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터전
12월이 되었습니다. 큰 눈이 왔고, 날이 매섭게 추워졌습니다. 이렇게 연말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곤 합니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올해는 유난히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올해는 그래도 할만했어.'라고, 말하는 이를 저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조적 고백은 분명 빈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시기와 비교해 보아도 뒤지지 않을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전쟁 소식을 많이 접했습니다. 종전의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기후는 또 어떠한지요. 우리는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여름을 보냈습니다. 여름이 더운 일이나 자연의 이치지만, 이번 여름은 기상학자들조차 이례적이라 평할 정도로 심각한 뜨거움이었습니다. 가을은 종적을 감추었고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냉기가 우리 사는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몇 마디 문장만으로도 완벽한 설명과 해설을 자동으로 만들어 완성해 주는 AI 기술이 빠르게 보급되었고, 자율 주행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며, 주사 한 번 맞으면 식욕이 억제되어 손쉽게 다이어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첨단의 시대임이 분명한데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일하다 죽는 노동자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현장 노동자는 떨어지거나 끼이거나 충돌해서, 사무직 노동자는 과로와 스트레스로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지난 2023년에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숫자는 598명이었습니다. 이 숫자에 잡히지 않은 재해로 입증되지 못한 이들의 죽음까지 합하면 더 늘어나겠지요. 일 년이 365일이니 하루에 한 명 반, 출근한 이들이 퇴근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기사에 의하면 2024년 2분기까지 나온 사망자의 숫자가 작년 동기보다 10퍼센트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현장에서 생명을 잃었을지 모릅니다.
잠시 여담을 드립니다. 저는 청년부를 맡게 되면서 산업 재해에 조금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저의 사랑하는 동료들인 여러분이 이 사회의 산업 현장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지만, 가장 보호 받지 못하는 어린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하반기 총회에서 전태일 기념 병원 건립을 위해 조금이라도 후원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준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 시대의 어둠이 이렇게 깊습니다. 세상은 어제보다 더 편리해지고 기술은 진보했으며 우리의 생활 수준은 더 풍요로워진 것 같은데, 어째서 이 세상은 여전히 어둠에 있단 말인지요. 지난 세기의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의 유명한 설교 <흔들리는 터전>에서 당대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인류는 진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시의 혼돈에로 회귀하고 있으며,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고 있으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초래하고 있음"
그리고 그 원인을 틸리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주장할 때마다 파멸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인간이 교만하게도 자신의 문화적 창의성이나 기술적 진보나 정치제도나 종교체계 등에 의존했을 때, 인간은 붕괴와 혼동에 떨어졌습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터전들이 흔들렸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말은 자기 힘으로 만사를 통제하겠다는 것, 그 일이 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일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로, 정치적인 힘으로, 혹은 종교적인 힘으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터전을 세웠다고 자축합니다. 자기들이 만든 이 터전이 세상 끝 날까지 든든하게 서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터전은 이내 흔들리고 맙니다. 틸리히가 이미 한 세기 전에 간파했듯 인간이 세운 모든 터전은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둠은 갈수록 짙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화려한 네온사인을 밝히고 그것이 영원하고 안전한 빛이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습니다. 인공조명이 제아무리 밝다 해도 그 가공의 빛이 짙어 가는 어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감각을 왜곡해 깊어진 어둠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둠인 줄 모르는 어둠의 상태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이자 교회력의 첫 날에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를 드려 송구합니다. 성탄 절기가 기쁨의 축제 절기이긴 합니다. 그러나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우리가 받은 복음서 말씀은 깊은 어둠과 절망의 시대를 직시하라고 우리를 등 떠밀고 있습니다. 25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할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이상 징조를 보이고, 바다와 파도가 성난 소리를 내며, 하늘의 세력이 흔들리리라는 점에서 닥쳐올 위기가 우주적 수준의 사건임을 보여주십니다. 특정 지역을 향한 선별적인 징계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우주적 사건이 임박했음을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정도가 되어야 우주적 수준의 붕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입장에서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고 바다가 뒤집어지는 사건 정도 되는 난리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도성이라 일컫는 예루살렘과 그 중심에 자리잡은 성전의 파괴를 정확히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21절은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포위 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 도성의 파멸이 가까이 온 줄 알아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울려 퍼진 주님의 이 충격적인 선포에 유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회개의 제사를 지냈을까요? 유대의 사람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시켜야겠다는 어두운 다짐을 촉발케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 성전의 권력자들, 바리새인을 비롯한 당대의 지도자들이 우주적 붕괴에 대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너무나 우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몇 주째 말씀드리고 있지만 수도 예루살렘과 그 중앙에 위치한 성전은 유대 사회의 거대한 상징입니다. 하나님 임재의 공간이자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무너질 수 없고 무너져서도 안 됩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몇 차례 붕괴한 적은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성전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이 우주적 경고,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파괴된다는 이 예언운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았습니다. 한 갈릴리 출신의 얼뜨기 예언자의 황당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성전이 이미 무너졌음에도 성전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성전이 영원히 서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저 굳건한 성전과 아름다운 예루살렘이 무너지리란 이 황당한 경고 앞에 당대의 권력자들, 부유한 사람들, 힘 있는 자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나의 성전은 안전하니 저자가 말하는 우주의 붕괴는 나와 무관하다며 안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보지 못하는 붕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던 거대한 우주는 굳건해 보였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작은 우주는 하나씩 하나씩 붕괴하고 있음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아니 바라보기 자체를 귀찮아했는지 모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이 로마의 세금과 성전의 세금이라는 이중과세의 고통받을 때, 이들의 우주는 무너졌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마지막 남은 가산마저 성전의 법이라는 미명하에 모조리 빼앗겼을 때 그녀의 우주는 무너졌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이유로 공동체 바깥으로 내어 쫓겨났을 때, 피부가 썩어가는 한센병에 걸렸을 때,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당하고 놀림당하며 바깥으로 내어 쫓길 때, 이들의 우주 하나하나는 모조리 붕괴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미 이렇게나 많은 작은 사람들의 우주가 붕괴하였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슬퍼하셨고 애통해하셨고, 분노하셨습니다. 작은 사람들의 우주가 금가고 깨지고 부서졌을 때, 우리 주님의 마음도 금가고 깨지고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우주적 경고에 대한 무시는 주님 당시의 예루살렘을 넘어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우주가 무너지리란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천 년 전 그날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있던 사람들과 닮았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터전이 굳건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붕괴되고 있는지 도대체 나는 못 찾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세상에도 가득합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기후, 기근, 전쟁과 같은 그야말로 우주적 사건이 왜 여전히 진행 중이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 일은 저 멀리 우주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아무리 깊어져 간들 나는 불이 잘 들어오는 따듯한 집에 살고 있으니 문 바깥의 어둠은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깥의 어둠을 돌아보지 않는 삶이 지속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어둠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립니다. 이 상태가 가장 심각한 상태이며 가장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우주적 경고에는 귀를 닫고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나의 터전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란 믿음을 갖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앞서 슬픈 숫자 598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 숫자는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보도되는 기사와 뉴스를 통해 또 한 명의 노동자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잠시 슬퍼합니다. 그리고 잊어 버립니다. 그런데 마음 한 켠에선 이런 생각이 고개를 내밉니다.
'내 주변엔 일하다 죽은 사람없는데,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죽는다는 거지?'
여러분, 혹시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이 틈타지 않는지요? 빈부 격차, 경제적 양극화, 빈민 문제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잘 사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많나? 거처를 잃은 노숙인들을 서울역 주변에서 이따금 보긴 했지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거리에서 잠을 자나? 난 본 적이 없는걸?'
슬프게도 우리는 고난의 현실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합니다. 눈 앞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릴 순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가난과 빈곤을, 약자들의 외침을 숨기는데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불편한 문제들을 눈 밖으로 치워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은 아름답고 밝게 빛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 홀로 밝은 방 안에 있다고해서 깊고 짙은 밤의 어두움이 부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해와 달과 별과 바다가 뒤흔들린다고 경고하시는데, 세상은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나의 눈에는 이런 위기가 감지되지 않는다고 평안해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권력자들과 부유한 이들은 자기들의 우주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우주는 끊임없이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늘도 수 많은 우주들이 붕괴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잘 듣지 못합니다. 아니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둠입니다. 어둠인줄 모르는 어둠의 상태가 우리 시대의 현주소입니다.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주님은 냉정한 어조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제 모든 우주가 무너질 것이다. 그때가 오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알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26절입니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사람들의 우주적 붕괴를 모른 채 하며 고개를 돌린 세상이 맞이할 대가는 전 우주의 붕괴이며, 이 붕괴에서 제외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이미 아래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음을 알게 될 때가 임박했음을 주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때가 도래하면 하늘이 흔들리고 사람들은 무서워서 기절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파괴의 전령이 아닙니다. 27절과 28절을 보겠습니다.
27 그 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을 띠고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28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일어서서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둠으로 가득할 때 그 어둠에 짓눌리지 말고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이 가장 짙어진 그때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며, 구원의 소식을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둠에서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말은 단지 피할 곳을 찾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직시해야 할 곳을 직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응시해야 할 첫 번째는 세상의 어둠입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어두움이 아니라 현실의 그늘을 우리는 찾아내 의도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세상은 그늘진 곳에 펜스를 쳐서 마치 그런 그늘진 세상이 원래부터 없었다고 우리를 기만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애를 써서 찾아야 합니다. 고난받는 이들이 바깥으로 밀리고 밀려 떨어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청년부가 매년 주목받지 못하는 단체들을 찾고자 노력하는 일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연대와 후원을 통해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개를 들어 응시해야 할 두 번째는 작은 사람들의 우주가 지금도 붕괴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나의 우주는 오늘도 멀쩡하다는 안도감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의 작은 우주가 파괴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 하나가 죽으면 산업재해 피해자 숫자 1이 플러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가 무너진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우주에도 금이 가고 있음을 우리는 통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아야 하는 대상은 서로의 얼굴입니다. 이 짙어가는 어둠의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한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흔들리는 터전 위에 서로의 손을 잡아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우주가 붕괴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살뜰히 살피고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둠을 직시하고, 작은 사람들의 우주를 지키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주께서 36절에서 말씀하신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는 말씀의 실존적 실천임을 저는 믿습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암울한 이야기를 많이 드렸습니다. 축제의 절기와는 무언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은 조금 다르지만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은 고난주간의 성금요일과 매우 비슷한 '두려움의 밤'의 절기입니다. 빛이 이 땅에 강림하기 전의 가장 어두운 밤이 첫 번째 대림절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붕괴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 붕괴가 나와는 관계없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작은 사람들의 우주는 벌써 무너지고 있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짙은 어두움을 찢고 온 세상을 밝히는 빛이 내려왔듯 우리도 고개를 들고 그 빛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너의 우주를 지탱해 줄게, 힘을 내자고 말해야 합니다. 어두움에 잠식되는 삶이 아니라 일어나 고개를 들고 굳게 서서 우리의 참된 터전이 되어주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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