 좀 조용히 하세요. 저리로 가서 목숨 부지하시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마세요. 이런 뉘앙스입니다. 우리가 헤롯을 이용해 당신을 죽일 수 있다는 협박 말입니다. 참으로 비겁한 협박입니다.
그러나 정론 직필의 예언자 예수님은 흔들림 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입니다.
3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주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우는 사나울진 모르지만, 사자에 비하면 유약한 존재입니다. 여우는 간교한 획책의 대명사입니다.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여우라 함은 또한 주님의 말씀은 헤롯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헤롯이라는 하찮은 권력이 빌붙은 바리새 사람들을 향한 일침입니다.
여우 같은 헤롯에게 그리고 그 헤롯 뒤에 숨어 비겁한 말을 하는 너희들은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과 내일 나는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들어 괴로운 이들을 낫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나는 오늘과 내일 할 일이 있고 무척 바쁘니 당신들 말을 듣고 피할 이유도 없고 그런 소리 할 거면 저리 가라는 말씀입니다. 욕 한마디 섞지 않으시고도 단호하고 명징하게 말씀하십니다. 졸렬한 협박에 대해 이토록 우아한 대응을 보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우 헤롯과 그 여우에 빌붙은 이들에게 주님은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사흘째 되는 날 나의 과업을 마치겠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정론 직필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그 모든 일을 마치고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정한 그때가 이르기 전에는 나는 너희와 같은 여우들의 협박과 회유에 굴하지 않을 것이며, 제아무리 헤롯도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주님의 믿음이며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다음 33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표현이 반복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주님은 예언자가 예루살렘 바깥에서 죽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꾸어 말해 예언자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언자들의 무덤인 예루살렘으로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걸어가십니다. 수 세기 전 예언자 우리야가 끌려가 죽었던, 예레미야를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을 정론 직필하던 참 예언자들이 고초를 겪었던 예루살렘을 향해 죽으러 가십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당도하기 전에는 누구도 주님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상을 굳건히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정론 직필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 말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내 길을 가야 하겠다는 말씀으로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변함없이 살겠다는 결단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사론 곡필하는 세상은 말합니다. 이제 그쯤 했으면 됐으니 그만두라, 내일은 다른 일을 해보라, 그렇게 살면 오래 못 가니 적당히 타협하며 물러나 있는 것도 삶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겠다. 이 결의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매일 같이 마음에 새기며 나는 내 길을 갈 것이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예언자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오늘 사역하고 힘들어 내일 그만두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야가 위협에 굴복해 그 다음 날 예언하기를 그만두었다면 그는 예루살렘으로 압송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몸을 피하셔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셨다면 주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오늘과 내일과 그 다음 날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정론 직필했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예루살렘이라는 당신의 무덤으로 나아가길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일상은 십자가라는 사명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의 오늘과 내일과 그 다음 날이라는 일상을 굳건히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흔드는 위협은 특별한 모습으로 오는 법이 없습니다. 모두 일상 속에 시나브로 틈타 들어옵니다.
제가 일전에 여러분께 소개했던 <아우슈비츠의 자매>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히틀러와 나치는 독일을 평정하고 인접 국가들을 차례로 접수했습니다. 책의 주인공 린테와 야니가 사는 암스테르담까지 진격해 들어왔습니다. 네덜란드의 국왕은 홀로 탈출했고 시민들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나치의 감시와 통제가 암스테르담 전역을 뒤덮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차례차례 수용소로 잡혀가는 공포의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린테와 야니는 유대인 친구들을 탈출시킬 수 있는 위조 신분증을 만들며 비밀리에 활동 했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수사가 코끝에까지 찾아오자 다른 가족들과 두 자매를 아끼는 이웃들은 이제 그 위험한 활동을 멈추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린테와 야니는 이제 우리의 일상은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이 위협을 벗어나도록 돕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들은 직장과 학교 그리고 집을 오가는 일상에서 비밀리에 서신을 교환하고 위조 신분증을 만들고 사람들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나치의 감시 아래 불가능에 가까웠던 활동이 가능했던 이유를 린테와 야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신을 전해주고 신분을 위조하던 순간순간 어느 이름 모를 우체국 직원이 아무 말 없이 위조된 서신을 전해주었고, 조악한 도장이 찍힌 신분증을 그대로 통과시켜 준 관공서 직원, 게슈타포에 쫓기는 린테와 야니를 태우기 위해 일부러 늦게 출발한 버스 기사 등등 이들의 숨죽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강제 수용소라는 공포가 도시를 지배했지만, 선한 마음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상을 지키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마음을 모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일상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론 직필하며 살고 싶지만, 세파에 흔들리고,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일들이 사방에서 터지고,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현실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통탄해하시며 그 도시의 무너짐을 말씀하셨습니다. 34절에서 주님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을 죽이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부르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무너진 건물을 보며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돌무더기에 깔려 죽는 당신의 사람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이렇게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았던 예언자들을 상기하십시오. 우리의 삶을 괴로우나 정론 직필의 마음을 잃지 않고 일상을 지켜나갈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도다 말하며 찬양하는 그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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