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충격
오늘 우리가 마주한 주님의 변화 장면은 신약 성경 안에서 가장 극적이고 화려하며 시각적으로 충격적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아끼는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와 함께 산 위로 오르신 후 기도하셨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 기도하고 계신 주님의 얼굴 모습이 변하고 입으신 옷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변했습니다.
놀라운 사건은 이어집니다. 밝게 빛나는 주님 곁에 두 남자가 섰습니다. 31절에서 누가는 이 사람들이 영광에 싸여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예언자들입니다. 신비롭게 변하신 주님이 영광에 휩싸인채 이스라엘의 위인들과 나란히 서셨습니다. 말 그대로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사건이 제자들의 눈 앞에 펼쳐집니다.
제자들은 혼이 나갈 지경입니다. 눈앞에 계신 저 아름답고 황홀한 모습의 주님은 조금 전까지 자기들과 함께 먹고 마셨던 주님이 아닙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보면 우셨던 주님과는 달라 보입니다. 저 산 위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은 갈릴리의 남자들이 으레 갖고 있는 그을린 피부를 가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 앞에 계신 분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의 형상이었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총 동원해 그려낼 수 있는 초월자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영광중에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고 계신 저분을 성자 하나님이요, 온 일류의 구원자임을 믿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변화라는 신비스러운 사건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온 몸으로 감각하고 있습니다.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은 힘이 셉니다. 법정에서 채택되는 증거 가운데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본 바에 대한 증언입니다. 듣거나 느낀 것은 증거가 될 수 없지는 않으나, 본 건에 비하면 증거력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본 것에 대한 증언은 재판의 향배를 결정하고 판결마저 바꿀 수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가장 확실한 믿음의 보증 수표입니다. 믿음은 대체로 모호하고 지난하며 불확실한 것들 투성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는 믿기가 한결 쉬워집니다. 오늘 산 중에 서 있는 제자들처럼 자기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실제적인 것, 손에 잡히는 무언가, 그 무엇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실체가 나타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확신의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부터 무신론자들이 신자들에게 던진 단골 멘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보이지도 않는데 그걸 어떻게 믿어?'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믿을게,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무신론자들의 말은 불경건의 소치가 아니라 이치에 닿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무신론자들의 간단하지만, 외통수와 다름없는 도전 앞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믿음과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을 근사하게 내어 뱉어 보아도 무언가 궁색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믿음과 신앙을 입증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실체가 하나라도 있다면 저들의 말에 반박할 수 있을 터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사실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을 믿지만, 때때로 우리 안에 정녕 믿음이 있는지 회의하고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복신앙이라고 하지요. 복을 바라는 신앙이 그다지 건강한 믿음의 양태가 아님을 우리는 인정하지만, 뜻하는 바가 안 풀리고 번번이 실패할 때 우리는 믿음과 신앙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멀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 눈으로 볼 수 있는 확실한 표징, 몸으로 감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체가 있다면 나의 선택과 믿음을 의심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으리라 우리는 생각합니다. 믿을만한 실체적 진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객관적 사실을 볼 수만 있다면 내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노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내 눈 앞에 나타난다면 이것 보다 기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봄의 역설
우리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이래로 모든 신앙의 선조들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 보이는 것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확실히 실제하는 것을 찾았고 없다면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구체, 실체, 경험 가능한 개체를 사람들은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내 만든 것들은 언제나 우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 말씀은 출애굽기입니다.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을 갖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지요.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살결이 해처럼 빛났다고 기록합니다.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비로소 언약이 세워졌다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직전에 아론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출해 낸 하나님이라고 그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론은 자기 이익을 위해 황금 송아지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신앙을 지켜주기 위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실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황금으로 변화시키고 믿음을 다짐했지만,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눈으로 보았기에 선명한 믿음을 얻을 줄 알았는데,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흐릿해져버리는 역설, 보기만하면 의심없이 깨달을 줄 알았는데, 보았기 때문에 왜곡되어 버리는 역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쓴 편지의 일부를 봅시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14절 하반절에서 15절입니다.
14 …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15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바울은 모세의 글, 곧 율법을 읽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너울이 덮여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담긴 약속들입니다. 피조물 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그 생각을 헤아릴 수차 없었기에 하나님은 율법에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율법은 분명 고마운 도구입니다.
그러나 어느 새부터인가 율법은 하나님을 오롯하게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가리고 왜곡하게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하나님이라고 믿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나, 율법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봄의 역설입니다. 볼 수 있다면, 만질 수 있다면, 경험할 수 있다면 흔들림 없이 믿을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본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왜곡하고 믿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다시 복음서 말씀으로 돌아옵시다. 변화된 주님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제자들은 엉뚱한 말을 쏟아냅니다. 33절입니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에게서 막 떠나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누가의 마지막 멘트가 참으로 짓궂지만 정확하기 이를데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모르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지금 자기 눈으로 주님의 변화를 똑똑히 본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말씀도 듣고 기적도 체험했지만 자기가 따르고 모시는 이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증거를 두 눈으로 명백히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았음에도 말입니다.
게다가 그의 잠꼬대 같은 소리의 내용도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무어라 말합니까? 밝게 빛나는 주님과 위대한 지도자 모세, 능력의 예언자 엘리야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이 시각적 경험을 통제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지어 살자고 말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을 초막에 가둬두려는 것입니다. 자기 공간 안에 주님을 두고 자기의 통제안에 두려는 것, 무엇을 말합니까? 주님을 작은 우상으로 만들어 소유하려는 시도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분간 없는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름이 산을 뒤덮었습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현존 상태에 돌입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하나님이 준엄하신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절입니다.
35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베드로가 주님을 가두고 우상으로 만들어 자기 주머니에 소유하려 들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아들이다. 내가 택한 자다" 너희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너희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다. 하나님의 음성은 시각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정신을 청각으로 깨뜨리시어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을 보았으나 정작 주님을 보지 못해 헤매는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보는 것을 멈추고 오히려 들으라 말씀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음성입니까? 오늘 말씀을 조금 더 자세히 봅시다. 주님은 산 위에서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하셨습니다. 이윽고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께 나왔습니다. 영적 형태로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는 단지 시각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무언가를 논의하고 말씀을 나누기 위해 주님께 나왔습니다. 31절을 입니다.
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영광중에 모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 곧 주님의 떠나가심에 대해 대화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떠나가시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모세와 엘리야에게 당신의 죽으심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변화된 모습에 한눈을 팔지 말고, 오히려 들어야 할 말은 주님의 죽으심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기 위해 변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영광의 모습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변모하신 말씀을 대하며 무엇을 마음에 품어야 하겠습니까? 변화라는 시각적 확신과 황홀한 경험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왜곡합니다. 주님을 보고서도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무엇을 품어야 합니까? 영광중에 하신 말씀, 당신의 죽음에 대한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을 확신하겠다는 태도로는 주님을 온전히 볼 수 없습니다. 변모 사건 직후 주님을 그저 귀신을 쫓아내는 분으로 보는 한 아버지와 그와 다름없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한탄이 우리는 읽었습니다. 41절에 주님은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언제까지 함께 있어야 나의 본뜻을 너희가 알겠느냐는 그 탄식에는 비탄이 서려 있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보았으나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절정이 임박한 3막에는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주인공인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살해당한 아버지의 초상을 앞에 두고 어머니 거트루드 왕비에게 묻습니다.
'저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답합니다.
'전혀, 아무것도! 하지만 있는 것은 다 보인다.'
햄릿과 거트루드는 모두 아버지와 자기 남편의 같은 초상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햄릿은 아버지의 원통과 비탄이 보이지만, 어머니 거트루드는 자기 눈 앞에 펼쳐진 초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사무친 마음이 같은 초상을 보고도 그 너머를 보게 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어디까지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의 변화된 모습만 보고 있습니까? 주님의 겉모습만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보았지만, 주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온 세상 교회가 주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광화문에서, 도시 곳곳에서 험악한 말을 쏟아내는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주님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의 변화된 옷 색깔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라는 확신의 증거, 시각적 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가시려는 곳, 낮아짐의 길, 섬김의 자리를 통해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죽음의 길을 걷고 계심을 보아야 우리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응답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보아야 자라납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옷깃만 바라보는 것으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가시는 그 길을 우리도 따라야 제자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돌아오는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바라기는 이번 사순절에 주님을 보기 위해 우리 몸과 마음을 겸비합시다. 보기 위해 눈을 감읍시다.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진정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눈을 통해 들어오는 온갖 정보 세례를 잠시 차단하고 주님의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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