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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예수께서 멈추신 자리(막 6:30~34, 53~56), 성령강림후 9주(240721)

by 청파비둘기 2024. 7. 21.

사도 훈련

지난주 우리는 자기의 성벽에 갇힌 헤롯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의로운 소문을 가득 채울 때 불의는 오히려 고립되고 제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하지 않았던 지난 말씀은 예수께서 맞이하게 될 사건의 전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불의한 헤롯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듯, 예수께서도 불의한 세력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예고가 아닙니다. 요한이 폭력에 의해 죽임당했지만, 주님의 사역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퍼져나갔습니다. 의로운 소문이 세상을 뒤덮은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차이,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복음의 행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의가 불의에 삼킴 당한 것 같은 현실이지만, 주님께서 의로 불의를 삼키셨습니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마가복음 말씀은 헤롯의 회상에서 다시금 주님의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예수께서 고향 들렀다가 나오시면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작은 전도 여행을 보내신 이후 그 제자들이 돌아온 장면에서 오늘 본문은 시작합니다. 지난주에 함께 보았던 헤롯의 회상 장면은 제자들을 파송한 다음 나온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파송 - 헤롯의 회상 - 다시 제자들의 귀환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잠시간이었지만 주님을 떠나 오로지 자기들만으로 복음을 전하고 회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3절 말씀이 제자들의 사역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줍니다. 

 

13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다.

 

제자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었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제자들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본래 제자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7절에서 마가는 제자들에게 능력을 나누어주신 분이 예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7   그리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허락하셨기에 그들은 특별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허락한 이유는 훈련의 일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어리숙하고 갈피를 못 잡는 제자들이긴 하지만, 본인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자기가 없는 세상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실지 주님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부재의 상태에서 제자의 직분을 감당해 내야 했기에 주님은 일종의 훈련 기회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무장한 제자들의 성과는 대단했습니다. 제자들은 담대하게 회개의 말씀을 전했고 마치 주님께서 하시듯 병자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부여받았기에 가능하긴 했지만, 제자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놀랍고 흥분되는 사건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30절에 제자들이 예수께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일을 보고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마가는 여기에서 돌아온 제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도'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가리켜 최초로 사도라 칭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의미가 무엇이고 사도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드러납니다. 사도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권능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스승이신 예수께 보고하는 이 장면에서 제자들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선교 보고대회의 분위기는 한껏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너도나도 서로 다투어 자기가 행한 일을 예수께 신나게 전했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말씀을 전하니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주님, 제가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주님, 제가 기도하니 병든 자들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등등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기쁘게 전하고 있을지 눈에 선합니다. 지친 줄도 모르고 주님께 자신들이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달래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입니다.

 

31b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아마도 유쾌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알았다, 알았어, 잘했다! 이제 좀 쉬어라, 얼마나 피곤하겠니.' 주님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좋았겠지요. 제자들이 멋지게 복음을 전하고 훌륭한 일들을 해냈으니 말입니다. 훗날 사도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 내겠다는 생각이 주님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하였을 것입니다.

 

복음이 멈춰 서야 하는 곳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쉼을 위해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갑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주님을 뵙고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역시나 배를 타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제자들의 일행보다도 먼저 도착해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도 살폈던 말씀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주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갈 때도 그 배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각자 배를 타고 주님을 따랐던 사건 말입니다. 같은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 싶어 하고 만나고 싶어 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 물색없는 사람들의 억지가 어쩐지 불편함을 주기도 합니다. 놀라운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과 온갖 사역으로 지친 예수님께서 잠시간만이라도 쉬겠다는데 그것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주님과 제자들의 쉼을 방해하니 말입니다. 서둘러 재충전을 마치고 다시 놀라운 사역의 현장으로 달려 나가야 할 주님과 제자들의 길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유력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자들, 배고픈 자들, 병들고 지친 이들이 전부였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의 이런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듯 사람들을 앞에 멈추셨습니다. 34절입니다.

 

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가 예수께서 어딘가에 멈추시는 장면이 나오면 그 자리에 우리 또한 멈추어야 합니다. 주께서 어디서 멈추셨는지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아무 곳에나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약하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 앞에 멈추셨습니다. 자식을 잃은 어미와 아비 앞에 멈추셨습니다. 말 못할 질병으로 끙끙 앓던 이 앞에 멈추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세상을 유리하던 사람들 앞에 오늘도 멈추셨습니다.

 

예수의 멈춤은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가르침의 장소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권능을 받아 놀라운 사역의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자기 말과 손짓에 따라 회개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병들고 귀신에 들린 자들이 나음을 입은 체험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책무는 이와 같이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만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역을 했다고 할지라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앞에 멈추어 서지 않는다면 그 사역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들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 앞에 멈추지 않는다면 그가 일전에 어떤 대단한 기적을 일으켰다 한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저 시끄러운 꽹과리와 다름없다는 바울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롬 13:1).

 

이따금 대단한 일을 하는 분들을 뵐 때가 있습니다. 저로서는 감히 흉내를 낼 수 없는 큰일을 하는 분들, 가령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 험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 투쟁의 최전선에 있는 활동가들을 보면 존경을 넘어선 어떤 숭고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주 이따금 저의 마음 어느 한 부분을 걸리게 만드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역이 어떤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하기에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다그칠 때 저는 마음 한쪽이 어지러워집니다. 큰 일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자기 팀원들의 고통은 나몰라라 하는 리더들을 이따금 봅니다. 작은 규칙들은 큰 뜻을 위해 무시하는 경우 또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일이 결국은 사람의 눈물을 닦는 일일 텐데,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보다 일의 성취를 앞세우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일부의 경우이니 오해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멈추시는 곳에 우리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역이, 우리의 일이, 우리가 중요하다 여기고 시급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라도 삶에 힘겨운 이들을 만나면 그것들을 모두 중지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 앞에 멈추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멈추셨기에 우리도 멈추어 그들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최영미 시인의 <신촌의 옛 풍경>이라는 시의 한 대목이 제 마음을 잘 대변해 줍니다. 시인은 신촌 어느 거리에서 제 몸보다 높고 커다란 폐지 더미를 리어카에 싣고 가는 한 노인장을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그가 수레를 끄는지 

수레가 그를 끄는지, 

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질질 끌려가던 

늙은 노동자가 길을 건넌다 

뒤에서 몰래 밀어주고 싶었지만 

나의 동정심을 분석하며 

그를 동정하는 나를 의심하며 

생각이 너무 많아 그를 놓쳤다

 

멈추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이 많아졌던 시인은 결국 그를 놓치고 말았다고 고백합니다. 저를 비롯해 아마 많은 분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시리라 믿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또한 예수와 같이 멈추어 그들의 필요를 살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멈출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간구할 따름입니다.

 

오병이어의 진짜 기적

주님은 그렇게 멈추셔서 가르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배고픈 사람들이 더 배가 고파졌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 유명한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건의 전개를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오병이어 사건에서 일어난 기적은 물고기와 빵이 무한 증식된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를 예수께서 행한 기적의 전부라고 말하기엔 주님의 기적을 지나치게 물질에만 국한 시키는 일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진짜 기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자리에 배고픔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허기진 사람들이 허기를 달래고 음식을 나누며 기쁨의 대화를 나누고 소박하지만, 하늘의 잔치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허기가 사라진 것보다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사역의 아름다운 결과가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근사하고 멋진 사건이 호화찬란하게 펼쳐지는 것이 복음이 일으키는 사건의 전부가 아닙니다. 자기 것을 나누며 서로 함께 먹으며 배고픔을 서로 나누는 사건이 바로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아무리 놀라운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킨다고 하여도 허기진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사건에 불과함을 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시고 주님과 제자들은 다시 배를 타고 건너가십니다. 건너가는 동안 또다시 폭풍이 불고 제자들은 한바탕 소동을 겪습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못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성서일과 본문은 이 내용을 건너뛰고 바로 53절로 우리 시선을 이끕니다.

 

놀라운 기적 사건 직후 그다음 바닷가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주한 것은 바로 어디서 이렇게 계속해서 나오는지 모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55절에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55   그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예수가 어디에 계시든지, 병자들을 침상에 눕혀서 그 곳으로 데리고 오기 시작하였다.

 

주님은 가는 곳마다 병들고 힘에 겨운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56절에 마가는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나왔고 그 옷에 손을 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자석과 같이 가는 곳마다 힘겨운 이들을 끌어당겼고 그들이 나아올 때마다 멈추어 섰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언제나 멈추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멈춰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으니 어서 빨리 가자고 주님을 재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멈추신 그 자리에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라보신 이들을 우리 또한 바라보아야 합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 앞에도 이미 멈추신 바가 있었음을 말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가시는 길을 가로막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앞에 멈추셨기에 우리는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니 우리도 주님이 멈추신 곳에 함께 멈춰서 사람들을 바라봅시다. 목자없는 양과 같은 이들에게 우리와 함께 가자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