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청 말씀 나눔

무의미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눅 5:1-11), 주현 후 다섯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2. 9.


무의미를 극복하는 힘, 성실
우리는 이따금 무의미의 심연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대단히 철학적인 표현같지만, 이런 경우입니다. '이거 해서 뭐하나' 그리고 '이런다고 바뀌는 것도 없는데'와 같은 어딘가 객쩍은 말을 우리는 이따금 읊조릴 때 우리는 '무의미' 앞에 서게됩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미를 찾는 동물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엄혹해도 그 안에 의미가 있다면 인간은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도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의미만 발견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반면 제아무리 최적의 조건 속에 있다고 한들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간은 시들어갑니다. 뭐랄까요. 분명히 의미가 있을 거야! 라며 열심히 바위를 치고 있었는데, 불현듯 내가 쥐고 있는 것이 계란임을 깨닫게 되는 격이랄까요. 

우리 사회는 지금 매우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3일 밤 대통령의 계엄 선언 이후로 우리의 삶은 분명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그날 밤 이후 오늘까지 우리는 여러 역사적 변곡점을 지나오고 있습니다. 불법 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많은 이들이 노력했습니다. 계엄 발발 직후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어 본회의장에 들어섰고 만장일치로 계엄 해제를 결의했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군부대의 위협에 용감히 맞섰습니다. 시민들은 매주 광장에 모여 무너진 법치를 바로 세우라고 외쳤고 국회와 사법부는 이에 응답하여 많은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사태의 과정을 지켜보며 모든 일이 순적하게 마무리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마는 않은 것 같습니다. 거리 곳곳에는 무례한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법부의 정당한 판결마저 왜곡하길 서슴지 않고 바름과 그름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노력하는 재판부를 향해 외부 세력에 사주를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희망이 곧 도착할 줄 알았는데 절망이 엉버티며 비켜서질 않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칫 무의미의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암울한 정치적 현실 앞에 절망하다 보면 '이런 거 해서 뭐하나, 어차피 바뀌는 것도 없을 텐데'라는 냉소가 자꾸만 입 바깥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말씀에 우리를 잇대어 함께 길을 찾아봅시다.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오늘 본문에는 무의미의 바다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의 또 다른 이름인 게네사렛 호수를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가는 어부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지역 출신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들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가령 이중과세가 갈릴리의 서민들을 괴롭혔습니다. 유대의 백성들은 자기 민족의 왕인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물론 로마의 황제에게까지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형편이 나아지기 어려웠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가난한 어부들의 삶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무거운 추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자기들 유대 민족이 겪고 있는 억압의 사슬을 풀고 해방의 빛을 보여줄 구원자의 부재였습니다. 오신다고 하는 메시아는 수백 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입니다. 

6일간 힘겨운 조업을 마친 어부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을 찾았습니다. 노곤한 몸이었지만 안식일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노동으로 지쳐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회당에 앉아 랍비들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자기들을 해방하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부들은 배운 바가 많지 않았지만, 랍비들과 율법 학자들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니 믿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니라면 자신들의 답답한 삶의 굴레를 끊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신다는 메시아는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이중과세의 부담은 날마다 더했습니다. 어부들은 자꾸만 무의미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 2절입니다.

2   예수께서 보시니, 배 두 척이 호숫가에 대어 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고 있었다.

주님은 게네사렛 호숫가, 그러니까 갈릴리 호수로 내려가셨습니다. 거기에 정박되어 있던 배 두 척과 그 앞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어부들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이들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언뜻 출항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면 어부들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5절 앞부분입니다. 

5a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시몬이라 부르는 한 어부가 주님께 답하길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물 손질하고 있는 어부들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밤을 꼬박 새운 상태입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는 조업의 특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조업 장면을 다소 목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적한 바닷가에서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출항과 본 조업은 해가 떨어진 후 밤에 시작합니다. 낚시에 취미가 있으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물고기는 밤에 잘 잡힙니다. 대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물 깊은 곳에 내려가 있던 물고기들이 수온이 떨어지는 밤이 되면 먹이를 찾아 수면 가까이로 올라옵니다. 이렇게 수면 근처 물고기들이 올라와야 그물을 던져 잡을 수 있게 됩니다.

현대에 이르러야 기계를 이용해 바다 깊숙이 그물을 던진 후 모터를 이용해 그물을 걷어 올리지만 이 시기에는 오로지 인간의 힘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해가 떨어진 밤에 바다로 출항하는 것입니다. 1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의 어선에 집어등이나 라이트 시설이 있기나 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당대의 어부들은 말 그대로 칠흑의 어둠이 깔린 바다로 목숨을 걸고 나갑니다. 어둠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겨우겨우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러다 동이 떠오르면 그제야 항구로 돌아와 잡은 물고기를 분류하고 그물을 손질합니다. 새벽 어시장이 열리면 잡은 물고기를 도매에 넘기고 어부들은 그제야 일을 마치게 됩니다. 오후 반나절 쉬었다가 해가 질 무렵 어부들은 다시 항구로 나옵니다. 이것이 1세기 어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빛이 없는 바다로 나가 밤새 그물질을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항구로 돌아온 어부들을 말입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이고, 어깨에는 피로가 올라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부들을 슬프게 만든 것은 몸의 고단함이 아니었습니다. 빈손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야만 하는 미안함, 그것이 이들을 가장 괴롭게 했습니다. 면목 없는 아버지의 처진 어깨가 보이는 듯합니다. 오늘 하루치 어획에 실패했으니, 내일은 두 배로 일해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다음 날이라고 더 많은 물고기를 잡을 리도 없습니다. 이렇게 속 복잡한 심경으로 그물을 정리하는 어부들의 마음속에는 그늘이 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허무가 문을 두드립니다. 갈릴리의 어부들도 우리와 같이 무의미의 바다 앞에 당도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심정이 이 어부들과 똑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하루가 없는데 현실은 늘 제자리걸음입니다. 누구보다 성실했다고 믿는데 다짐했던 목표에서 자꾸만 멀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합격, 승진, 채용과 같은 기분 좋은 단어들이 자꾸만 나를 비껴갑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현실이라도 조금 나아져야 하는데, 이쪽도 희망이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사회 자살률은 위기나 경보 수준을 넘어 재앙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산업 재해는 올해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작금의 정치 상황은 거론하지도 않겠습니다. 나의 처지와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우리는 이미 무의미의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이 무의미의 바다를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 말씀을 봅시다. 4절입니다.

4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거기 계신 어부님들, 지금 배를 타고 전에 조업하던 곳보다 더 멀리 더 깊이 들어가서 그물을 내리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부들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밤샘 조업으로 심신이 극도로 피곤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와 낙망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시달린 이들에게 다시 한번 바다로, 너희들의 일터로 다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의미의 바다를 빠져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그 바다에 머물러 있어라, 아니 너희가 선 곳에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항변합니다. '주님,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의미를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쳤습니다. 이제는 쉬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랑곳없이 우리의 등을 떠밀고 계십니다. 어부들은 황당했고 혹자는 불쾌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부 가운데 한 사람, 시몬이라 불리는 이가 응답합니다. 

5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시몬이 어째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는지 말씀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흐름상 시몬이라는 어부는 지금 자기들에게 명령하는 이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낯선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이방인에게서 의미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그분의 음성과 눈빛 안에서 말입니다.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진 어부들은 만선으로 돌아옵니다. 잡힌 물고기가 얼마나 많았던지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습니다. 어부들은 기쁨을 넘어 두려울 정도입니다. 도대체 저분이 누구시길래 말 한마디에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그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때 시몬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성경은 참으로 재치 있게 바로 이 시점에, 시몬이라는 자가 베드로,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베드로임을 밝힙니다. 주님 앞에 엎드리니 비로소 이름을 찾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심히 두려워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8절입니다.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라는 표현을 두고 지나치게 교리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베드로가 엎드린 위치입니다. 어디입니까? 바다 한가운데입니다. 흔들리는 배 위, 물고기가 너무 많아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배 위에 베드로는 엎드렸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베드로는 여전히 무의미의 바다 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삶의 무의미를 청산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무의미의 바다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을 따라 무의미의 바다에 그물을 던졌을 때 무의미는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는 장차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바로 그 무의미 위에서 찾았습니다.

베드로가 무의미의 바다에서 찾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사용되는 '낚다'라는 말은 오해하기 참 쉽습니다. 마치 골탕먹이다 혹은 사람을 취해서 이용한다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아닙니다. 성경에 사용된 '낚다'라는 동사는 조그래오(ζωγρέω)라는 말로 취하여 살려내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건져내어 살리다, 구조하다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베드로가 찾은 삶의 의미는 이제 자기의 길이 사람을 살려내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의미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건져 올린 의미는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우리 삶에 들이닥친 무의미의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삶과 신앙은 답보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선 바로 그곳, 네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너의 삶과 일상에 그물을 던지라 말씀하십니다. 아니, 조금 더 깊이 들어가도 좋다고, 무의미의 심연으로 더 들어가 봐도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말에 의지해 그물을 던진다면 더는 의미를 찾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발견하는 의미란 사람을 건져내 그를 살리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우리 앞에 당도한 이런저런 무의미의 순간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그물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손길이 기다리는 이웃을 살려낼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의사 버나드 리유 박사는 개인적인 고통을 뒤로하고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살피며 페스트라는 파괴적인 전염병과 사투를 벌입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영웅적인 능력이 있다거나 대단한 공명심으로 싸움에 임하지는 않습니다. 리유 박사는 계속되는 체념과 무의미와 맞서며 매일 치료와 방역에 나섭니다. 페스트로 도시가 봉쇄되자 탈출을 기도하며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랑베르'라고 하는 인물과의 대화는 곱씹을 만합니다. 랑베르는 리유 박사에 당신은 어째서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왜 이렇게까지 매일 환자를 돌보느냐고, 전염되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고, 도망치고 싶지 않냐고 묻습니다. 이에 리유 박사의 답변이 이러합니다. 

리유는 갑자기 피로를 느낀 듯이 일어섰다.
"옳은 말씀이에요, 랑베르. 절대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서 마음을 돌려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일이 내 생각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라 여겨지니까요.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하고 랑베르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역, 민음사, 2011.

소설 속 시점에서 페스트는 정복할 수 없는 질병입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영웅주의가 아니라 매일 아침 일어나 환자들로 북적이는 병원으로 걸어들어가는 성실함이 이라는 것, 그 성실함이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란 리유의 대답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줍니다. 

어둠과 싸우기 위해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성실은 일상을 지켜내는 가장 굳센 버팀목입니다. 성경에서 성실은 히브리말로 '에메르'이며 이는 신실과 동의어입니다. 에메르, 곧 신실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분입니다. 우리가 비록 무의미의 바다 위에 살고 있지만 성실히 우리의 자리를 지키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 때 우리는 어둠과 맞서며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