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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시험의 의도(눅 4:1-13), 사순절 첫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3. 9.

수난의 길에 들어선 주님을 따라 함께 걷고 같은 호흡을 하려 애쓰고 있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교회력의 전반기는 지난 12월 주님 오심을 기억하는 대림절, 탄생을 기억하는 성탄절, 세상 가운데 자기 몸을 드러내신 주현절을 지나 고난의 길을 통해 죽음으로 가고 계신 사순절로 이어집니다. 지난 수요일 우리는 재의 수요일 예배를 드리며 사순절을 막 시작했습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기억하고 어느 절기보다 더욱 진실하게 경건과 성찰에 매진해야 하는 때입니다. 모쪼록 사순의 기간 동안 양심을 견고하게 다듬고 마음의 다정함을 잃지 않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시험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사순절의 첫 번째 복음서 말씀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당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은 주님께서 세례받으신 후 세상으로 나가기 직전, 그러니까 공생애의 처음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주님의 수난은 공생애의 마지막 일대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앞에 도착한 성서일과의 말씀은 공생애의 출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야 할 때에 주님의 첫 번째 장면을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함께 성찰해 봅시다. 

누가는 주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고 말합니다. 이 사건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시험의 조건이 매우 가혹합니다. 시험 기간은 사십 일, 그 동안은 금식 필수입니다. 광야라는 적막의 공간에서 그리고 극도의 허기라는 육체적 절망 상태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험이 어려운 이유는 시험의 의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어려운 시험이라 할지라도 의도와 의미만 있다면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펼쳐진 시험은 애초에 출제자의 의도 따위가 없었습니다. 마치 욥의 시험을 보는 듯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은 최악의 상황에 내쳐진 상태입니다.

이윽고 악마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시험은 총 세 가지, 첫째 시험이 출제됩니다. 3절입니다. 

3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주님의 답안지입니다. 4절. 

4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2교시 시험, 먼저 악마가 주님을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온 세상을 보게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6절과 7절,

6-7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주님의 두 번째 답안지 8절, 

8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마지막 3교시 시험, 먼저 악마가 주님을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문제를 냅니다. 9절 하반절, 

9b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악마는 성전에서 떨어져도 하나님의 천사들이 지켜줄 것이며, 하나님의 손으로 떠받쳐서 주님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고 안심시킵니다. 

주님의 마지막 답안지는 이렇습니다. 12절,

12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시험의 종결은 싱겁게 끝납니다. 13절입니다. 

13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시험 장소는 광야, 시험 조건은 금식, 시험 기간은 사십일, 시험의 주관자는 성령님, 시험 출제자는 악마, 시험의 의도는 모름, 이것이 주님이 당하신 시험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무엇 때문에 사십일을 금식하시며 시험을 당해야 했던 것일까요? 난해한 문제를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배운 바가 있습니다. 바로, 문제 안에 답이 있다. 악마가 출제한 문제를 다시 보겠습니다.


주님의 양심적 갈등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빵을 만든 것입니다. 돌 한 덩이로 빵 한 개를 만들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광야 사방 천지에 가득한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는 시험입니다. 두 번째는 나에게 절 한 번만 하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 온 세상을 당신 발 앞에 받치겠다는 시험입니다. 세 번째는 천사들이 수종들어 주님의 발과 몸을 중력의 충격에서 지켜내 하늘로 올리겠다는 시험입니다.

여러분, 악마가 출제한 세 가지 시험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험들은 악마가 주님을 골탕 먹이거나 넘어뜨리기 위한 시험인 듯 보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습니다. 모든 시험의 장면들이 주님께서 곧 실제로 하시게 될 일들입니다.

마치 온 땅에 가득한 돌을 빵으로 만든 양, 주님은 수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적으로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권위는 세상의 권력자들을 굴복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고개를 숙여야 했고 로마의 권세자들도 주님께 무릎 꿇었습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살아남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도 육체를 입고 있으셨기에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마가 제시한 세 가지 시험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 모든 시험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 안에서 곧 하게 되실 일의 예표적 상징인 셈입니다. 기적으로 빵을 만들어 사람들을 먹이시고, 권위로 가르치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십니다. 그러면 악마가 의도한 시험의 핵심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차피 예수 당신이 곧 하게 될 일인데, 미리 이 일을 해보라. 이 일을 미리 해 보인다면, 온 세상이 당신을 구주로 믿지 않겠느냐?'

악마가 시험한 것은 주님의 허기짐이나 권력욕이 아니었습니다. 악마가 집요하게 파고든 것은 주님의 양심입니다. 저 유대 땅 가득한 배고픈 사람들을 보아라, 이 돌들로 빵을 만들면 저들을 배부르게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는 일을 너도 원하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세상의 권력을 얻으면 부패하고 타락한 유대 정치를 개혁하고 성전을 갱신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 않겠느냐? 악마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악마의 제안은 합리적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 옳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주님의 양심은 요동칩니다. 내가 사랑하는 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의 능력이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먼저 먹이고 말씀을 가르치면 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쟁취하여 로마 제국을 상대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 더 빨리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천사를 동원해 불의한 세력을 몰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닐까? 악마의 합리적이고 정당한 제안에 주님의 양심은 크게 갈등합니다. 무엇보다 어차피 하게 될 일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이 제안을 따른다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더 쉽고 빠르게 그리고 확실하게 보증 할 수 있었겠지요. 

주님의 깊은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 악마의 제안에 대한 주님의 답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한결같이 성경을 근거로 말씀하십니다. 4절,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신명기 8장 3절 말씀이었습니다. 8절,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신명기 6장 13절입니다. 12절,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신명기 6장 16절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생각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 문제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악마와 논쟁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 뒤에 머무르기를 선택하십니다. 주님의 양심 한편에서는 저 제안을 따라 하나님 나라 사역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둘러 빵을 만들어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싶은 심정이 한가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 앞에 멈추어 자기 속에서 일렁이는 모든 욕망을 잠재우십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앞에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이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돌을 빵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먹이고, 정치권력 성전 권력을 쟁취하여 개혁을 이끌고, 천사들을 동원해 신비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제국을 몰아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세상이 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로운 시기가 비로소 도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좋은 세상, 평화로운 시기는 한 때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한 시절 좋은 세상이었을 것이고 한 때의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주님이 그 제안을 받으셨다면, 주님은 죽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빵을 나눠주고 권력을 쟁취하여 사람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이를 어느 세상 사람이 죽이겠습니까? 그를 왕으로 만들어 모든 권력을 더해주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오병이어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주님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시자,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6장 15절입니다.

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사람들이 가여워 그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었더니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몰지각이나 비신앙을 탓하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옳지 않았다고 판단하셨기에 홀로 산으로 자리를 피하십니다.

악마의 제안은 주님을 스타로 만들수 있는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세상의 필요를 완벽하게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왕으로 만들고 기리고 섬깁니다. 평생 존경받는 사람으로 천수를 누리다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동상을 만들고 박물관을 만들고 학교에 이름을 새겨서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세상은 이내 평화를 망각하고 어둠에 빠져들며, 불의는 스멀스멀 몸짓을 키워갈 것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제안이자 유혹은 죽지 않고서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거짓 속삭임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타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무엇이 생명의 구원을 가능케 합니까? 십자가라는 가장 비참한 죽음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세상은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수치와 불명예의 상징이며 무엇보다 저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저주받았고 정치적으로 나약하며 무엇보다 사람들의 기대와 열망을 배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세상은 생명을 얻습니다. 신적 역설이고 심오한 모순입니다.

주님의 길은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부패한 세상을 개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혹, 이를 진보적 가치와 신앙 사이의 갈등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장 배고픈 이들에게 빵을 주는 것이 중요하지, 신앙이 무슨 문제라는 말이냐고 외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굶주려 있는데 한가하게 예배하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답답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길은 언제나 살림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삶 전체는 결국 죽으러 가는 길인데, 가시는 길목마다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방법도 다양하셨습니다. 때론 먹이시고, 때론 입히시고, 때론 가르치시고, 때론 위로하시고, 때론 눈물 닦아 주시고, 때론 함께 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는 작은 제자들이라면 우리의 모든 걸음이 살림의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닮아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좋은 본을 보이고, 위로하고 눈물 닦아주고, 때때로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배와 기도는 세상천지에 가득한 불의를 망각하게 만드는 신앙이라는 이름의 도피처가 절대 아닙니다. 예배와 기도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명료하고 명징하게 바라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살피며, 주님의 발이 되어 주님 먼저 가신 그 길을 걸어가면 이 세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창조 세계의 그것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분명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시험당하는 동안 주님은 악마의 제안이 당신께서 걷고자 하는 길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걷지 않으셨습니다. 그 길은 영웅의 길 스타의 길이지, 죽음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시험을 통해 당신의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분명히 아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 본문을 대하며 풀지 못한 마지막 수수께끼, 시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공생애의 길을 막 걷기 시작한 당신의 아들 성자 예수님께서 이 길을 걷기 바라셨습니다. 바로 죽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음을 말입니다. 빠르고 효율적인 길, 유명해지는 길이 아니라 사람 하나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부서뜨리는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오늘 첫 번째 주일에 주님의 공생애 첫 장면인 광야의 시험을 읽어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고난의 길을 걷고자 다짐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악마의 제안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려는 일과도 닿아있습니다. 효율 높고, 빠르고, 확실한 결과가 보장된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돌아가길 선택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이라는 험난 한 길을 따라 천천히 가시고자 마음먹으셨습니다. 인기 없는 길입니다. 기대에 찼던 사람들을 실망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생명을 버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사람을 살렸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하고 옳게 보이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맞다고 하시는 길을 주님이 가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길에 서야 합니다. 느리더라도 바르게 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막 시작했습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은유가 있지만, 우리는 늘 '순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여정에 대한 은유로 선택해 왔습니다. 레바카 솔닛은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길을 떠난 이를 따라 하고 반복하고 모방하려 노력할 때 우리 안에 새로운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걸을 수는 있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는 여러분, 주님 먼저 가신 길을 따르며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도록 애쓰며 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