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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잿빛 하늘(막 10:17-27), 창조절 7주

by 청파비둘기 2024. 10. 13.

타고난 재능이 흘러야 할 방향
일본의 만화 작가 고토케 코요하루는 여러 단편과 장편을 그렸지만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절치부심하여 2016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2020년에 종료한 그의 작품, <키메츠노 야이바>는 다행히도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 그리고 미국과 유럽 등 그야말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우리말 번역은 <귀멸의 칼날>입니다. 그 작품의 한 에피소드 가운데 '렌고쿠 교쥬로'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작중에서 그는 주인공과 함께 선한 편에 서 있었고, 강력한 힘을 갖고 태어났으며 의협심이 크고 정의로우며 무엇보다 따듯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교쥬로는 그러나 매우 강력한 악당과 대결 중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패색이 짙었던 그를 깨운 것은 렌고쿠의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병환으로 생명이 위독하던 때에 당시 어렸던 교쥬로에게 들려준 한 가지 당부였습니다.

교쥬로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이렇게 말합니다. 교주로가 남들보다 강한 힘을 갖고 태어난 이유는 약자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타고난 그 힘을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해야 함이 하늘의 뜻이다. 만약 하늘이 준 힘과 능력을 사욕을 채우거나 남을 다치게 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하늘의 뜻을 등지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렌고쿠는 어머니의 유언을 잘 받들었고 마지막까지 약자들을 지키기 위해 살아갑니다. 

비록 만화이지만 자기의 재능과 능력을 타자를 위해, 그것도 약자를 위해 흘려보내야 한다는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 시대가 공유하는 정신과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어떠합니까? 한 개인이 타고난 재능과 능력, 부유함을 오로지 그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몇 해 전 돈 많고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난 것도 실력이고 재능이라 역설했던 어느 인물의 말이 귓전을 맴돕니다.

타고났건 노력을 통해 얻었건 어차피 나의 재능과 능력, 그리고 부유함인데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가 당연한 지금 시대에서는 너무나 맞는 말입니다. 약자를 돕는 것? 좋다. 하지만 내가 원할 때 할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고 또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주장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와 아무 관계 없는 약자를 돕고자 하는 연민의 마음과 실천의 결단이 아주 높은 확률로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조차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능력 없는 이들의 무능과 노력하지 않음을 탓하는 쪽으로 귀결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반대로 자기의 명성을 높일 기회 앞에는 재능과 돈을 쓰는 데 인색함이 없습니다. 자기 자산을 증식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투자와 지출을 아끼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판단과 주장이 비윤리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부와 재능을 내 마음대로 쓰는 일은 자유입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가 적극 장려하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곱씹을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이 논리를 아무 비판 없이 따라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신앙 양심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세상은 이런 생각을 나약한 패배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마가복음서의 예수님께서도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성찰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젊은 이의 물음
지난 주 우리는 이혼 문제로 시비를 걸어온 바리새 사람들과의 논쟁과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심으로 사람을 내다 버리는 자가 아니라 조건없이 사랑하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될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살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르침 바로 뒤이어 나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 주님을 붙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17절입니다. 

17b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이 사람이 젊었다고 묘사하고, 누가는 이 사람을 관원이라 칭합니다만, 마가는 이 사람의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중에 밝힐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사람을 일단 젊은 사람으로 여기도록 하겠습니다. 이 젊은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18절에서 이 표현에 대해 경계하며 말씀하십니다.

18b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실제로 '선함'이라는 형용사를 특정인에게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주님을 지나치게 높여드리려 했던가, 아니면 자신의 갈급한 인생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붙였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이 젊은이는 지금 어떻게 해서든 예수께 자신의 이 중대한 질문의 답을 얻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그 질문의 핵심은 바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감수성에 익숙한 우리는 영생에 대한 물음 자체가 그다지 낯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즉 1세기 유대인에게 이 질문의 결은 우리와 다릅니다. 조금 면밀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젊은이가 말한 영생은 죽음 이후에 얻게 되는 구원 받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죽음 다음에 어디로 간다는 유의 말씀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의 첫 번째 음성을 기억하십니까? 1장 14절 15절입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주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 나라의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부자 젊은이의 질문은 다가올 혹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내가 속하는 사람인지, 내가 그 나라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이 젊은이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히 복된 삶이 가능한지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분, 바로 예수님 뿐임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만이 이 질문에 답이 가능함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 만으로도 이 사람이 하나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무엇보다 이 진리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이가 예수님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은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 젊은 사람은 단지 신앙의 깊이만 훌륭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본받을 만했고 타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19절에서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속여서 빼앗는 일을 금해야 하며,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지침들은 모두 십계명의 후반부 계명들입니다. 우리가 잘 알거니와 십계명의 후반부 계명은 타자와의 관계를 상정합니다. 이 젊은 사람은 이 계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후반부 계명을 잘 지켜왔다면, 아마도 전반부 계명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아주 모범적인 유대인의 삶을 살았을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신앙적으로나 삶으로나 성실했던 이 젊은이를 예수께서도 정말 좋게 보십니다. 21절에서 주님은 이 사람을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좋게 본 것 이상입니다. 주님은 이 젊은이가 자기 제자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21절 후반부에 주님은 이 젊은이에게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나 제자로 삼지 않으셨겠지요. 이 젊은이는 주님의 제자다운 면모를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어긋난 기대
자,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긋남이 발생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 젊은이는 제자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는데, 딱 한 가지가 아쉬웠습니다. 바로 그의 부유한 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b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십계명 율법을 온전히 지키며 살아왔다고 대답하는 순간까지는 이 젊은이에게 희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나의 자리가 온전히 있겠구나! 거기서도 나는 행복하게 살겠구나! 그러나 가진 재산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는 말 앞에 이 젊은이는 무너졌습니다. 22절에서 마가는 이 젊은 사람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점에서야 이 젊은 이의 정체성이 부자임이 드러납니다. 재산을 팔고 제자가 되라는 말씀에 울상을 지었습니다. 여기서 울상을 짓다의 헬라말은 '스튀그나조(στυγνάζω)'입니다. 매우 드믈게 사용되는 표현인데, 본뜻은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듯 어두워지고 스산해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 잿빛 하늘이 드리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이 젊은이의 낯빛이 흐려지고 근심하며 떠나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째서 이 젊은이는 자기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몰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조차 자기 재산과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역시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제아무리 좋아도 돈이 없으면 불행할 것이란 어긋난 믿음이 그의 얼굴에 잿빛 하늘을 드리우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하늘의 보화를 약속하셨습니다. 앞서 살폈던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자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부자 청년에게 하늘의 보화는 그저 신앙적 은유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하늘의 보화보다 내 손에 움켜쥐고 있는 내 통장 잔고의 숫자들이 더 중요했습니다.

떠나가는 이 가능성 풍부했던 청년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어떤 기분이셨을까요. 씁쓸함과 안타까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아주 유명한 말씀인 25절을 말씀하십니다. 

25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아니, 부유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이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 제자들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부유함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26절에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라는 제자들의 말에는 놀라움과 당혹 그리고 약간의 불쾌감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러니까 제자가 되라는 소명을 주셨을 때 가장 기뻐하고 흥분했던 사람들이 누구였을 것 같습니까? 바로 제자들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 그룹에 부유한 사람이 들어오면 누가 좋습니까? 제자들입니다. 길어서 먹고 자고 하기를 밥 먹듯 하던 우리 무리에 부자 한 명 들어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가진 것 다 팔라고 하니 어쩌면 이 젊은 청년보다 기존 제자들의 마음이 더 무너졌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제자들조차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겠지요. 


감사와 흘려보냄
이 젊은이가 근심하며 떠나간 이유를 한 가지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 젊은이에게 너의 재산을 성전에 기부하라고 하셨다거나, 유대 당국에 공적인 기부를 지시하셨다면 혹 그렇게 하겠노라 답하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이 젊은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 가지는 자기 재산을 아무 이름 없고 기치 없으며 효용가치가 일절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씀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고 봅니다. 자기 가진 돈과 재능을 나를 높이고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곳에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 돈을 가난뱅이 저 무지렁이들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이 청년의 부유함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이 죄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모두 팔아버리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 재산을 팔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라신 바는 너의 부와 능력과 재능, 다시 말해 너의 삶을 너 자신을 위해 가둬두지 말고 흐르게 하라. 그리고 흘러야 할 방향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자기 재산을 흘려보내길 거절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돈인데 어째서 내 돈을 그런 곳에 쓰라고 하는지 반발심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이 청년이 비록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고, 예수를 믿고, 율법에도 모범이었지만, 자기 삶을 자기보다 약한 이들에게 나눠줄 수 없는 자기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이 청년의 선택이 참 서글픕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으며, 삶에서도 바르게 살았던 이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 자기 것을 약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나눠줄 그 마음 하나 없음이 그를 제자로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 됨이란 단지 믿음의 크기나 교회 생활의 열심만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 청년에게 그 많은 돈은 다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자기 돈에 사로잡힌 사람이겠지요. 신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면, 저는 이 청년의 부유함이 온전히 이 청년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가 부유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거저 받았다면 거저 주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흘려보낼 용기도 마음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내 돈이고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인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라면 그때부터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주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 그것의 크기나 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흘려보냅시다. 높은 이자를 약속하는 곳이 아니라 아무런 보상이 없는 곳으로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 얼굴은 잿빛 하늘이 아니라, 주님 닮은 맑고 고운 얼굴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