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
지난 몇 주간 우리는 빵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왔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부터 출발했지요. 배고프고 삶에 지친 고단한 사람들이 빈손으로 예수께 모여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었고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자기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여전히 배고픔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주님도 그들의 허기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에 담겨있던 빵 몇 덩이와 물고기 몇 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바로 그 사건에서부터 이야기가 이어져 왔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 소식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꽃씨와 같이 갈릴리 전역에 퍼져나가 사람들의 마음 밭에 심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길을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사람은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기 위해, 또 어떤 사람은 그저 빵 한 덩이를 다시 얻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가는 곳마다 각자의 사정과 각자의 목적과 각자의 기대를 마음에 담은 무수히 많은 무리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다시 모인 사람들 앞에 주님은 전과 같이 빵을 내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는 이내 실망으로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빵이 늘어나는 기적은 이제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사람들의 바람이 무너지려는 순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빵 한 덩이는 결국 썩어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빵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십시오. 이 생명을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빵 대신 생명을 선택하라니, 대관절 그게 무슨 말인가? 게다가 그 빵을 먹으면 영원히 배고프지 않다니 도대체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는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조상들은 그것을 먹고 생명을 지켰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늘의 만나 대신 바로 나를 보내셨습니다.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입니다. 나를 선택하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주님의 이 말씀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빵보다 중요한 것이 있구나! 우리 눈앞에 계신 저분을 따라 저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생명을 택하는 것이고, 그 생명을 택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이구나! 사람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허기만을 최우선으로 알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옆 사람의 생명을 보듬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나누고 돕는 길이 주님의 길이며 이것이 생명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더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생명을 나누고 보듬을 때 또 다른 생명이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의 일상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빵 대신 생명을 선택한 무리에게서 아름다운 힘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 움직임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의심하고 하찮게 여겼던 무리가 빵 대신 생명의 의미를 깨달아 변해가는 모습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엄히 꾸짖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임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다. 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경고하십니다. 이렇게 생명의 빵을 이해한 사람들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은 요한복음 6장의 빵과 생명의 이야기의 마침표입니다.
스캔들이 된 말씀
생명을 선택하라는 말씀, 예수께서 바로 그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말씀, 일련의 이 말씀들이 쉽게 이해가 되는지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차근차근 살펴 왔지만, 요한복음 6장은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함께 읽은 6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60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분 참으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제자들도 이 말씀을 무척이나 어려워했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느낀 어려움은 마치 풀기 복잡한 수학 문제를 앞에 둔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문제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 이 문제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깝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정확히 바라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1절입니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바로 여기에 제자들의 진심이 있습니다. 여기서 걸리게 한다는 단어는 '스칸달라조(σκανδαλίζω)'라는 단어입니다. 영어 스캔들이 이 단어에서 기원합니다. 스캔들이 무엇입니까? 잘 나가던 유명인이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으로 넘어지게 만드는 소문이나 사건을 가리킵니다. 스칸달라조는 잘 나가던 나의 일상과 평판을 한 순간에 걸려 넘어뜨리게 만들어 버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즉, 생명을 선택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이 말씀이 그들에게 스캔들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선택하게 되면 자기들이 넘어지고, 평판이 땅에 떨어지고 세상에 추문 거리가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이 말씀을 어렵게 느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 앞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제자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생명을 선택하라는 말씀앞에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2절입니다
62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인자, 곧 예수께서 전에 있던 곳, 즉 하나님 곁으로 승천하여 올라가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 이 말을 믿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는 어쩐지 서글픔이 묻어납니다. 이어지는 63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영의 말이며 생명의 말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하늘로 올라가는 스펙터클의 신앙, 몸으로 느껴지고 감각하는 것을 믿겠다는 육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주님, 차라리 주께서 모세와 같으면 우리가 믿겠습니다. 하늘에서 눈에 보이는 빵을 내려주신다면 우리가 믿겠습니다. 주님, 이방인들에게 더럽혀진 성전을 수복하기 위한 군대를 모집한다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선택하라니요. 당신의 살과 당신의 피를 먹어야 영원한 삶이 있다니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항변은 비록 입 밖으로 표현되지 못했으나 서로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며 마음의 거리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군거리다로 표현된 말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이죽거렸던 그 단어, 공귀조라는 헬라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지금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제자씩이나 되는 이들이 주님의 적대자들과 완전히 똑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집과 가족을 두고 생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이들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때때로 놀라운 능력을 보이셨고 대단한 말씀을 전하시며 사람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온 유대 사회가 꿈꿔왔던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할 것만 같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실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소망은 이내 현실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선택하라는 말씀 앞에 그들은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는 말에 제자들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앞에 세우고 당대의 체제를 뒤바꿀 위대한 대의명분으로 무장한 채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진격해 들어가야 하는데, 어쩐지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말씀을 하시니 제자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을 것만 같았습니다. 대단한 기세로 주님의 제자들이라고 자처하더니만 고작 한다는 말이 그 정도인가? 제자들은 두려워졌습니다. 이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일이 자신들에게 스캔들이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 일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지만, 정작 예수께서 말씀하신 방법대로 살아가는 일엔 뒷걸음칠 치는 모습은 주님 시대의 제자들이나 오늘날의 우리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바꾸시는 역사적인 순간에는 함께하고 싶으나 말씀대로 살라는 주님의 부탁은 어쩌진 안 들리는 척 귀를 닫고 살아갈 때가 적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함을 굳게 믿으나 모든 것 가운데 하나조차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의지는 우리를 낯부끄럽게 만듭니다.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평가를 내리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 말씀을 내 삶에 잇대어 실천해 보고자 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그것이 스캔들이 되어 나의 삶과 나의 평판과 나의 미래에 우를 끼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꿀보다 달다고 찬송하지만 실은 우리는 말씀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게 보여줄 것은 가시적인 승리의 약속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함으로 서로를 피어나게하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믿게 하는 것이란 말씀에 많은 제자들이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66절입니다.
66 이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들의 대답은 예수를 떠남이었습니다. 다시는 예수를 찾지 않았습니다. 내 눈 앞에 빵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따를 이유가 없다는 아주 담백하고 명백한 고백입니다.
너희도 떠나려느냐
주님 곁에서 무엇이든 하겠다고 열을 올리던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습니다. 주님 주변에 가득했던 인파들이 썰물에 쓸려가듯 사라졌습니다. 요한은 열두 제자들만이 주님 곁에 남았다고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도 북적였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6장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다루었던 오병이어 사건에서 지금까지 주님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넘쳤고 그 안에는 주님을 온전히 따른 이들도 있었고 적대적인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가 종료되는 지금 주님 곁에 남은 이들은 아주 소수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가려 하느냐?"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는 다양한 해석의 렌즈들을 토대로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른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정확히 우리에게 직접 던지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직접 물으십니다.
'내가 하늘에서 빵을 내리는 기적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역사에 개입하여 초월적인 기적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너희들이 괴로워하는 오늘의 그 문제를 당장에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너희는 내 곁에 있겠느냐?'
청파의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떠나시겠습니까?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일이 나의 평판에 스캔들이 된다면 주님을 떠나시겠습니까? 떠나지 마십시오. 우리 함께 예수를 선택합시다.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부탁드립니다. 손해를 감수하더라고, 세상의 따가운 눈초리가 우리를 향한다고 할지라도 생명을 선택하길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굶주림은 빵 하나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배가 고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목마르고, 희망에 갈급하며, 은총에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빵 한덩이가 이것들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생명입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살리는 것은 생명입니다. 예수를 마음에 중심에 모셔두십시오. 예수가 생명입니다. 고단하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청년의 때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가늠하지 못하는 우리 젊은 날의 괴로움 속에 하나님은 그 고통속에서 생명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했듯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 생명이 있습니다. 내가 살 길은 주님뿐임을 고백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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