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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내 오른쪽과 내 왼쪽(막 10:35-45), 창조절 8주

by 청파비둘기 2024. 10. 20.



제자들의 처음을 기록한 이유
예수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고 따르는 제자들을 생각하면 여러 감정이 교차합니다. 주님을 바로 곁에서 매일 같이 볼 수 있으니 참으로 복이다 싶다가도, 주님과 동행하는 일이 마냥 편치 않고 풍찬노숙하기를 밥 먹듯 하며, 세상의 환호를 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주 세상의 멸시를 받았다는 점에서 제자로서 사는 삶이 고되었겠다 싶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자신이 예수의 제자가 되리라 짐작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은 제자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연습한 적이 없습니다. 제자 학교에 입학해서 제자 수업을 받았다거나, 제자가 되기 위한 훈련 과정에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던 생활인이었습니다. 어부에서 세리에 이르기까지 직종도 다양했고 면모 또한 다채로웠습니다. 불같은 성격을 가진 이도 있었고, 섬세한 성격을 가진 이도 있었고 계산에 빠른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각자 삶을 살던 평범한 유대 사람들이었던 제자들은 어느날 예수님의 느닷없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부름은 참으로 담백했습니다. 별다른 설명이나 약속도 없었습니다. 그저 '나를 따르라'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를 부르실 때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는 약속 정도가 다였습니다. 이 약속을 하신 분이 예수님임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 그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으나, 시몬과 안드레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뚱딴지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는 그 단순한 부름을 거절한 제자들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제자들이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을 쫓아가야 할 납득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따랐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예수께 사로잡혔다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그 말씀 속에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그들은 직감했습니다. 부름을 받는 그 처음 순간에 제자들 눈앞에 선 이 남자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인류의 그리스도가 될 분이신지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빛과 음성에서 그들은 분명히 길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을 바로 그 눈앞에 나타난 분이 이끌어 주심을 그들은 믿어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야말로 믿어진 것입니다. 눈앞에 선 저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저분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그저 믿어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를 가리켜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부름을 받은 그 순간부터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살아온 길에서 벗어나 내가 보여줄 새로운 길로 가자고 하셨을 때,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그 길이 어떤 것으로 포장되어 있고, 그 길을 가는 가운데 어떤 일을 겪을지, 그리고 그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거부할 수 없는 그 불가항력의 힘에 이끌려 주님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갈릴리의 평범했던 이 유대의 젊은이들은 제자가 되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의 처음 시작은 부족한 것투성이였습니다. 지도도 없고 경험도 없고 무엇보다 목적지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여행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만나는 허점투성이 제자들, 엉뚱한 제자들, 그리고 주님을 배반하여 도망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될 이야기도 제자들이 갖고 있었던 오해, 그로 말미암은 헛된 기대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자들의 처음은 그야말로 부족한 것 천지였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끊임없이 가르치셨던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상상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로 이르는 길로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제자들은 그 길이 그저 비단길인 줄 알았고 그 길 끝에는 영광과 화려한 보상이 기다리는 줄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서 성서일과 말씀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의 굽은 이해를 교정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처음이 이토록 어리숙하고 부족했다지만 훗날 제자들은 위대한 사도가 되어 각 교회의 기둥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찰하고 있는 이 복음서가 교회에 회람되고 서로에게 읽히던 시기에 제자들은 요즘 우리가 쓰는 말로 레전드, 그야말로 전설 같은 존재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복음서는 그 위대한 사도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위대한 사도요 교회의 기둥이라 할지라도 그들 또한 부족한 인간이었고 철없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음을 교회는 숨기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부족한 처음이 있었음을 훗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제자로서 준비되어 있었기에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느닷없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학원은 물론이고 과외와 자습을 해가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생각해 보면 우리 또한 느닷없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처음 또한 부족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성숙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주님의 가르침으로부터입니다. 이천 년 전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으로 차츰 성숙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이제 주님이 가르치신 그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야고보의 요구
성령강림 후 22주인 오늘 복음서 본문의 시작은 마가복음 10장 35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주뼛거리는 것 없이 당당하게 주님께 요구합니다. 35절입니다. 

35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요구가 정중한 부탁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라는 말에서 이들의 요구는 더 이상 부탁이 아니라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 맡겨둔 것이 있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주님은 별말씀 없이 너희에게 내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느냐고 묻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37절입니다.

3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가 드러났습니다.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우리 형제가 주님의 좌우 그러니까 주님의 최측근 요직에 앉혀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쉽게 풀자면 자기 자신을 인사 청탁한 것입니다. 얼핏 철부지 어린아이의 요구처럼 보이지만 요한과 야고보는 진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을 믿었고, 바로 그때 하나님 나라가 본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주님께서 영광을 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하게 됨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주님께서 받으실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지금보다 더 좋아지는 것,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근사해지는 것, 지금까지의 갈릴리의 보잘것 없는 인생이 역전하여 모두를 호령하고 세상에서 떵떵 거리며 살게 되는 것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형제들은 생각했습니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지금보다 더 위대해지시고 더 많은 인기를 누리시겠구나! 
세상 모든 민족의 왕이 되시겠구나!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그 나라가 온다면 우리를 억누르는 로마 제국보다 더 크고 강력한 나라일거야! 

형제들이 믿었던 주님의 영광과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이해가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이렇게 좋은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주님께 당당히 요구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좌상과 우상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 일이겠습니까? 황금 옷을 입은 주님을 보필하는 좌의정과 우의정이 되어 세상을 호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기다린 하나님 나라는 세상 권세의 정점에 선 강력한 제국과 다름 없었습니다. 두 형제의 이 황당한 요구에 대한 주님의 대답을 듣기 전에 다른 동료 제자들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41절입니다. 

41   그런데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두 형제가 선수를 쳐서 주님 좌우 최측근 요직에 자기들을 앉혀달라는 인사 청탁에 다른 열 제자가 분개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모두 같은 마음, 자기들이 주님의 좌우 요직에 앉고 싶어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여러분,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해 다른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요직에 앉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믿은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인생 역전의 기회로 여겼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나눠 받음으로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기대와 다르다면 그 나라의 요직을 맡고 싶겠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고생스럽고 별 볼 일이 없다면 그 나라에서 직책을 맡고 싶겠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인생을 역전시킬 찬스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앞다투어 높은 자리를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영광 받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한 채 그것이 그저 자기들의 현재 삶을 그럴듯하게 바꿔줄 기회요 보상으로 여겼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이렇게 항변할지 모릅니다.

주님, 저희가 집도 버리고 생계도 버리고 가족도 등을 졌습니다. 주께서 당신의 길을 따르라고 해서 온갖 설움을 당해가며 당신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 끝에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이 고생스러운 제자의 삶에 대한 적절한 보답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오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영광을 서둘러 받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고생스런 떠돌이 제자 생활을 마치고 영광의 나라에서 주님을 수행하며 세상을 호령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받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 채 설익은 기대로 누가 주님의 오른팔이 될지 전전긍긍하는 제자들을 볼 때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주님의 길을 가십니까?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다고 믿으시길래 주님의 도를 따르십니까? 혹 우리 또한 나의 인생을 지금 보다 더 멋지고 근사하게 바꿔주리라 믿고 있습니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믿음 생활을 잘하면 무언가 얻을 것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인생 역전의 기회로 여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믿음이 언제 유치 해지는 아십니까? 그저 달라고 하는 것에서 멈출 때, 그저 채워달라고 하는 것에 머물 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왜 우습게 보겠습니까? 저 사람들 기도를 들어보면 매번 달라는 것투성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달라는 것은 많은데 주겠다는 것은 없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때에 따라 알맞은 것들을 채워주시는 분이 분명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 그다음 장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주님의 길 온전히 걷고 계신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가 걷는 이 길에는 애석하게도 보상이나 보답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길은 대가와 희생을 요구하는 법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의 길을 걸을 때 그 길 끝에 있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희생입니다. 희생, 그것을 다른 말로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철부지 제자들의 요구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이러합니다. 39절입니다.

39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말로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고 싶으냐?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러분, 그 잔과 세례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제자들이 아직은 깨닫지 못했던 것,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은 믿었지만 그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놓쳤던 핵심 바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자기들이 걷고 있는 길이 죽음의 길인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인생 역전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만족시켜 주는 보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의 목적지가 십자가인데 우리의 주머니를 가득 채울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가볍게 가야 합니다. 나눠주고 털어주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부활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그리고 주님의 영광에 대하여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세상으로 뻗어나갈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걷는 길의 끝에 보답과 보상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음을 깨닫고 나서 제자들은 더는 철부지가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우며 스스로 죽기까지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가운데 야고보의 이야기로 오늘 성찰을 마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요한과 더불어 포부도 당당히 예수께 인사 청탁을 할 정도로 낯이 두꺼운 인물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앞길을 방해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태워 죽이는 게 어떠냐고 말할 정도로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인생 역전의 기회로 삼아 자기를 방해하는 인물을 모조리 자기 발 아래 두고 싶어 했던 참으로 못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그는 변했습니다. 자기가 걷는 길 끝에 십자가가 있음을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 의미를 알게 된 야고보는 유대의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고 자기가 불로 태워버리자고 했던 사마리아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속죄의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야고보는 주후 44년 헤롯 아그립파 1시에 의해 참수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형장에 올랐을 때 분명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그날 내가 앞뒤 분간없이 주님께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 부탁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구나. 주님의 십자가 좌우에,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들과 같이 나도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는구나. 야고보는 아마 주님을 찬양하고 죽음을 맞았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유해는 예루살렘 어딘가에 묻혔다고 훗날 9세기 무렵 스페인 북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라고 부르는 곳에서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의 정신이 담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순례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일컫는 바로 그 길입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길을 온전히 걷다 십자가로 자기의 길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그 길로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믿음의 길은 야고보에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연결된 것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주님의 길을 온전히 걸어갑시다. 그 길 끝에 보상과 보답이 없다해도 걸어갑시다. 그 길 끝에 십자가를 향해 갑시다. 십자가와 함께 내가 죽을 때 예수가 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