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하 수상하지만,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고 있습니다. 성탄이 가까이 왔다는 신호음 같은 이 노래들은 어쩐지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고 괜스레 따듯하게 만들어 줍니다. 산타니, 선물이니, 소비주의에 물든 성탄은 본질을 잃었다느니 엄하게 야단치는 말들도 있지만, 어쩌겠습니까? 성탄은 즐겁고 행복한 날인 것을요. 성탄 찬송도 좋고 현대적인 캐럴도 나쁘지 않습니다. 스산한 마음 한편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성탄의 음악들은 분명히 우리 모두를 위한 작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저는 성탄을 주제로 한 노래 가운데 <탄일종>을 가장 좋아합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1.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2.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멀리 퍼진다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도
탄일종이 울린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작은 동요가 저는 참 좋았습니다. 특히 가사 가운데 '저 깊고 깊은 산속 오막살이'는 저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애틋함 혹은 어떤 향수를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 누가 살고 있을까? 아기가 엄마와 같이 살고 있을까? 아기는 자고 있을까? 그 작은 방은 따뜻할까? 은은하게 들리는 종소리를 듣고 아기와 엄마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저는 '저 깊고 깊은 산속 오막살이'라는 가사를 들었을 때 그 작은 공간이 이 세상 어느 곳보다 따듯하고 평화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기 전부터 말이지요.
탄일종은 지금은 거의 사라진 교회 첨탑의 종으로 성탄 자정, 그러니까 12월 25일 새벽 0시에 치는 종소리를 말합니다. 그 종소리는 소박한 소리를 내며 멀리멀리 퍼져갔습니다. 저 깊고 깊은 산속 오막살이에도,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까지 말이지요. 어둠이 짙게 깔린 추운 겨울밤, 멀리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은 주님이 오신 날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뱃속에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가 마찬가지로 뱃속에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장면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마리아의 놀라운 여정입니다. 39절에서 마리아가 일어나 서둘러 유대 산골에 있는 한 동네로 갔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마리아는 홑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을 보니 누군가를 대동하지 않고 홀로 산골짜기 어느 마을로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임신한 여인이 홀로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마리아의 때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마리아는 어째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의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 나섰을까요? 36절에 천사의 말이 단서를 제공합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들은 후 어리둥절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내가 아이를 가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말하며,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 아이를 가질 수 없음에도 이미 잉태하여 여섯 달이나 지났다고 말해줍니다.
기억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엘리사벳을 만나 서로를 확인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을 만나기로 한 이는 마리아 자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봅시다. 마리아는 태중에 아이가 있었음에도, 홀로 그 먼 길을, 그것도 산골에 있는 작은 마을로 여정을 떠났던 것일까요?
두려웠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했습니다. 거룩한 일이지만 여인으로서는 무시무시한 스캔들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이 말문 막히는 상황에서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 같은 여인의 몸으로 불가능한 임신을 한 엘리사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비한 잉태를 경험한 엘리사벳만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남편 요셉이 아내의 이 여정에 동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문의 정황으로는 홀로 떠났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입니다. 마리아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작은 마을의 엘리사벳을 만났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자마자 이 여인이 귀한 사람임을 직감했습니다. 자기 복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상상이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을 것 같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이 그간의 두려움을 씻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과 만난 마리아는 비로소 기쁨의 말을 터뜨립니다. 46절부터 56절까지 마리아의 찬가, 곧 기쁨의 노래가 기록됩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성령의 잉태를 고지받고 실제로 아이를 밴 후 지금까지 한 번도 기쁨의 말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을 만나고 난 후 그제야 기쁨의 말을 내어놓습니다.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생의 마지막에 찾아온 이 생명을 온전히 품을 수 있을까?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나는 건강히 이 아이를 양육할 수 있을까?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있을까? 엘리사벳도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여인이 얼싸안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후 그들은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그제야 안심하고 그리스도를 품은 자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엘리사벳도 복중의 아이가 주인을 만나 뛰노는 것을 느낀 후 자신의 임신이 하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오심은 본질적으로 위로와 회복의 사건입니다. 작은 사람들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서로 만나게 하시고 서로의 두려움을 나누게 하시고 서로에게 회복과 위로를 나누는 사람이 되도록 주님은 복중에서부터 두 사람을 은총으로 이끄셨으니 말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심하고 기뻐해도 좋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작은 사람들이 서로의 손을 잡도록 이끄시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라는 말씀을 몸소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원수된 사람들이 미움을 버리고 사랑할 수 있도록 주님은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대림의 초가 모두 켜졌습니다. 이제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만큼은 우리 주변 소리를 잠시 낮추고 은은하게 들리는 탄일종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안심케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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