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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은총은 아래에서부터(막 9:30-37) 창조절 4주

by 청파비둘기 2024. 9. 24.

어느 저녁 카페 앞에서
며칠 전 해가 지고 저녁 바람이 그나마 선선하게 불었던 월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다 하고 난 후에 지원이에게 문득 말했습니다. "지원아, 우리 빠방 타고 저어기 가볼까?" 지원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두 손을 높이 들고 "와! 신난다!"하고 답했습니다. 요즘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는데, 마음에 드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신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요즘 너무 더웠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야외 활동이 드물었기에 이런 깜짝 외출에 정말 신이 났던 모양입니다. 

아내와 아이를 차에 태우고 우리 집 뒤편 북악산길의 자하문 터널을 지나 효자동 삼거리 인근에 차를 대고 걸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효자동은 청와대를 맞대고 있습니다. 청와대의 역할이 달라져서인지 주변이 조용했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산책하며 사진도 찍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언제 이렇게 커서 밤 산책을 같이 다닐 수 있게 되었나 하는 감상도 조금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곳저곳 다니는데 매우 근사해 보이는 카페를 지났습니다. 아내가 말하길 근처에 유명한 곳이며 주말에는 웨이팅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평일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 안의 사람들도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들어가 볼까? 라고 물었을 때, 저는 조금 멈칫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원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조용하고 멋진 이 카페의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을까, 이 아이 때문에 사람들이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 마음을 읽었는지 아내도 잠시 고민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지요. 문을 열자마자 아내가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가 들어가도 되나요?" 이 짧은 물음의 순간에 우리 가족은 환대와 박대의 시간 속에 있었습니다. 저녁 산책의 행복한 마음이 수치와 모멸로 바뀔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페의 종업원은 친절한 미소로 답했습니다. "물론이죠" 

달콤한 아인슈페너를 마시며 이런저런 상념이 들었습니다. 지원이는 저에게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아인데, 이 아이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불편과 불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다가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참으로 무익한 존재입니다. 쓸모와 능력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아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쉽게 불평하고 소리 지르고 떼를 쓰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공공장소에서 통제를 따르지 않을 때는 부모인 저조차 이 아이가 부담스럽고 때때로 미운 감정이 올라옵니다.

그때 저의, 이 복잡한 마음을 달래주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 다 그러면서 크는 거라고 말씀하시며 괜찮다고 해주시는 어른들을 만날 때, 아이들도 언제나 환영한다는 상점의 주인들을 만났을 때 저는 안도하며 위로를 얻습니다. 아이를 안고 있을 때 먼저 가라고 자기 순서를 양보하는 이들을 만날 때 저는 환대가 이런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아이들은 기능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익한 존재들이지만 그 무익한 존재들을 조건 없이 환영하는 이들과 있는 곳이라면, 저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라고 믿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환대받는 곳이라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은총의 방향
오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일러주시는 가르침의 가운데에 어린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주님은 말씀과 몸짓으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며 가르쳐주십니다. 36절입니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말씀이지만 이 장면을 조금 자세히 그려본다면 이처럼 마음 따듯하게 하는 가르침이 있을까 싶습니다. 주님은 아이 한 명을 데리고 나옵니다. 아마 제자들을 비롯하여 주님을 따르는 여러 이름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한 아이였을 것입니다. 이 아이를 데리고 나오신 다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후에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가르침을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그 전에 모든 사람이 보는 중에 하신 행동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아이를 껴안아 주셨습니다. 아이를 안으시고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절입니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주님은 아이를 품에 안으신 상태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짓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대란 껴안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을 안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춰야 합니다. 환대와 영접이 이런 것임을 주님은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생각하며 누가 제일 부러웠는지 아십니까? 이 아이의 부모입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아마도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혹은 눈총을 받았을지 모를 어머니와 아버지 말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순간 주님이 자기 아이를 안아주는 장면을 바라본 이 부모에게는 이 순간이 하늘의 은총이 내린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 곧 예수의 이름으로 작고 무익한 사람을 영접하면 곧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그렇게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 곧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사람을 기꺼이 영접할 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우리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은총과 은혜를 생각할 때 언제나 위에서부터의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은총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어주셔서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라는 방향이라는 고정된 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총의 이미지가 많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메추라기라든지,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성령님의 이미지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그 반대의 방향에서도 은총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할 때 주님을 영접한 것이고 이는 다시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은 은총의 방향이 아래에서 위로 흐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장 작고 하찮은 이를 맞이함이 바로 가장 크고 높으신 분을 맞이한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은총의 통로가 높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있음을 주님은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툼의 이유
그렇다면 이 가르침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피기 위해 오늘 본문 말씀을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아이를 껴안기 전, 그러니까 이 가르침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어떤 이유로 서로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제자들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인가? 제자들은 서로 자기가 가장 큰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여기서 크다는 것은 단지 능력이나 지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뒤이어 말씀하신 가장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에 비춰보면, 제자들이 서로 주장한 자기가 가장 크다는 뜻은 자기야말로 영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자기야말로 영접 받을만한 큰 사람이라는 제자들의 주장을 조금 더 면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단지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의식 과잉에 사로잡혔다거나, 주님을 도구 삼아 높은 자리 하나 해 먹기 위해 군불을 지피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자주 어리석고 답답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주님의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가르침을 따라 가족과 생계를 버리고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의 충직한 제자가 되고 싶었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고 싶었던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이 제자들 무리 속에서 가장 크다는 주장은 내가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나야말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사람, 주님 다음가는 첫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나야말로 주님 다음 자리에 설 적격자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가장 큰 목소리를 내었겠지요. 자기는 주님과 특별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탄의 생각을 지녔다는 문책을 받은 사람이 무슨 첫째가는 제자냐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각자의 이유를 들이밀며 자기야말로 하나님과 예수님 그다음의 첫째 사람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35절입니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첫째 사람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꼴찌가 되어서 모두를 섬겨라. 그러면 첫째가 될 것이다. 이는 철부지처럼 다투고 있는 제자들을 면박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방향이 너희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반대일 수 있음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제자들은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믿음의 확신이 하나님 주시는 은총을 지나치게 제한하여 믿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은총이 오로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은총이 위에만 있다고 믿으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총을 가장 먼저 받기 위해 이들은 무던히 애를 씁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 애쓰는 일이 무어 그리 큰 잘못이냐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내리는 은총을 가장 먼저 받는 일에 나의 신앙적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자칫 신앙마저 경쟁의 도구가 되어버리기 쉬워집니다. 제자들이 서로 다툰 이유가 달리 있지 않습니다. 자기야말로 하늘에 가장 가까운 큰 자라는 허황한 생각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자라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위로부터의 은총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땅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바라볼 여유가 없습니다. 언제 위에서부터 은총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인류가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하늘에 닿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늘과 더 가까운 곳에 다다라 신의 뜻을 더 빨리 더 많이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비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이라 믿는 것들을 가까이 둠으로 자기 뜻을 이루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은총이 아래에 있을 수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은총이 아래에서부터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꼴찌가 되어 아래에서부터 모두를 섬길 때 은총이 거기에서부터 임한다는 말씀, 가장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무익한 사람을 껴안을 때 가장 크신 하나님을 껴안은 것과 같다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은총은 물론 하늘의 선물이지만, 땅에도 은총의 자리가 무수히 많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때문에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누가 가장 크냐는 제자들의 다툼과 어린아이를 통한 가르침을 비롯하게 만든 예수님의 짧은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30절에서 32절에 주님은 당신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에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성서 일과의 복음서 본문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 예고 말씀을 함께 읽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하늘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땅에 사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단지 하늘의 명령 때문이었다면, 주님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위로하고 고치시고 안아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적당한 때에 하늘의 뜻에 따라 행동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 받음'이라는 공식에만 골똘한다면, 예수께서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안아주는 것과 구원을 시키는 것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억압당하는 이들을 위해 우셨습니다. 모두에게 미움받는 사람들을 안아주셨습니다. 자기를 배신한 제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총은 모두 땅에서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는 땅에 박혀있습니다. 주님의 무덤도 땅속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명을 다 마치신 후에야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승천이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그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주께서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이유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고편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너희들을 내가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나를 믿고 사랑한다면 내가 다 전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땅에 있는 너희의 사람들에게 서로 전해 은총을 나누라는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품에 안아 이 사람을 환대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시작될 수 있음을 너희들이 세상에 알려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청년 여러분, 지원이를 환영한다는 카페 직원의 말에 제가 얼마나 큰 안도와 위로를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나의 약함과 부끄러움이 환대를 받는 공간이라면 그 사람이 얼마나 큰 위로를 경험하게 될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약점과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는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작은 사람들을 위로할 때 하늘의 은총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됨을 서로 믿는 우리가 됩시다. 나아가 우리 또한 우리를 둘러싼 높은 세상 앞에서 이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사람임을 잊지 맙시다. 주눅 들고 움츠린 우리의 어깨를 주님께서 감싸안아 주셨음을 기억하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는 작고 약한 사람들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영접할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을 잊지 맙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