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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성전보다 큰 사람(막 12:38-44), 창조절 11주

by 청파비둘기 2024. 11. 11.

권력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
어느시대나 권력은 탄생하고 몰락하기를 반복합니다.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면 환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우려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권력의 형태가 어떠하든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우리 내면의 가치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권력이 탄생하면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환호가 세상을 뒤덮습니다. 막강한 권력자의 등장은 그 권력자 주변 사람들 들끓게 했습니다.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자기에게 찾아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그 권력과 자기와의 관계를 드러내기에 혈안이 됩니다. 권력의 탄생을 뒷바라지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자기의 노력을 최대한으로 평가받기를 원하고 그 결실 누리기를 원합니다. 눈치를 살피며 저울질하던 사람들은 비로소 줄을 서기 시작하고 자기 이익 계산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세상을 소음으로 가득 채우고 온갖 욕망의 아귀다툼을 시작합니다.

모든 권력이 그렇습니다. 최강 국가의 대통령이 선출되었을 때, 새 왕이 등극했을 때, 새로운 황제가 패권을 갖고 귀환했을 때 온 세상은 환호했고 사람들은 권력자의 뒤를 따랐습니다. 권력자의 뒤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지나간 길에는 반드시 달콤한 열매가 떨궈져 있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높은 자리를 하사받고, 권력의 작은 부분을 휘두를 수 있는 또 다른 권력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받은 지위와 권력으로 세상을 이롭게 통치하면야 무슨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권력자에게서 떨어진 작은 권력 한 조각을 취한 이들이 세상을, 특히 저보다 약하고 작은 사람들을 어찌 대했는지를 말입니다.

권력의 탄생과 새 권력의 편에 서기 위해 광분한 사람들의 다툼질을 보며 그 누구보다 고요한 탄생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을 진정으로 구원할 그리스도로 오신 주님은 환호와 열광 속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보잘것없는 허름한 곳에 주님은 오셨습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광야의 작은 동물들, 하늘의 별들만이 주님의 탄생을 기뻐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오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온 세상이 환호하고 열광했습니다.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는 뜻의 호산나를 위치며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들의 환호 전부를 폄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환호하며 열광한 이유는 주님을 권력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력의 탄생으로 여겼기에 사람들은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주님이 타신 작은 나귀가 무슨 의미인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이 환호에 단 한 마디로 응답하지 않고 홀로 고요함을 지키셨던 이유를 이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권력자의 길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권력이 요동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주님의 침묵과 고요를 닮아야 합니다. 뒤바뀐 세계 안에서 저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이해타산을 따지기 바쁠 때, 우리는 주님이 가고 계신 길의 목적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침묵 안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이 가득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자기 몸이 찢겨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고요를 우리 존재에 가득 채울 때, 믿는 사람들의 길은 권력자의 뒷편이 아니라 그 권력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자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을 버린 율법학자들
오늘 우리가 함께 다루게 될 성서일과 복음서 말씀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율법 학자들입니다. 율법 학자란 히브리말로 '소페르'로 본래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서기관이라 일컫습니다. 당연하겠지만 고대 사회에는 글자를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이들은 서기관이 되어 유다 왕국의 각종 문서를 다루고 조약을 확인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가운데 율법을 필사하고 기록하며 해독 및 해설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그들의 업무였습니다.

서기관들은 특별히 바빌론 포로기에 그 중요성이 더 커졌습니다. 성전도 무너지고 고향에서 쫓겨나온 이들에게 율법은 그 자체로 신앙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이때부터 서기관들은 율법 학자의 역할을 맡아왔고, 당대의 사제 계급과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유대 사회 안에서 권력 집단이 되어갔습니다. 귀족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율법 해석을 부탁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재판에도 관여했는데, 율법이 유대 사회 안에서 판결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율법 학자들의 해석은 판결에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들의 힘과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의 모든 권력 집단이 그러했듯 율법 학자들도 당대의 세력들과 적절히 타협하며 서로를 지켜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는 논쟁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우월한 종교 계급의 상층부로 여겼습니다. 헤롯 왕조와 역시 협력 관계를 지냈고, 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일이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고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든 관심이 권력, 즉, 위를 향하고 있으니, 아래에도 사람이 있음을 이들은 잊어버렸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율법 학자들은 레위 지파와 달리 자기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적 위치가 높아짐에 따라 사유 재산 또한 늘어났다고 합니다. 권력과 재산이 늘어나는 일을 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재산을 더 많이 채우기 위해 본래 갖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들을 내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율법 학자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일까요? 율법 학자가 본래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이름 그대로 율법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일입니다. 율법의 지향을 몸에 새겨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실 때, 교리적인 내용만 주시지 않았습니다. 모세 오경을 비롯해 여러 예언서를 통해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한 분만 믿고 따를 것, 고아와 과부를 업신여기지 말 것, 나그네를 홀대하지 말 것, 자비를 베풀고 약자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 것입니다. 유대 사회가 지켜야 할 책무는 하나님 앞에 선 마음으로 정의를 지키며 사는 미슈파트(정의)와 자비와 의로운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 쩨다카(공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미슈파트와 쩨다카를 마음에 새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 학자라면 이 일, 곧 율법의 지시 사항을 누구보다 바르게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취하기 시작한 이들은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정신이 향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따라야 할 이들이 권력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잃어버린 율법 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인간이 어떤 순간에도 지켜야 할 마지막 가치인 인간성마저 버렸습니다. 약자들을 돌보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착취하고 자기 권력을 위해 짓밟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런 율법 학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꾀하는 모리배들이라면 납득하겠습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가난한 과부의 남은 가산마저 삼키는 자,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자, 장터에서 인사받기 좋아하는 자가, 다른 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손으로 기록하고 전하는 율법 학자라는 기가 찰 노릇입니다. 당대의 성전과 유대 종교가 어디까지 무너졌는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책무를 맡은 이들이 말씀의 뒤를 따르지 않고 권력의 뒤를 따를 때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까지 망가뜨리게 됨을 보여주는 슬픈 예가 바로 율법 학자들입니다.

 

예수의 성전 정화, 야코프 요르단스, 루브르 박물관



성전 보다 큰 여인
주님은 율법 학자들과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시선을 돌려 헌금함에 헌금을 넣은 과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43b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맥락이 단지 헌금 생활의 강조라던가 헌신에 대한 칭찬이 아님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오늘 본문은 성전 권력 체계에 대한 비판입니다. 성전은 약자들을 돌보고 자비를 베푸는 곳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것까지 빼앗아 제 배를 불리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 권력이 강압으로 가난한 과부의 돈을 빼앗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은 율법에 따라 정당하게 징수했습니다. 율법에 따라 헌금하는 일은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으니, 부자나 가난한 자나 예외 없이 헌금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참으로 냉정한 율법 해석입니다. 율법의 핵심인 정의와 공의, 미슈파트와 째다카가 사라진 딱딱하게 굳어버린 율법 해석을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냉혹한 해석을 정당화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 해석에 권위를 부여한 이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율법 학자들입니다. 성전이라는 거대한 상징이 약자들을 억누를 때, 성전 권력과 야합하여 착취를 위한 적당한 해석적 틀을 제공한 이들이 율법 학자들입니다. 즉, 이들은 착취의 동조자들입니다. 주님은 지금 이 과부의 헌금 행위를 보며 성전과, 율법주의, 율법 학자들의 인간성 없는 차가운 영혼을 질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전 체제에 대한 비판을 위해 과부의 헌금을 가르침의 소재로만 삼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장 크고 많은 헌금을 했다는 이 선언의 진위를 성찰해야 합니다. 이 과부의 헌금의 가치가 무엇이기에 가장 큰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상징적인 선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녀의 헌금은 고작 렙돈 두 닢이지만 성전에 찾아온 대부호들의 헌금보다 많은 헌금, 즉 성전의 금고를 뒤흔들만한 엄청난 금액이라는 뜻입니다. 여인은 마지못해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한 헌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의 헌금은 무너져 내려가던 성전의 위상과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율법 앞에서 울리는 경종이었습니다.

성전 헌금의 본래 역할이 무엇입니까?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은 곧 성전에 대한 세금입니다. 이 세금은 모든 유대인의 의무입니다. 성전은 이 헌금으로 건물을 유지보수하고 관리합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한 동물과 재료를 구입하고, 성전 봉사자들과 관리를 위해 임금을 지급합니다. 또한 성전이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인 째다카, 즉 자선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됩니다. 한마디로 제사라는 거룩한 사역과 자선을 위한 사역을 위해 사용되는 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당대의 성전은 어떠했습니까? 종교 권력자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습니다. 제사는 기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성전 관리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궁리했습니다. 성전 세금을 위한 환전소를 만들어 환차익을 버는 데 몰두했고, 재물의 급을 나누어 더 비싼 제물을 팔았습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율법 학자들은 이 모든 일에 율법적 정당성을 공급했고, 이들은 야합하여 가난한 이들의 작은 가산마저 삼켜 먹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성전을 향해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여인은 바로 이런 성전에 헌금한 것입니다. 망해버린 성전에 헛돈을 쓴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여인도 알고 있었겠지요. 내가 헌금하고 있는 이 성전이 나의 조상들이 제사 지내던 그 거룩한 성전이 아님을 말이지요. 그러나 여인은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이 무너져 버린 성전을 회복시키시고, 나의 모든 재산으로 이 성전이 본래 했었어야 했던 일, 거룩한 제사를 드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성전 창고를 개방하는 일에 사용되길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이 자기 가진 렙돈 두 닢을 헌금함에 넣었던 일은 성전의 불의를 폭로하는 일이며, 성전 권력자들의 죄를 세상에 드러내고, 성전의 부정을 침묵했던 다수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헌금하던 그 순간, 이 여인은 성전보다 큰 사람이었습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여인의 두 렙돈, 곧 동전 두 개가 헌금함 바닥에 떨어졌을 때 성전은 흔들렸습니다. 부자들의 비웃음은 되려 수치가 되었습니다. 돈의 값어치 때문이겠습니까? 두 렙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심과 공의를 향한 믿음의 무게가 성전 안에 모인 누구보다 크고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회복을 향한 마음과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을 올곧게 믿는 그 믿음에 자기 전부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시대입니다. 온 세상이 권력과 욕망 앞에 하수인 되기를 자처하는 시대입니다. 자기가 해야할 일을 내팽개치고 편법과 불의를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시대입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성전보다 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작은 일에 성심을 다하고 바른 신앙을 지키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예배를 여는 시간에 드렸던 린테와 야니 자매같은 이들이 필요합니다. 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 마지막 남은 차비마저 털어 풀빵을 사주고 먼 길을 걸어갔던 전태일 같은 이들이 필요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인간성을 지켜낸 이들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