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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성전을 마주보며, (막 13:1-8), 창조절 12주

by 청파비둘기 2024. 11. 17.

아이들로부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느 한 주 쉽지 않은 날이 있겠느냐마는 우리는 이따금 평소보다 더 힘든 시기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이따금 찾아오는 무기력이나 방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서점에 들렀다가 제 선생님이기도 하셨던 연세대학교의 김학철 교수님의 신간을 발견하고 첫 페이지를 넘겼는데, 머리말 첫 문장이 "나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감과 마주해야 했다" 였습니다. 우리는 나이와 상황에 상관없이 불쑥 방문하는 허무와 고통을 대면합니다. 저 역시 그러한데, 지난 며칠이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서로 부딪쳐 파편이 되고 그것들이 내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쏟아져 나올 때면 마음 여기저기에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까닭도 없고 대상도 없는 미움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어리석은 저는 그때가 이르러서야 기도해야 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수요일 새벽, 이 자리에 앉아 침묵하며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애쓰며 선하신 주님께서 은총의 빛을 비춰주시길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쳤다고 해서 별안간 새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회복과 위로가 아니라 화학적 방법으로 통증을 잊게 만드는 마취의 일종이겠지요. 회복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고나면 바로 그때부터 길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신을 신고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나야 합니다. 회복의 은총은 나를 둘러싼 고통과 상심한 마음을 말끔히 제거해서 새 마음으로 갈아치우는 게 아닙니다. 이제까지는 홀로 걸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너와 함께 걷겠다. 함께 답을 찾아가 보자는 주님의 부름에 우리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복을 주시는 은총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선하신 주님께서 저에게 생각보다 빨리 큰 은총을 부어주셨습니다. 아주 우연히 말이지요. 한 방송 프로그램의 예고편이었습니다. 본편도 아니라 몇십초짜리 예고편 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예능 프로그램이지요. <유퀴즈>의 금주 방송분 가운데 일부에 대한 광고였습니다. 화면에는 초등학생들 합창단이 나와 전학을 가는 친구에게 불러주는 노래 두어 마디가 나왔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그 예고편을 잠시 함께 보시지요

 

https://youtu.be/PGP45Qyr8hY?si=AjbqoMrSo4hv6FAY&t=5

아이들의 음색이 참으로 좋지요. 저는 클래식을 좋아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성악가들의 합창을 무척 좋아합니다. 음악이라는 장르 가운데 눈물을 쏟아내는 것을 결국 사람의 노래임을 믿는 편인데, 전문 성악가도 아닌 아이들의 음색으로 저는 눈물이 나오고 만 것입니다. 특별한 기교나 훈련된 발성을 내지도 않는 아이들의 노래가 제 마음을 흔들고 커다란 회복과 위로를 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무감각으로 굳어버린 제 마음에 아이들의 꾸밈없는 그러나 진실한 노래가 닿아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무감각을 극복하기 위해 더 강한 자극과 충격을 구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감각의 무감각 상태를 더 두텁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본 이 아이들의 진심이 담긴 소박한 목소리와 노랫말이 저의 무감각을 깨뜨리고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저의 본래 감각들이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고마움을 깨닫게 되는 그런 감각들 말입니다. 그런데 저뿐만이 아니었던 듯합니다. 영상 속 연기자들과 스태프들도 연신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댓글을 보니 눈물을 흘렸다는 고백이 연이어 나왔습니다. 이유야 가지각색이겠으나 모두가 아이들이 전하는 음성이 마음 한편에 닿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버리는 온갖 자극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자극들에 피로를 느끼면서도 더 많은 자극을 얻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자극은 여러 가지입니다. 소유욕에 불을 당기는 온갖 욕망덩어리들이나 지적 만족이나 명성을 드높여줄 상징 자본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자극은 그 형태와 주제가 무엇이든 다음에는 이전보다 더 큰 자극을 추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더 큰 자극 추구는 결국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더 크고 더 강한 자극에만 모든 감각이 초점을 맞춰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기 어려워집니다. 삶의 작은 기적들을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나의 친절과 미소를 필요로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 안에는 자극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대함이라는 자극에 사로잡힌 제자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막 나오시는 참에 시작합니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1절입니다. 

1b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이 말을 건넨 제자가 누구인지 마가는 기록해 두지 않았습니다. 아마 나머지 열한 제자들도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제자들은 성전을 보고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성전벽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벽돌과 높은 탑, 화려한 문, 커다란 크기의 건물 자체는 제자들의 감각을 사로잡았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이른바 헤롯 성전으로 불렸고, 증축을 위해 공사 중이었습니다. 요세푸스를 비롯한 당대의 역사가들은 헤롯 성전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라고 평했습니다. 크기는 물론이고 모든 기물이 새것이고 건축 방법과 소재 또한 신식이었기에 더 높이 올라가는 저 아름다운 성전을 보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성전이 보여주는 규모에 그야말로 압도되었습니다.

제자들 심정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 작은 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게 가난한 어부들이었습니다. 평생 자기 집과 바다를 오갔습니다. 소박하게 살아온 이들이 예루살렘이라는 당대의 거대 도시로 들어갔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들이 가슴은 마구 뛰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가는 곳마다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크고 화려한 성전을 마주했을 때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은 그 앞에 압도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단지 성전의 외형에만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겐 성전의 영광이 자기들을 중심으로 재편되리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자기들은 그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제자들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눈치 빠른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께서 영광 받으실 때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속 권력과 다를 바 없는 정치적 집단으로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성전이 주는 힘과 권력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들 소유가 되리라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회복시키시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온 세상이 예루살렘 성전 앞에 엎드릴 때, 바로 내가 주님과 함께 성전의 중심에 서 있으리란 기대를 품었습니다.

제자들을 고양시키고 기대감에 사로잡히게 만든 성전, 그곳은 본래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공간입니다. 제사장들은 인간 편에 서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제물을 선별하여 하나님께 겸손히 드리며 용서를 부탁하는 장소입니다. 인간은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서를 경험하고 이제부터 의롭게 살겠다는 결단이 이뤄지는 공간, 바로 그곳이 성전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비를 기억하고, 자기 안에 차오르는 미움과 분노를 경계하며 이웃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룩한 상징입니다. 성전은 그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하나님의 현존 안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시의 성전은 사람을 살리고 거룩으로 이끄는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경제 논리로 작동되었고, 권세 있는 자들이 자기 힘을 과시하는 곳이 되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작은 가산마저도 삼키려 혈안이 된 공간, 곧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이 거룩의 상징이 아니라 욕망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나니, 사람들은 성전을 보며 더는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한몫을 단단히 챙길 기회의 땅으로, 어떤 이는 성전을 통해 권력자가 될 수 있는 힘의 통로로 여겼습니다. 거룩을 상실한 성전은 사람들을 자극하고 추동하는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성전이 주는 자극에 감각이 마비되고 나니 주님 말씀에는 무감각이 되어버렸습니다.

십자가라는 상징
성전을 바라보느라 정신없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의 다음 말씀이 죽비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2절입니다.

2b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주님은 작정하신 듯 제자들의 기대를 일거에 무너뜨리십니다.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은 단지 건물만 사라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전이라는 체계, 성전이라는 권력, 성전이라는 상징이 무너져 자취를 감추리란 말씀입니다. 성전이라는 자극에 넋이 나가 크고 웅장함에 자기를 잇댄 제자들의 기대를 깨치시는 주님의 말씀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상치 못한 주님의 단호한 말씀에 제자들은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속은 복잡했겠지요. 저 우람한 성전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는게 말이 되는 일인가? 저 아름다운 성전이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크며, 새로운 세상이 저 성전을 잘 활용하면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제자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 가운데 그나마 주님과 가장 가까웠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가 주님을 따로 찾아가 방금 하신 말씀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때 주님의 모습이 의미심장합니다. 3절입니다.

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보고 앉아 계실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따로 예수께 물었다.

예수님의 위치와 앉으신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개정판 번역으로 감람산, 새번역으로 올리브산은 성전 동편에 있었습니다. 이 산에서 주님은 쉬시고 기도하시고 고난을 앞에 두시고 우셨습니다. 올리브산은 그런 곳입니다. 이 산 중턱에 앉아 주님은 성전을 마주 보고 계십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저 아름다운 건물, 야훼 신앙의 상징, 유대 민족의 자부심인 성전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바라보며 벅찬 감동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 아버지를 만나는 장소인 저 성전은 이미 그 기능을 잃고 오히려 사람들을 옥죄고 누르는 그늘진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에 비친 성전은 이미 무너져 내렸습니다.

마가는 4절에서부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성전은 반드시 무너지며, 세상은 전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누구에게도 속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리스도다 하며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욕망의 상징이 되어버린 성전이 무너진다고 거룩이 찾아오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자극하는 상징물이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곧바로 다른 상징물을 찾아 나서는 것이지요. 너도나도 근사한 약속을 하며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내가 더 크다. 내가 더 아름답다. 내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다! 구원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게 된다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너희를 만족시킬 테니 나를 믿고 섬기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전이라는 상징이 쓰러지니 더 많은 성전들이 나오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님은 올리브 산 이편에서 성전을 바라볼 때 분명히 아셨습니다.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 또 다른 성전을 세운다고 세상은 잃어버린 거룩을 되찾을 수 없음을 말이지요. 모든 거짓 상징들이 무너진 자리에 서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십자가임을 주님만 홀로 아셨습니다. 십자가라는 무익한 상징, 약하고 고통스러운 상징,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오롯이 보여주는 상징인 십자가가 성전의 폐허 위에 세워져야 인류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음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폐허 위에 십자가가 서기 위해서는 주님은 죽으셔야 했습니다. 성전을 마주 보며 주님은 당신께서 죽어야 함을 더욱 분명히 받아들이셨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전이라는 상징과 달리 십자가라는 상징은 작고 약합니다. 보잘 것도 없습니다. 성전이라는 상징은 우리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고 만족감을 줄 것만 같지만 정작 바라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라는 세계, 거룩이라는 세계, 은총이라는 세계를 가로막습니다. 우리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무감각으로 만드는 자극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상징은 다릅니다. 바울이 말했듯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보여주고 자비를 보여주고 겸손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라는 상징은 본래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된 존재이며, 본래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존재였음을 말해줍니다. 

십자가라는 상징을 오롯이 마음에 품을 때 세상 도처에서 내가 메시아라고 자처하는 온갖 욕망들의 소음에 귀를 닫을 수 있습니다. 무감각에서 벗어나 참된 감각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감각이 살아나니 푸른 하늘이 보이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신음하는 이웃의 아픔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부른 꾸밈없는 합창에 눈물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감각의 소생은 우리가 본래 바라보고 들어야 할 십자가라는 상징을 곁에 둘 때뿐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전이 제아무리 크고 화려하다 할지라도 그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혹여 성전같이 크고 화려한 것에 기대를 걸고 계신지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무너짐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너진 터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십자가를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