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선 교회
오늘은 우리가 마주한 본문의 맨 마지막 장면, 벼랑 끝에 서신 주님을 바라보며 시작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산 꼭대기에 섰습니다. 산천을 감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은 잡혀 왔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드셨고, 이성을 잃은 이들이 주님을 잡아다가 산 아래로 떨어뜨리기 위해 벼랑 끝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폭발한 것일까요? 우리가 살피고 있는 누가복음 4장은 주님 사역의 첫 장면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님은 당신의 사역 첫 페이지부터 사람들 뒤흔들어 놓으셨을까요?
사역의 초입이니 부드럽게 시작하실 만도 한데 주님의 사전에는 '적당히'가 없었습니다. 뜸을 들이거나 예열 없이 언제나 직격으로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헤집고 세상의 부조리를 강타했습니다.
주님께서 일의 순서를 따지지 않고 본론으로 돌입하신 이유가 있겠지요. 주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공생애의 시간이 많지 않음을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이란 당신께서 죽으실 날, 곧 십자가의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을 때를 받아 놓으셨기에 생을 허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는 애초부터 시한부였으므로 해야 할 말씀을 해야 했고, 가야 할 곳을 가야 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주님은 매일 아침을 맞이하면서 당신의 생이 하루만큼 줄었음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하는 말, 그러나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도 주님은 해야 할 말씀을 하셨고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28절을 봅시다.
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모두 화가 잔뜩 났다"는 말에서 드러나듯 주님은 회당 전체와 적대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멱살을 잡아끌어 회당 바깥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이 분노가 개인의 것이었다면 주님을 문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다시는 회당 근처에 얼씬거릴 생각일랑 하지 말라고 으름장 놓으며 마무리되었겠지요. 그러나 회당의 분노는 개인에서 집단으로 번졌습니다. 분노가 하나 둘 결합하면 삽시간에 파괴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개인이 개인을 살해하는 일은 중대 범죄이지만, 집단이 개인을 살해하는 일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말을 우리는 참 많이도 듣고 또 겪었습니다.
29절을 봅시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주님을 사로잡아 산 위로 끌고 갔습니다. 이 장면만 놓고 보더라도 분노가 개인을 넘어 집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 혼자 다른 사람을 끌고 산으로 올라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주님을 산으로 몰아세웠습니다. 누군가는 멱살을 잡고, 누군가는 뒤에서 밀어대며, 또 누군가는 돌을 던지며 주님을 산꼭대기 벼랑으로 몰았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주님을 잡아 산으로 끌고가는 장면을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이 오르실 산은 골고다라 불리는 언덕입니다. 복음서는 이렇듯 곳곳에서 주님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듯 산꼭대기 벼랑에 매달리셨습니다. 누군가 한 뼘만 밀어도 주님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상황입니다. 저는 산꼭대기 벼랑에 위태롭게 서신 주님을 보며 우리의 교회를 봅니다. 우리의 교회가, 이 나라의 교회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주님께서 살기 가득한 사람들의 거친 손에 붙들려 산 위로 끌려가듯이,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도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절벽 위로 끌려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미어지듯 가슴이 아픈 이유는 주님을, 우리의 교회를 낭떠러지로 밀쳐낸 사람들, 사나운 분노로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주님의 몸을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은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들과 다르지 않은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어찌 혐오와 미움의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가? 어떻게 저주의 말을 쏟아내면서도 이를 복음이라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가? 차별과 배제를 믿음과 신앙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고백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너무나 크고 두려운 도전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분수령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내려올 수 있을까요? 혐오를 쏟아내는 사람들에 밀려 절벽 아래로 떨어져 붕괴할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길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내려오는 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내려가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살피며 주께서 어째서 이 벼랑 위로 올라가게 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내려오게 되셨는지 성찰하며 우리 앞에 무겁게 자리 잡은 질문에 답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익숙한 말씀, 불쾌한 해석
이 모든 사건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울려 퍼진 옛 예언자의 한 말씀에서 시작합니다. 주님은 회당에서 이사야서가 적힌 두루마리를 뽑아 이 말씀 앞에 멈추신 후 그것을 낭독합니다. 주님이 읽으신 이사야서는 61장 1절과 2절입니다. 누가복음은 18절과 19절에서 인용합니다.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선택하여 읽으신 이사야서 61장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위대한 예언이자 복음입니다. 유대 전통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사야의 이 예언을 모를 수 없습니다. 수백 년 전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말씀에 기대어 모진 세월을 버틸 수 있었고 결국 예언 말씀 그대로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때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은 바빌로니아에서 로마로 바꾸었을 뿐입니다. 주님과 동시대의 유대 사람들은 자기네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이 말씀을 등불 삼아 로마 제국의 압제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택하여 낭독하셨을 때 회당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고 어떤 이는 감동에 마음이 벅찼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주님의 해석을 기다렸습니다. 20절에서 누가는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라고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주님께서 해석하는 말씀을 듣고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해석은 매우 짧고 또 그렇기에 난해합니다. 21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해방의 예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얼핏 주님의 말씀은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종교의 언어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님의 말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의 해방이 이루어졌다는 이 해석은 무언가 불쾌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직 해방은커녕 로마의 압제와 박해가 차츰 더 엄중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이 잘 드러난 표현이 22절의 이 말씀, "이 사람은 요셉이 아닌가?"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쉬운 세상의 말로 번안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당신이 어디 출신이고 누구 아들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다 알고 있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 뭘 안다고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고 해방이 되었다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느냐? 지금 우리 사는 꼴을 보아라. 로마의 압제가 버젓한데 해방이 여기서 성취됐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회당의 사람들은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얼치기 예언자 하나가 자신들을 비웃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마음에 피어나는 어두움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맞서시며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 하고 말하려고 한다."
여러분, 이 말씀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도 익숙한 문법의 말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잘 났으면 어디 여기서도 한 번 능력을 보여봐라!'라는 뜻입니다. '듣자 하지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을 고쳤다던데 여기서도 한 번 사람을 고쳐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멈추지 않고 다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회당에 모인 이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 트리거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두 가지 말씀을 전하십니다. 모두 이스라엘 역사인 열왕기에 기록된 유명한 일화입니다. 하나는 사렙다 마을에 사는 한 과부 이야기, 다른 하나는 나병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와 사렙다 마을의 과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26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여러분 주보에 인쇄된 복음서 부분을 보십시오. 25절과 26절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면 어디에 쳐야겠습니까?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 이스라엘에도 과부들이 많았지만, 하나님은 오직 시돈에 있는 사랍데 마을의 과부에게만 예언자를 보냈다'는 부분에 그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도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데, 하나님의 구원이 이름 없는 이방 사람에게 임했다는 말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붉어지고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어 나아만 장군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27절은 어디에 밑줄이 새겨져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에 그어야 합니다.
회당의 사람들은 여기서 완전히 폭발합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해방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가 나타나 한다는 말이 하나님의 구원이 당신들을 빗겨가 이미 다른 곳에서 성취되었다고 하니 화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당에 앉아 있던 이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단상에 서신 주님을 끌어내어 산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이것이 주님이 벼랑 끝에 서게 된 이유입니다.
주님과 함께 산 아래로
회당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자신들에게만 임하리라 믿고 싶었습니다. 진리의 빛이 자기들 머리 위에만 쏟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독점하려 들었습니다. 오직 유대의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의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이 은총의 울타리 바깥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주님을 벼랑으로 끌고 갔습니다. 해방의 빛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들 위에만 비춰야 한다는 신앙적 아집이 사람 하나를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주님을 벼랑으로 몰고 가 떨어뜨리려 했던 이들이 경건하고 굳센, 어떤 의미로 숭고하기까지 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점은 우리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를 추락 직전까지 몰고 간 이들은 다름 아닌 교회의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이 비춰주시는 구원의 빛이 약하고 힘없은 이들에게도 차별 없이 비치고 있음을 인정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우리 주님과 교회는 벼랑 끝으로 밀려 밀려가고 있습니다.
매 주말 그리고 오늘도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광화문에서는 복마전이 펼쳐집니다. 그 아귀다툼 안에서 혐오와 폭력의 말이 복음으로 둔갑하여 쏟아집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며, 우리와 같은 가사의 찬송가를 부르는 이들이 어떻게 저런 증오의 말을 내뱉을 수 있는가?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이런 문제를 명쾌히 해결해 주는 명제가 있었습니다. '저들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은 다르다.' 이 문장은 제게 시원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장은 텅 빈 형식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르다면 모든 논의는 무의미해집니다. 저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들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은 같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 혐오를 쏟아내는 이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같다는 것, 괴롭지만,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나의 하나님과 저들의 하나님이 같은 분이셔야 저들이 쏟아내는 혐오에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짓밟는 모습을 보시며 아파하십니다. 당신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아들 되신 예수님께서 벼랑 끝에 몰리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아들의 핏값으로 세우신 당신의 교회가 믿는 사람들에 의해 죽음의 골짜기에 내몰렸을 때 주님은 우셨습니다.
저는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미움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에 서 있다고 믿습니다. 저 무례한 혐오의 언어에 맞서 싸울 용기와 능력이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고, 주님과 함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더 많음을 믿습니다. 주님과 울고 주님과 거닐다 보면 때때로 주님과 함께 산꼭대기 벼랑 끝에 이끌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차마 신앙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겁박하고 박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례한 이들이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어둠의 골짜기로 몰아세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혐오의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서 산 아래로 내려올 것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우리를 잡으려 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선하신 빛에 감싸인 사람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의 교회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자칫 저 아래로 떨어질까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당신의 백성들이 더 많습니다. 힘을 냅시다. 주님께서 모든 폭력과 혐오 다툼의 소음을 그치시고 사람들 한가운데를 지나 선선히 내려오셨음을 기억합시다. 주님과 함께 이 어두운 시대를 헤쳐 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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