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청 말씀 나눔

이유없음(막10:2-16), 창조절 6주

by 청파비둘기 2024. 10. 7.

사과하기, 사과받기
한 가지 질문을 여러분께 던지며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사과라는 것은 하기가 어려울까요, 받기가 어려울까요? 우리는 언뜻 사과를 받는 일이 사과하는 것에 비해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과를 받는 행위는 사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용서한다는 뜻이지요. 용서에는 대단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신뢰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미워할 이유를 찾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신뢰할 이유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이 그것을 어렵게 여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시대 세태를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하나가 용서의 마음 같습니다. 아니 용서하기를 거부하고자 악다구니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사죄하라고 윽박지르지만, 그 사과와 사죄가 어떤 모양이든 나는 그것을 받지 않겠다고 입과 마음을 굳게 다문 모습, 바로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나에게 끊임없이 죄를 짓는 나의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는 용서해야 합니까? 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마 18:21-22)

 


증서가 감추는 것들
오늘도 주님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 혈안이 된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악의를 숨긴채 이렇게 질문합니다. 

2b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던진 질문은 이혼의 가능 여부입니다. 이혼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또 어떤 경우에 가능한지 예수께 물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이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3b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모세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리새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파놓은 함정에 예수가 제대로 걸려들어 오는구나! 라며 비겁한 웃음을 감출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만약 예수께서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면,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대적하게 됩니다. 유대의 법으로 예수를 처단할 수 있는 완벽한 빌미를 잡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예수께서 모세의 법대로 이혼이 가능하다고 답한다면 예수 당신도 율법 아래의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니 다시는 율법을 무시하거나 성전의 권위를 훼손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것입니다. 바리새 사람들 입장에서는 외통수를 두었다고 속웃음을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경우를 말하라는 주님의 물음에 이들은 재빨리 대답합니다. 4절입니다. 

4b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이혼증서, 곧 이혼이 합당하다는 이유가 적힌 증서를 받는다면 모세 조차 아내를 버릴 수 있도록 했다고 바리새 사람들은 답했습니다. 이혼 증서에 쓰여 있는 내용들이 무엇이길래, 그러니까 어떤 이유 정도라면 이혼이 가능한 것일까요? 불투명한 금전 관계, 배우자의 역할과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 무엇보다 바람을 피우고 신뢰를 파괴하는 행위 등등이 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 행위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윤리적이며 지탄받아 마땅한 행위들입니다. 만약 이 행위들이 이혼 증서에 쓰여 있다면 그 이혼은 합당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이혼의 가능 여부를 따지는 듯 보이는 바리새 사람들의 말 가운데 당대의 유대 사회가 여성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하찮고 가벼이 여기고 있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혼 요구는 남편이 아내에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유대의 법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바리새 사람들이 이혼을 말하면서 아내에 대해 사용하는 동사를 보십시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느껴지시는지요? 바리새 사람들에게 이혼은, 곧 아내를 버리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사람을 버린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가 나에게 쓸모없는 존재이고, 불쾌하며, 곁에 두고 싶지 않다는 선언과 다름없습니다. 상대방을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다름없이 대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언제든 내다 버려도 괜찮은 존재로 여긴다는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바리새 사람들은 이혼에 관해 묻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사람을 버릴만한 이유가 있다면 버려도 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고 나의 기준에 모자라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 증서가 그것을 보증하고 있으니, 나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다. 바리새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이혼증서에는 바로 이런 힘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을 버릴 수 있다고 보증해 주는 이 문서가 겉보기엔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보이지만, 이 증서에는 힘의 위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 당대의 이혼 증서는 강자가 약자에게, 다시 말해 강자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증서를 들이밀 때 아내는 자신을 방어하고 변호할 기회와 힘이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이 증서는 가진 자의 힘을 더욱 강화해 주는 도구가 됩니다.
 
이 맥락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 사람들의 대화를 다시 살펴보면 논쟁의 주제가 단지 이혼 문제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의 권위를 획득한 법과 규율이 약자를 보호하고 지키는 방패가 아니라 오히려 많이 가진 자를 옹호하고 그들의 폭력과 오만을 정당화시켜 주는 얼룩진 칼과 창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할 이유를 찾는 사람들
따라서 주님의 일갈은 이들의 은폐된 욕망을 드러내어 부끄럽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5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모세가 이혼을 가능케 하도록 계명을 준 이유가 다름 아닌 사람들의 악한 마음 때문이라고 주님을 말씀합니다. 완악한 마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도구로 여기며 자기 욕심에 부합하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내다 버렸던 당대의 힘 가진 자들의 폭주를 막기 위해 최소한의 법적 장치로서 이혼 제도를 계명으로 규정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내다 버리기 위해 합당한 이유와 근거를 찾아내어 나는 법대로 했다고 으름장 놓는 이들을 주님은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란 미워할 이유를 찾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라면 내가 너를 미워하고 너를 버려도 문제 될 것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미워하고 지워버림에 있어서 납득할 만한 합리적 이유를 얼마나 잘 찾아내는지 모릅니다.

'네가 나를 그렇게 대했으니까!'
'네가 나를 실망하게 했으니까!'
'네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까!'

내가 너를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길 가는 사람 누구라도 나를 지지할걸? 그러니 내가 너를 미워함에 있어서 나를 탓하지 마! 책임은 너에게 있는 거야! 이 증서가 그것을 보증해! 라고 우리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날이 바짝 선 말들을 누구에게 합니까? 우리보다 크고 강한 사람들에게 합니까? 아니요. 언제나 우리보다 약한 사람에게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당대의 이혼 증서가 정당한 판결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약자를 더욱 억압하고 강자의 논리를 대변해 주는 기울어진 계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이지요.

미워할 이유를 당당하게 들이미는 바리새 사람들과 그리고 우리들 앞에 주님은 전혀 엉뚱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6절에서 9절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사람을 미워해야 할 이유를 찾는 세대를 앞에 두고 창조 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창조 때에 지어진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워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할 것들만이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는 말씀은 단지 결혼 생활의 영속을 위한 다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내 눈앞의 타자, 그가 아내 혹은 남편, 부모, 형제, 친구, 누구라도 상관없이 주께서 나의 앞에 짝으로 두신 분이라면 나의 미움과 증오로 그를 갈라놓아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짝지어준 그 사람에게서 미워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유없이 사랑하라
청파의 청년 여러분, 미워할 이유를 찾아내어 미움을 정당화하기보다 사랑할 이유를 찾아내는 데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물론 있습니다. 막무가내식 용서와 사랑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라면 적어도 미워할 이유가 백 가지가 넘어도 사랑할 이유가 한 가지라도 있으면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면 저 사람과 관계를 끊고, 요즘 말로 손절하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천 가지가 넘어도 그가 작은 목소리로 용서를 구한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그게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사람들 비위 맞추느라 당신 삶 허비하지 말라 하지요.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소중하니 거슬리는 사람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지요. 세상의 가르침으로는 그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창조 세계를 따르는 우리는 그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갈라서 내다 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차고 넘치는 미워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이유 단 한 가지를 찾아내려 애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인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가 아이들 같은 이들의 것이다.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혼 증서로 시작한 말씀을 어린아이의 말씀으로 맺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부모님이 자기 아이를 더 사랑할까요? 아이들이 자기 부모님을 더 사랑할까요?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원이가 저를 더 사랑합니다. 제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제 아이가 저를 더 사랑합니다. 제가 아무리 아이를 혼내고 다그쳐도 지원이는 저를 용서합니다. 제게 먼저 다가와 저에게 안깁니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사력을 다해 사랑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혼을 내고 심지어 매를 들어도 그다음 날이면 아이는 제 부모부터 찾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이 어린아이 같은 이들의 것이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사랑하기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미움을 쏟아내는 시대입니다. 용서를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미워할 이유, 증오해야할 이유, 혐오해야 할 이유, 손절해야 할 이유 충분히 많습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이혼 증서 안에는 모두 맞는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이유를 찾아냅시다. 도저히 없습니까? 이유를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함에 이유는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 하나가 이유라면 이유가 될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이유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허물 많은 우리를 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이유없이 사랑합시다. 그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몫임을 잊지 맙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