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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생명으로 서로를 피어나게 (요 6:24-35) 성령강림 후 11주

by 청파비둘기 2024. 8. 4.



빵 한 덩이 얻기 위해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덩이로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를 면케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놀라운 소문은 유대 지방 곳곳에 퍼져 나갔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 배가 고팠던 이들은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께 나아오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빵 한 덩이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로 예수께 나아오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이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가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오실 줄 짐작하고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배에 내리시자 "선생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사람들의 이 말에는 단지 예수님의 안부를 묻는 인사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을 기다리느라 배가 아주 고픕니다. 전에 그 바닷가에서와 같이 빵과 물고기를 좀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랜 시간 자기를 기다린 이들의 배고픔을 역시나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기대를 모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26절입니다.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어쩐지 냉랭함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자기 앞에 모인 사람들을 마치 밥 한 덩이 얻으러 나온 사람 취급을 하는 것 같은 무서운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해입니다. 예수께서는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 앞에 나온 이들을 내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 배고파 밥을 달라는 이들을 경멸할 수가 없습니다. 

 



배고픈 이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
빵 한 덩이 얻기 위해 나온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데 고작 빵 하나 얻어먹겠다고 주님 앞을 가로막느냐는 이 가혹한 마음이 혹시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이런 생각을 가지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셨다면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을 나무라셨을 것입니다.

배고픈 이들이 빵을 찾아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것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빵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들을 불쾌하게 여기곤 합니다. 얼마나 능력이 없으면 자기 돈으로 빵을 사서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빵을 무상으로 주는 이들을 찾아다니느냐 손가락질합니다. 돈이 없다면 열심히 일을 해서 빵을 살 돈을 마련해야지 여기서 빵을 구걸하고 있느냐며 쌀쌀맞은 눈빛을 날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들이 만약 예수님 옆에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주님, 전에 한 번 빵을 나눠줬으니 이번에는 그냥 가십시다. 자꾸 이렇게 빵을 나눠주면 그거 버릇됩니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어쩌면 매우 익숙한 장면입니다. 어느 성서학자는 예수께서 다시 빵을 찾는 이들에게 바로 빵을 주지 않은 이유가 주님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근거가 전혀 없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이 그 근거를 제공합니다.

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15절은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 직후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바닷가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이 넉넉히 먹고 배고픔을 면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빵을 주는 이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를 알아차리시고 그 자리를 피하십니다. 학자들은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기에 주님은 훈계하듯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의견은 일견 옳은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대단히 종교적이며 신 중심적 해석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올바로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 모인 배고픈 이들에 대해선 냉소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은 그날 모였던 가난한 이들을 모조리 그림자로 만들어 버리는 위험을 안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였던 이들은 대부분 힘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수가 적지 않았다지만 정치적으로 힘없는 이들이 왕을 세우고 나라를 도모함이 가능하리란 생각은 난센스입니다. 이들의 바람은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자기들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시는 분이 되어주시길 바랐을 뿐입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갈 때 주님의 행동과 말씀을 성찰하듯 주님이 만나신 사람들에 대한 성찰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앞에 선 이들의 절박함과 고단함을 이해할 때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비로소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은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응을 우리가 묵상하고 우리의 마음 중심에 모실 때 우리도 주님과 같은 반응을 사람들에게 되돌려 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를 닮는다는 것,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주님이 사람들에게 보이신 반응을 나도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을 선택하라
예수께서는 빵을 얻으러 나온 배고픈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염려하신 것은 이들이 빵 한 덩이보다 중요한 것을 행여 놓치게 될까, 그것이 마음 쓰이셨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27a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썩을 양식으로 표현된 이 말은 만들어진 모든 것은 결국 유한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들어진 것은 결국 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닷가에서 먹은 빵과 물고기가 그것입니다. 한 끼의 허기를 달래주지만, 빵과 물고기가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먹고 사라질 음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음식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음식은 영원한 삶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33절로 먼저 가보겠습니다. 

33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썩지 않을 것, 그것은 생명의 빵, 곧 생명입니다. 빵 한 덩이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앞에 모인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당장 한 끼의 빵 한 덩이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배고픔으로 빵을 얻기 위해 나온 이들에게 어째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빵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기에 주님은 빵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빵을 위해 사는 것과 생명을 선택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일까요. 

오병이어 바닷가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모두 즐겁게 먹고 기쁘게 나눴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허기는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이 여전히 먹을 것을 기다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배고픔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빵 한 덩이는 한 끼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할 뿐입니다. 빵을 쫓아 사는 삶은 결국 다음 허기를 만나게 되고 또 다른 빵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다릅니다. 생명이 나의 전 존재에 가득 채워지면 우리는 배고픔을 면하는 것 이상을 보게 됩니다. 생명이 충만한 자는 내가 어디를 가야 할지 알게 됩니다. 생명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을 때 우리는 내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빵 한 덩이는 한 끼의 힘이라면, 생명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의 힘입니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빵
빵 한 덩이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생명의 빵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의 마지막 35절을 보겠습니다. 

3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나오는 이는 결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아멘으로밖에 화답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불온한 생각이 스며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에 모인 이들은 그야말로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 한 끼의 빵 한 덩이가 시급한 사람들입니다.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을 위해 한 덩이가 아니라 몇 덩이라도 더 챙겨갈 마음을 먹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삶에 힘겨운 이들을 앞에 두고 나, 곧 생명의 빵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배고프지 않으리란 말씀이 어쩐지 공허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신앙적으로 선해하자면 구원하심을 약속하는 말씀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옳은 해석이지만 실존적으로 마음의 부닥침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시 곱씹어 봅시다. 허기진 이들에게 내가 주는 생명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영원히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영원히'는 무시간적 의미가 아닙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삶 전체, 즉 아주 실존적인 의미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면 빵 한 덩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삶의 더 높은 차원일 수 있고, 새로운 희망일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안에 생명이 가득 차게 되면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옆자리에도 생명을 가진 이가 있다는 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명으로 충만해질 때 비로소 내 옆 타자의 생명도 보게 됩니다. 빵에만 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때 들릴 수 없었던 타자들의 음성이 내 안에 생명이 차고 보니 들리고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빵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게 된다면, 이들은 더는 빵을 바라보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서로에게 생명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는 빵이 늘어나는 기적이 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보듬고 아끼고 보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옆 사람의 허기를 내가 채워주고 나의 어려움을 또 다른 이가 챙겨줄 수 있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피어나게 하고 돌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영원히' 주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아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의 힘으로 서로를 돌보아 타자의 삶을 피어나게 하고 피어난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삶을 피어나게 한다면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바라신 바가 이것입니다. 각 사람이 생명이 충만해져서 서로의 생명을 보듬을 때, 빵이 늘어나는 기적이 더는 필요없게 되는 세상 말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공동체가 생명을 선택하길 바랍니다. 예수께 나아가 생명의 힘을 얻고 그 생명으로 서로를 피어나게 할 때 우리는 영원히 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이 순환하는 공동체일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며 부득이 빵과 생명을 비교했습니다. 그러나 빵이 불필요하다거나 무가치하다는 말씀이 아님을 잘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가운데 삶이 넉넉해 아무 걱정이 없다거나 사회적으로 많은 것들을 이미 이루어 잎으로 살아가는데 염려가 전혀 없는 분은 아마도 안 계실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빵 한 덩이의 기적이 필요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친 마음과 몸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성서일과를 따라 함께 교독한 시편에서와 같이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한 빵 한 덩이를 하늘 문을 열고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빵 한 덩이의 기적은 언제나 서로서로 보듬고 서로의 생명을 피어나게 할 때 일어납니다. 주님 주시는 생명을 먼저 선택한 누군가가 그 생명의 힘을 나누어 줄 때 우리는 빵 한 덩이의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위로를 얻고 새롭게 일어날 힘을 냅니다. 그러니 생명을 선택하는 것은 나를 살리는 길이며 내 옆 사람을 살리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현종 선생님의 잘 알려진 시 <비스듬히>에서 생명이란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는 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생명을 선택한 이들이 비스듬히 서로를 받칠 때 그 안에 주님 주시는 생명이 비로소 피어날 것을 믿습니다. 빵의 기적이 아닌 생명의 기적 바라보길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