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을 들먹이는 사람들
예수께서 자기 앞에 모인 많은 무리의 사람들에게 빵보다 생명을 택할 것을, 그리고 그 생명이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던지셨을 때, 주님의 마음은 떨렸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빵이나 달라고 소리치면 어찌할까, 생명을 선택하라 한가한 말을 할 참이면 왜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느냐고 괴로워하면 어찌할지 주님은 걱정하셨을 것입니다.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께 되레 화를 내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만, 이집트에서 탈출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군대에 추격당할 때, 광야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을 때, 이들은 지도자 모세를 탓하며 왜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나와 죽게 했냐고 푸념했습니다. 주께서 이 역사를 모르실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34절에서 많은 무리가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 라며 화답했음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이 주님의 진심을 이해한 것입니다. 이들은 배가 고팠고 빵이 필요했으나 빵보다 중요한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헤아렸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이 빵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혁명적 사건입니다. 인간은 몸에 속박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당면한 몸의 문제를 가장 크게 인식합니다. 게다가 여기 모인 사람들의 당면 과제는 배고픔이었습니다. 먹는 것은 최초의 욕구이며 본능이고 생존의 문제와 직결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 하루, 한 끼 먹는 문제보다 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길이 옳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빵을 먹는 것을 넘어서 생명을 서로 나누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아름답고 대견한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도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같은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유대인들은 수군거렸습니다. 그리고 마치 들으라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41절과 42절입니다.
41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면서
42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여기서 사용된 '수군거리다'는 헬라말로 '공귀조(γογγύζω)' 불쾌하고 불평거림, 이죽거리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 공귀조라는 말이 어디에 사용된줄 아십니까? 서두에 말씀드렸던 이집트 탈출을 이끌었던 모세에게 차라리 우리를 이집트에 나누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불쾌감을 토로할 때 동일한 단어, '공귀조'가 사용됩니다(70인 역).
따라서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며 '공귀조' 할 때 단지 자기들이 예수의 지인이거나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는 예수의 이웃 사람이라는 뜻을 넘어섭니다. 이들이 수군거렸던 이유도 단지 화가 났다거나 분노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랬다면 예수님을 향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그를 쫓아내기 위해 위력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비겁하게 수군거립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지금 언짢습니다. 못마땅하고 기분이 불유쾌한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의 거북스럽게 만든 방아쇠는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저 보잘것없는, 어디 출신인지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저 별 볼 일 없는 자가 감히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게다가 자기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말하다니! 유대인들의 기분과 감정은 심히 더러워졌습니다. 이 어두운 감정이 예수의 출신을 들먹이며 수군거리게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기대감이 없었던 어떤 이가 좋은 성과를 내었을 때 그것이 못마땅한 사람들이 꼭 하는 행동, 그 사람의 출신을 거들먹거리는 것 말입니다.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차라리 빵을 주라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 이 자리에 이 유대 사람들은 왜 나와 있는 것입니까? 왜 괜히 나와서 자기 기분만 더럽히고 차분히 자기 사역을 하고 계신 예수님께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 말을 내어 자기 기분만 망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도출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말씀 그대로 예수가 나사렛 출신의 목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실제 예수의 지인이거나 이웃 가운데 얼마가 이 정보를 나눠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궁금했습니다. 정말 이 예수라는 자가, 이 나사렛 시골 출신 유대인이 빵을 무한히 나눠주는 기적을 행하는 자인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빵과 물고기가 신비한 방식으로 늘어나 이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광경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왜 오병이어의 기적이 다시 재현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자기들 눈앞에서 정말로 빵과 물고기가 무한 증식하면 자기들도 예수를 구주로 믿겠노라 고백하기 위해서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만약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전과 같이 빵을 나눠주셨다면 어떠했을까요? 수군거렸던 유대인들은 아마 안심하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빵을 나눠주셨다면 그것은 이들의 예측 범위 안에 있는 일입니다. 물론 놀라운 일이지만 빵을 나눠주는 일이 자기들에게 위협적일 수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저 빵을 나눠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좋은 일을 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 연출됩니다. 빵을 나눠주리라 믿었던 주님은 빵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가 생명을 너희에게 줄 테니 빵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내가 그 생명의 빵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유대 사람들의 속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빵을 주지!' '그렇다면 우리가 안심하고 돌았을텐데!'
수군거렸던 유대 사람들의 속을 조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세 가지 지점이 이들의 역린을 건드렸습니다. 첫째, 생명입니다. 주님은 한 끼 배고픔을 해결해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생명으로 너희들의 삶을 살려내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 한 분입니다. 지금 자기들 눈앞에 있는 이 예수라는 자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했다고 이들은 생각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어떤 환란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음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생명을 이어 나갔던 기억은 유대인들의 자부심이자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라는 자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대체하고 있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둘째,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42절에서 읽었듯 유대 사람들을 가장 불쾌하게 만들었던 주님의 표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하늘에서 내려온 분은 메시아, 즉 구원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시간 구원자를 기다려왔습니다. 열강들의 통치를 끝내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자신들을 주인공 삼아 이끌어가실 바로 그 메시아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저 갈릴리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이 자신들의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셨다는 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셋째, 저는 이 세 번째 이유가 유대인들의 심사를 뒤틀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가장 큰 문제는 빵 대신 생명을 주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반응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으로 응답했다는 데 있습니다. 생명을 받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예수님에게 배신감을 토로했다면 여기 모인 유대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퇴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 배고픈 사람들은 자신의 허기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가치를 선택했습니다. 서로 같이 살기를 선택했습니다. 생명을 선택함으로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살기를 선택했습니다.
수군거리던 유대 사람들이 못난 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여기 모였던 이 가난한 사람들, 배고파서 빵 한 덩이를 찾아 나온 사람들을 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경멸했을지요. 빵 하나 얻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참람하게 여기는 저 정체 모를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을 얼마나 얕보았을지요. 그런데 이 가난한 이들이 고귀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생명을 선택하기로 한 순간 이 사람들은 거룩한 하늘의 사람들이 되었고, 반대로 이 유대 사람들이 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체가 탄로가 난 유대 사람들의 마음속엔 이제 한 가지 목적만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를 죽여야겠다. 우리를 이렇듯 모멸한 예수를 제거해야겠다. 유대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어둠의 그림자가 비로소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을 받아, 생명을 주는
생명을 주겠다는 주님 앞에 빈정거리는 유대 사람들을 보며 브라질의 로마 가톨릭의 대주교이자 해방 신학자였던 에우데르 카마라가 떠오릅니다. 카마라 주교는 극심한 빈부 격차와 군부 독재의 압력 아래에 사역했던 주교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 삶의 문제에 전심을 다 해 사역했고 당대의 권력과 충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근래 가장 진보적인 교황으로 손에 꼽히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적, 사목적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가 바로 카마라 주교입니다. 카마라 주교와 어느 신문사의 인터뷰 가운데 나온 이 말은 세간에 아주 잘 알려진 말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말입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은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면 좋은 일을 하는 성자 같은 사람이고, 가난의 원인을 함께 극복하자고 하면 음험한 목적을 가진 정치꾼으로 매도하는 일은 이천년 전이나, 한 세기 전 카마라 주교의 시대나,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시대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당대의 브라질 권력과 오늘 본문의 유대 권력은 가난한 이들이 빵을 먹고 한 끼 배부름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습니다. 이 모습이 가장 평화로운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선택하고 생명의 빵되시는 예수를 품기로 선택한 이들은 다른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서로 연대했고 서로의 배고픔을 챙겼으며 영원한 세상으로 눈을 돌려 꿈을 꾸고 희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변화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를 선택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47절과 48절입니다.
47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갖고 있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믿는 사람, 곧 예수를 생명의 빵으로 믿고 그 빵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이미 영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한 것이 들어갔으니,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욕망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당장 손해인 것 같지만 내 안에는 영원한 것이 있으니 아깝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을 품었으니 넉넉히 다른 이들의 것도 챙기게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 일상에서 크고 작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것입니다. 51절도 마저 읽겠습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하늘에서 내려온 주님은 살아 있는 빵으로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주님이 당신의 몸을 세상에 내어주시려는 이유는 죽음뿐인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예수를 품고 생명으로 충만해 지시길 바랍니다. 서로의 생명을 보듬고 챙기며 힘을 나누어 주길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공동체가 생명을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생명을 선택하고 우리의 이기심을 내려놓을 때 세상을 흔들리고 불쾌해할 것입니다. 세상의 방향과 다르게 간다고 우리를 다그칠 것입니다. 마치 유대 사람들의 이죽거리며 '공귀조' 하는 것 같이 세상은 우리를 두고 수군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께서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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