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왔으나
제 아들 지원이는 보통 아침 일곱 시에서 일곱 시 반 무렵 일어납니다. 전날 늦게까지 논 날은 여덟 시에도 일어나긴 하는데,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납니다. 우리 어른들은 잠에서 깨어 아침 시간을 가늠할 때 스마트폰이 보여주는 숫자로 파악하지요. 반쯤 눈을 떠서 시간을 보고 조금 더 자야겠다거나 혹은 일어나야 할 시간을 놓쳐서 화들짝 급한 마음에 아침을 서두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아들은 아직 시계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아침 시간을 숫자로 인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여섯 시에 눈을 떴다고 조금 더 자야겠다고 생각하거나, 여덟 시에 눈을 뜨고는 오늘은 늦잠을 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 아들이 아침임을 깨닫는 유일한 기준이 있다면, 바로 창밖에 해가 떴느냐 아니냐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창 바깥에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면 지원이에겐 그 순간이 아침입니다. 그러나 창 바깥이 아직 어둠 속에 있다면 지원이는 제아무리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그때가 아침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깊어진 요즘에 지원이의 아침은 더디게 옵니다. 아침 동이 늦게 트기 때문입니다. 일곱 시 무렵 눈을 떠 제 방문을 열고 나오며 지원이는 언제나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도 아침이 아니네!' '언제 아침이 되지?'
그러면 저와 제 아내는 '지원아, 벌써 아침이야'라고 말합니다. 물론 지원이는 이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닌데, 아직 깜깜한데?'라고 말할 뿐이지요. 여전히 눈을 비비며 어리둥절하고 있는 아이에게 저는 타이르듯 말합니다.
'지원아 걱정하지마. 조금만 지나면 세상이 밝아질거야. 왜냐하면 해님은 이미 떠올랐거든!'
아이가 전해준 이 작은 에피소드는 참 빛이 오셨으나 세상은 여전히 어두운 밤의 세계임을 보여주는 계시적 메시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성탄 후 주일은 교회력 절기 가운데 가장 고요하고 적막한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울음소리도 그치고 새근새근 잠을 자고 계신 것 같은 주일, 참 빛인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 빛이 오셨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 그래서 여전히 자신들의 세계가 밤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절기가 바로 성탄 후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양력을 기준으로 성탄 후 주일은 보통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보내게 됩니다. 오늘 2부 시간에 말씀드리겠지만, 성탄일에서부터 계산해 열이틀 후가 주현절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주현절을 1월 6일로 공히 지킵니다. 그러니까 성탄에서 주현절까지의 두 번 혹은 한 번 보내는 주일은 특별한 이름 없이 그저 성탄 후 1주 혹은 2주로 지키게 됩니다. 주현절은 주님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주현절을 다루는 의미가 조금 다르긴한데, 맥락은 같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때, 혹은 세상이 주님을 비로소 알아차리기 시작한 때를 가리켜 주현절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주현절과 성탄 후 주일 사이의 이 짧은 시기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때입니다. 성탄의 날에 빛은 왔으나 주현의 시간에 다다르기까지 사람들은 아직 그 빛을 인지하지 못하는 공백의 시간, 빛이 땅에 내려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둠에 있는 어긋남과 불일치의 주일이 바로 지금입니다.
빛을 보지 못하는 세상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머리에 빛과 세상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어긋남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요한복음서 1장은 위대한 선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한의 이 말씀이 1세기 교회 회중에게 선포되었을 때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은 즉각 이 말씀이 창세기의 위대한 시작이자 선포인 1장 1절 말씀, 곧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라는 말씀의 메아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고백했습니다. 이어지는 1장 3절과 4절에서 요한은 모든 것이 말씀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생명을 허락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생명의 빛이 되어 온 세상에 쏟아져 내려왔으며, 어떠한 어둠도 그 빛을 이길 수 없었다고 선포합니다.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 말씀은 질서를 창조하시고 참 빛이 되어 온 세상을 밝히 비춰 어둠을 몰아냈습니다.
이윽고 요한은 말씀이신 그 빛, 태초부터 계셨고 모든 생명을 창조하셨으며 혼돈을 잠재우고 어둠을 물리친 그 빛이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말씀합니다. 9절입니다.
9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부터 빛과 세상과 사람 사이의 어긋 지점이 발생합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10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참 빛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빛이 지금도 세상을 비추고 있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당신께서 지으신 당신의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의 백성들은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요한은 기록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는데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없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상징적인 표현이 단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거나, 예수님을 외면했다거나, 심지어 주님을 적대한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는 없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며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빛이 세상에 왔고 온 땅의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빛은 세상에 온전히 비춰지고 있었는데, 사람들만이 자기들이 보고 있는 그것이 빛인 줄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미 빛으로 충만한 세상인데, 사람들은 밤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빛과 세상과 사람 사이의 어긋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빛 가운데 있으나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 희망의 메시지가 울려 퍼졌으나 여전히 슬픔을 삼키고 있는 사람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으나 세상은 여전히 구원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내 눈앞에 내리비치는 빛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마음이 너무 무겁고 괴로워 저 빛의 세계로 나아갈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빛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음에도 그림자를 찾아 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 밖에 주님이 서 계심에도 실패와 상처로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주저앉은 이들도 있습니다. 문을 닫은 이들에게 세상의 빛은 더는 빛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음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아니야,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어. 나의 세상은 여전히 어둠인걸'
빛의 역할
참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음에도 어떤 세상의 사람들은 여전히 어둠이라면 우리는 빛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빛인 주님께서 어째서 세상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시는 걸까? 주님의 빛은 왜 어떤 사람들의 어둠을 밝히지 못하는 걸까?
빛이 약해서 그럴까? 빛이 더 강하다면 세상의 어둠은 완전히 사라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림자의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조도를 한껏 높이고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나와 눈을 떠서 이 밝은 세상을 보라고 윽박지르는 행위를 우리는, 우리 교회는 얼마나 많이 했던지요. 예수를 믿으면 얼마나 좋은데 왜 아직도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는 전도를 가장한 힐난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요.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너도 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을 복음과 전도와 선교라는 미명으로 얼마나 많이 둔갑시켰던지요?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라는 참 빛의 의미는 그 빛의 위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 빛의 역할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많고 강한 빛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그 빛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카메라를 다뤄본 분들을 알고 계십니다. 지나친 빛은 오히려 피사체를 모조리 날려 버립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온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 무균질의 백색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이유는 빛이 비치는 아침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둠의 세상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마음의 문을 두드려 빛을 전해 주기 위함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이라는 빛을 들고 그늘진 곳으로, 어둠에 숨어버린 사람들 곁으로, 아침이 왔음에도 여전히 밤의 세상에서 괴로워하는 이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더 세고 강한 빛을 비추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참 빛을 들고 가야 할 곳을 가는 것,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요한은 빛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12절입니다.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예수님을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특권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겠습니다.
14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주님을 믿고 그의 자녀가 된 우리가 지닌 특권, 그것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영광은 무엇입니까? 빛입니다. 바꾸어 말해 주님의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 그 빛을 품은 사람들이 되는 것이 우리가 얻게된 특권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빛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가 빛이 되어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 어둠에 갇힌 사람들에게 우리는 걸어 들어가 그들의 빛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아침이 되었음에도 나의 세상은 아직 어둠이라고 숨죽여 말하는 이 곁에 서서 우리가 말해 주어야 합니다.
'아니야, 아침이 되었어. 내가 너의 빛이 되어줄게!' 우리는 이 말을 전해야 합니다.
제가 우리 청년부 카카오톡 단체방에 연말 인사를 하며 짧게 언급했던 정진규 시인의 <별>을 다시 보겠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과 세계사, 1990)
시인은 온 세상이 대낮이라면 별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별은 어둠을 바탕으로 빛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게 드리울 때, 별은 더욱 밝게 빛이 납니다. 우리가 별을 품은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둠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우리가 품고 있는 빛은 더욱 밝아집니다. 우리는 이 빛을 세상에 나눠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참 빛을 품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가 빛을 품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우리 또한 여전히 어둠의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둠은 우리 바로 뒤편에 서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두움은 빛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빛은 미약하게라도 언제나 어둠보다 한발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빛 앞에 서 있다면 어둠은 우리를 앞설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어둠으로 감싸려고 합니다. 아침의 태양이 영원 떠오르지 않으리라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이 아니라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이기에, 빛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어둠은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조급함을 버립시다. 일출 시각이 지났는데도 왜 아직 세상이 어둠이냐고 푸념하지 맙시다. 태양이 떠오른다고 해서 세상이 일순간 환해지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제 속도에 맞춰 차츰차츰 떠오르며 어둠을 서서히 밀어낼 뿐이지요.
청년 여러분, 주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세상은 여전히 주님 오심을 모르며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빛을 품고 살아간다고 하여도 세상은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어둠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앞으로도 대낮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빛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그 빛을 들고 어둠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찾아갑시다. 새해가 밝았으나 말라버린 울음을 삼키며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도처에 가득합니다. 무안공항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참 빛의 위로와 따스함이 그분들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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