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16번째 주일을 맞은 오늘 성서일과의 복음서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바로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이야기를 한 번에 다루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두 이야기 사이에 연관성이 그다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일과의 말씀 순서는 이 두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시로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와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길동무 삼아 주님의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
예수께서 두로라는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두로 지방에 오신 것을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지시를 내리신 이유에 대한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두로에 오시기 바로 직전의 상황과 관련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바로 이전 단락에서 주님은 여러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과 정결 제의에 관한 첨예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폭력적 상황이 고조된 시점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기 오심을 숨기시라 명하신 이유는 자신과 제자들을 향한 적대적 세력의 위협에서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죽음을 두려워했음이 아니라,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릴리에서부터 엄청난 소문을 몰고 다니는 한 예언자의 등장을 두로 사람들이 모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님이 두로에 왔다는 소식이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한 여인의 귀에도 닿았습니다. 우리가 보는 새번역 성경의 번역으로는 시로페니키아 여인, 개정판 성경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번역된 이 사람은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여성 서사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난해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야기를 접할 때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기록 안에서 이 여인의 상황과 생활 수준을 유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지체가 높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수식하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리스 사람이라는 호칭은 단지 그 사람의 출신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리스 곧 헬라 문화의 수혜를 충분히 입은 사람, 따라서 문화적이며 사회적 위치를 가늠케 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가 이 여인을 가리켜 그리스 사람이며 동시에 시로페니키아 출신임을 일부러 기록해 놓았다는 뜻은 이 여인의 문화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위치가 절대 낮지만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고귀한 지위를 가진 여인이었다면, 자기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력 있는 의사를 모시고 귀한 약을 구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었습니다. 여인은 절망했습니다. 죽어가는 딸 앞에 자기 가진 재물이며 능력이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자기 지방에 당도한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갈릴리 출신의 이 예언자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과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이 예수라는 자와 만나기만 하면 보지 못하던 자가 보고, 듣지 못하던 자가 듣고, 걷지 못하던 자가 걷는 일이 일어나더라. 게다가 죽었던 자마저 그의 손에 이끌려 다시 생명을 얻더라.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이 여인에게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자기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여인과 예수님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그리스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 여인은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해 당대 그리스의 다양한 이방 종교와 문화에 익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인 예수님 입장에서 이는 모두 우상들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우상숭배자,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이 여인은 여성이었고 예수님은 남성이었습니다.
이 차이들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고 만약 두 사람이 만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스캔들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그리스 문화의 고상함을 잃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주변의 평판과 소문이 좋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사람을 그것도 여인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가뜩이나 공격할 거리를 찾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바리새 사람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주님께서는 이미 바리새인들과 피곤하고 난폭한 논쟁을 치른 후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 자기 딸을 고쳐 달라는 이 여인의 부탁에 주님은 우리의 상상 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왜? 여인은 왜?
이제 우리는 복음서에서 어쩌면 가장 어렵고 당혹스러운 구절을 접합니다. 27절입니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할 자녀들이란 유대인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방인을 제한하지는 않았으나 사역의 초점이 유대인들에게 맞춰져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모임이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진짜 어려움은, 이 여인을 향해 개라고 지칭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해석하기에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모욕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짓궂기는 하지만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든지, 예수께서 잠시 피곤하셨다든지, 이방인 선교의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여인의 부탁을 피하기 위해서라든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시도도 해석적 아포리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향해 개라고 지칭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독이고 멸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모를 당한 여인은 발끈하거나 도전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며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입니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여인이 한 대답의 핵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개라고 인정한 것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을 이 모습을 가리켜 여인의 담대하고 지극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믿음의 고백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께서 능력으로 자기 딸을 고치시리란 믿음으로 이와 같은 고백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 이전에 이 여인이 한 행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모욕을 감내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은 물론 병중에 있는 자기 딸을 개라고 지칭한 이 말을 이 여인은 집어서 삼켰습니다. 모욕을 받아먹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이 치욕스러운 말을 받아 삼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어째서 듣지 않아도 될 욕에 준하는 말을 맞다고 말하며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까? 바로 자기 딸 때문입니다. 집에 누워있는 자기 딸 때문입니다. 세상 어떤 약으로도 낫지 않는 내 딸, 세상에서 의술로 일가견이 있다는 모든 의사조차 치료하지 못하는 내 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은 어머니로서 모든 수모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대화 속에 간과해서는 안 될 한 사람이 더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바로 움직일 수 없었던 이 여인의 딸입니다. 성경은 이 아이가 귀신에 들렸다고 말합니다. 신비적으로 해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수준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고통과 아픔 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창 신나게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아야 할 이 아이는 지금 움직일 수 없는 고통에 빠져있습니다.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은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딸을 살려야 한다는 지극한 마음이 만나서는 안 될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 남자를 찾아가게 했고 이해할 수 없는 모욕을 감내하게 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믿음이 있습니까? 당연히 신앙을 갖고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믿음이 언제 가장 아름답게 빛이 납니까? 예배에 나올 때입니까?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릴 때입니까? 말씀을 들으며 회개할 때입니까? 물론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찬양하며 감격할 때 우리의 믿음은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찬란하게 빛이 나는 순간은 다른 데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누군가를 살리고자 할 때입니다. 죽어가는 누군가를 살리고자 할 때 우리의 믿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해집니다.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를 위해 내가 정성을 다할 때 우리의 믿음은 가장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누군가를 살리고자 할 때만큼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타자를 향해 간절해 본 적이 없는 이가 크고 아름다운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목 놓아 울어본 적 없는 이가 주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여기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그 자리에 있던 누구보다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인은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예수외에 다른 분이 있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모든 수모를 감내하여 스스로 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29절입니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무심한 듯 말씀하시는 주님의 대답 가운데 작은 변화가 감지됩니다.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께서 어째서 사람을 개에 비유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춘 여인의 모습을 보신 후 주님은 비로소 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행간 사이에 주님의 성찰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유를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주님은 여인의 사람을 살리겠다는 간절한 믿음을 보시고 이 여인 뒤에 움직일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음을 주님은 알게 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의사소통의 장애가 있는 사람
움직일 수 없었던 딸을 향한 사랑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음을 생각한다면 뒤이어 나오는 들리지 않고 말도 더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나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두로에서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만나고 다시 주님의 활동지인 갈릴리로 돌아옵니다. 그때 사람들이 한 사람을 주님 앞에 데리고 나옵니다. 말씀에 따르면 그는 귀가 먹고 말을 더듬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온전한 말을 할 수 없고, 스스로 자기 상황을 설명하거나 필요에 대한 요청과 요구를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움직일 수 있었지만 사실상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따로 데려가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주님의 행위가 조금 낯설지만, 이 사람은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사람, 즉 감각이 제한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행위는 이 사람에게 오히려 안도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지금 무언가를 하고 계시다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늘을 향해 깊은 탄식을 뱉으신 후, 에바다라고 말씀하시며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합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함께 성찰했듯 지금 이 의사소통의 장애가 있는 사람과 예수님 이외에 이 이야기 속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더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이 사람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아마 이 사람의 이웃이거나 가족이었을 것입니다. 말의 문이 막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이가 예수께 나와 회복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사람들의 사랑과 연민 때문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의 장애가 있는 이를 치유하시며 주님은 하늘을 향해 길게 탄식하셨습니다. 이 탄식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탄과 절망 등으로 신음하고 끙끙거린다는 뜻을 가진 스테나조(στενάζω)라는 말이 여기에 사용됩니다. 스테나조는 매우 드물게 쓰인 동사입니다. 복음서에 단 한 번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복음서 전체 이야기 가운데 단 한 번 여기에서 길게 탄식하신 것입니다.
해석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 탄식 안에 바로 앞선 사건의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그녀의 딸을 향한 주님의 미안함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주님은 이 사람을 자기 앞에 데려온 사람들의 착하고 거룩한 마음을 보며 모질게 대했던 그 여인을 생각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타자를 살리겠다는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주님은 다시 한번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탄식의 방향이 하늘이었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 나의 품으로 이끌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주님은 이때 온전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빛나는 믿음을 향하여
전혀 다른 두 이야기가 나란히 놓여있지만 모두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는 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딸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했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이의 이웃들은 자기 친구를 살리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처지는 달랐으나 이들의 믿음은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마음을 쏟은 두 사건 속에서 우리는 믿음의 근본 가치를 발견합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살리고자 할 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임을 말입니다.
사람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착한 마음을 가진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 주변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비단 병상에 누워 물리적인 움직임이 불가능한 분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권력관계에 짓눌려, 미래의 불안에 억눌려, 억울하고 참담한 일에 휘말려 그야말로 말문이 막혀버린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해맑게 웃고 인사를 나누지만 굳어버린 마음으로 마음 문을 닫아버린 나의 친구가 없는지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혹은 나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누군가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엄중히 자신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같이 아름답게 빛나면 좋겠습니다. 이름이 없던 장애를 가진 사람의 이웃과 같은 착한 신앙을 닮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지켜나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오늘 성서일과의 이사야의 예언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이사야 35장 4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사 35:4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5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6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여러분,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물리치실 것입니다. 이 원수는 우리로 타자들을 이해하고 환대하기를 가로막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살리겠다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며 사슴처럼 뛰놀고 노래를 부를 것이며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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