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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예수의 사랑은 측량이 가능한가? (엡 3:14-21), 성령강림후 10주

by 청파비둘기 2024. 7. 28.

예수의 사랑은 측량이 가능한가? (엡 3:14-21)

 

가격과 가치

저는 교회에서 우리 청년부 외에도 관리부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다시피 교회는 최근 사무실과 유아유치부 어린아이를 위한 예배실을 리모델링했습니다. 저는 공사 간에 여러 일정을 살피고 시공업자와 교회 사이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조율했는데, 처음 해보는 일이라 무척 고된 시간이었지만 배운 바도 많아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기본적인 공사는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부 이사를 마치고 새롭게 필요한 설비들을 갖추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여러 필요 물품을 구매하고 있는데, 신나게 결제 버튼을 누르며 요샛말로 폭풍 구매를 하고 있는데,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소비가 주는 매력이 만만치 않구나!' 소비가 개인에게 일시적이나마 유사 전능성을 부연한다고 하지요. 평소에 소비를 그리 많이 하지 않는 저로서는 잘 몰랐는데, 계속되는 결제 버튼이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 같은 전능감을 주는 것도 같았습니다. 물론 이 기묘한 감정은 분야별로 나누어 정리 및 제출해야 하는 영수증 작업과 지출요청서 작성하는 중에 모두 깨지고 말았지만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재화에 이름표를 붙여 놓습니다. 바로 가격이라는 이름표입니다. 개인은 구매력을 바탕으로 가격표가 붙어있는 모든 재화에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재화란 사람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주는 모든 물건입니다. 다른 말로 상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건 또는 상품이 반드시 물성을 지닌 어떤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서비스라고 불리는 누군가의 노동, 곧 시간과 같이 보이지 않는 상품과 재화를 모두 포함합니다. 각 재화의 가격은 그 재화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가격이 붙은 상품은 그 가격을 지불한 사람의 소유가 됩니다. 이때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구매력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많음, 곧 구매력이 높다면 많은 재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건은 물론 타인의 노동과 시간도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구매력이 낮다면 갖고 싶은 재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매력을 통해 물건은 물론 누군가의 시간까지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가 유사 전능성을 준다는 말은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같아 보입니다.

 

자본에 따라 세상이 운영되는 것을 이제는 막을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돈이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우리는 쉽게 믿기도 합니다. 심지어 지금껏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던 사랑이나 우정, 또는 사람 사이의 온정까지도 모두 가격을 매기고 그에 따라 가치를 다지는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가 갖는 큰 슬픔입니다. 물론 돈으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 무엇이 잘못이겠느냐마는, 많이 갖지 못한 이들의 고단함과 괴로움은 쉽게 개인의 능력 부족 문제로 취급되거나 무능력하고 심지어 부도덕한 사람인 양 취급되곤 합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우리는 인간성을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갖고 있어야 사람다움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바울의 기도

김기석 목사님께서는 이 냉혹한 자본 우위의 시대에 우리가 맞설 수 있는 무기가 하나 있다면, 그것을 '만족'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거면 됐다. 라는 자족의 선언입니다. 나는 그것까지 필요 없다는 만족과 자족의 정신이라면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나마 인간적 온기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만족과 자족만큼 자본이 싫어하는 것도 없습니다. 자본은 끊임없이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고 더 높은 구매력을 갖춰서 더 많은 재화를 취득하라고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그만 됐으니 더는 갖고 싶지 않고 가질 필요도 없다는 선언은 아마도 자본, 우리 신앙인의 언어로 물질적 부의 탐심 또는 탐욕으로 지칭되는 맘몬이 가장 두려워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예수가 주는 만족과 자족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서 말씀을 잠시 쉬고 오늘 성서일과의 서신서 본문인 에베소서를 택했습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다양한 주제가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예수 믿는 사람들의 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말하고 있는 서신입니다. 특별히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말과 행동에 있어 겸허하고 겸손해야 하며 무엇보다 높은 윤리적 삶의 수준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이자 목회자로서 에베소의 교우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잊지 말고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을 간곡한 언어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문 14절에서 21절은 바울의 에베소 교우들을 향한 중보의 기도문이기도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14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동료 교우들을 향한 바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비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16절을 보겠습니다. 

 

16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바울은 먼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 깨닫길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그 넘치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강건해지길 원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흔히 바울을 신학자이거나 과격한 복음 전도자로 기억되지만, 그 역시 교회의 지도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목자로서의 바울이 원하는 바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풍성함을 깨달아 내적으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를 계속 보겠습니다. 17절 상반 절입니다.

 

17a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해진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머물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건강해진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물게 해달라는 바울의 기도는 믿는 자의 마음의 밭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를 마음에 두는 것보다 중요한 믿음의 태도는 없습니다. 제가 청년 여러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여러분들에게 가장 바라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알고 우리 마음의 주인을 예수로 모셔두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께서 계시길 저 역시 기도합니다.

 

이제 바울은 우리 안에 예수께서 어떻게 계시는지, 우리 마음속에서 무얼 하시는지 보여줍니다. 17절 하반절에서 19절 상반절까지 조금 길지만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17b-19a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에베소 교우들을 향한 바울 기도의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존재 안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얼마나 큰지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바울은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야말로 입체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크기를 계측해 보라는 말입니다. 너비와 높이와 깊이의 길이를 안다면 3차원의 부피를 계산할 수 있듯이 (너비와 길이와 높이를 모두 곱하면 부피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해서 그 부피를 측정해 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부피 계산식을 이해하고 편지를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당신 안에 예수께서 얼마나 차지하고 있는지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안에 예수께서 얼마나 넓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지 계산할 수 없다고 아니 계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바로 뒤 이어서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피는 우리의 지식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단순히 지식적이거나 수학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지성을 모두 아우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우리 안에 예수께서 가득 차서 그 부피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가득 차길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측량 불가의 가치

앞서 자본이 주인 노릇을 하는 세상에서 연약한 우리 개인이 할 수 있는 저항이 있다면, 그것은 만족, 자족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만족은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것이 물론 좋고 또 필요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내게 필요 이상으로 바라지 않는 것,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아는 것, 종합하여 말하자면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을 방법이 바로 만족하는 것인데, 그 만족은 더 좋은 것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냥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압도적으로 좋은 것이어야 합니다. 측량 자체가 불가능한 압도적인 것을 이미 우리가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을 적절한 선에서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피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랗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압도적으로 차지하길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예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압도적인 부피를 차지할 때 우리는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19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19b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할 때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우리가 충만해집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압도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가득해집니다.

 

예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본이 주인 노릇을 하는 세상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뒤흔드는 것들을 무차별로 쏟아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상품에 매겨진 가격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아직은 부족한 것이 많은 청춘의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 가치를 선택하고 싶지만, 취업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사회적으로 성공의 길을 가기 위해 세상의 가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쳐지기도 합니다. 약자들을 품는 것이 예수의 뜻임을 매주 예배를 통해 되새기지만 나 스스로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약자의 도움을 슬쩍 모른척할 때도 있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모습은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내 안에 예수께서 계시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더 큰 영적 체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피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너무 작아서, 너무 볼품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랑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사랑을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예수께서 우리 안에 이미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사랑으로 함께 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 있음을 인정하고 사는 것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예수의 사랑은 내가 감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필요한 욕망을 조금씩 자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더 신앙의 성숙을 이어 나갈 때 우리의 입에서 예수의 말이, 우리의 손에서 예수의 자비가, 우리의 눈에서 예수의 따듯함이 묻어나올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