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청 말씀 나눔

경이로운 소문(막 6:14-29), 성령강림후 8주(240714)

by 청파비둘기 2024. 7. 17.

막을 수 없는 이야기

오늘 성서일과를 따라 읽은 마가복음 6:14-29절은 복음서 가운데 매우 특이한 단락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단락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물론 주님의 제자들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는 복음서와 당도했습니다. 

 

물론 주님에 대한 언급이 없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 사역과 치유의 기적은 그 반대자들의 훼방과 음해에도 불구하고 온 유대 지방에 퍼져갔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물론 유대 땅 전역에 예수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은 예루살렘의 궁궐 속에 평안히 있던 헤롯왕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광야와 도시를 지나 궁전으로 들어갔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제 예수께서 일으킨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흐름이자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높은 성벽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헤롯은 그의 정체를 파악하길 원했습니다. 아마도 궁의 신하들을 시켜 소문의 출처와 내용을 확인하라고 지시했겠지요. 왕의 부하들은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엉뚱한 말을 전합니다. 예수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 같다거나, 선지자 엘리야가 살아서 돌아왔다고 보고합니다. 왕의 명령에 따른 조사였기 때문에 허투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 그들은 온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간에 떠돌던 소문만 접했겠지요. 권력의 자리에서 주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왔듯 주님을 온전히 고백하는 이들은 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병들도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으나 왕의 신하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습니다.

 

이렇듯 예수에 대한 그릇된 보고를 받았음에도 헤롯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예수님을 대면한 적조차 없는 일국의 왕이 예수에 대한 소문만으로 두려워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의 기저에는 자신의 손으로 죽인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은 예수께서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 돌아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마가는 헤롯의 회상, 플래시백을 보여줍니다.

 

헤롯의 회상

이 장면을 이해가 위해선 오늘 본문의 헤롯왕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은 큰 틀에서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영토는 매우 넓었기 때문에 유대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국은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를만한 이를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헤롯 대왕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는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태어나심을 알고 그때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모든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 그자입니다. 헤롯 대왕은 주님이 태어난 후 약 4년경에 죽었는데, 그의 아들 셋이 유대 땅을 나누어 통치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의 헤롯왕은 헤롯 안티파스라 불리는 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헤롯이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왕이었지만 그 역시 엄연히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 왕이라면 율법을 존중해야 하는데, 그에겐 큰 결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헤롯은 자기 동생인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입니다. 그럴 수 있나 싶지만 왕가의 결혼이 어느 시대나 이렇듯 일반적인 관점을 생각하기 어려운 선택을 하곤 하지요. 윤리적으로나, 율법적으로 부당하고 불의한 일이었지만 정치적으로 괜찮은 선택이라고 그는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던 세례자 요한은 이 불의한 사건을 가만둘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언자의 마음으로 왕궁을 향하여 헤롯에게 거침없는 말을 쏟아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불의한 일이다. 유대인으로 수치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하는 악행이라고 요한 서릿발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 왕은 요한의 말을 참을 수 없었지만, 요한을 지지하는 광야의 많은 백성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기회가 오기만 하면 저자의 입을 가로막을 생각이 헤롯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왔습니다. 어느 날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고 잔치를 축하하기 위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무희로 나왔습니다. 딸은 춤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왕은 흡족하고 기쁜 마음에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슨 소원이든 다 말해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리고 헤롯은 그 자리에서 허풍을 떨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2절과 23절입니다.

 

22b  왕이 소녀에게 말하였다.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

23   그리고 그 소녀에게 굳게 맹세하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만약 원한다면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이 말은 허풍입니다. 먼저 헤롯은 로마의 속국왕이었기에 나라의 건네줄 권한이 없었습니다. 설령 가능하다 할지라도, 이 말은 불가능한 말입니다. 이 상황에서 헤로디아의 딸과 헤로디아는 음모를 꾸밉니다. 왕의 눈엣가시이자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했던 세례자 요한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와 그의 딸은 왕에게 요한의 목을 달라 청합니다. 엽기적인 요구입니다. 헤롯은 딸의 요구 앞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말합니다. 그가 요한을 아끼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간악했던 헤롯조차 지금 상황이 얼마나 불의한 일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오히려 못이기는 척 자기 욕망을 아내와 딸의 부탁이라는 미명아래 숨어 버리는 비겁자입니다. 

 

그렇게 헤롯은 자기의 허풍을 현실로 만듭니다. 자기 땅의 절반을 내어주지는 않았지만, 유대 사람들의 큰 존경을 받던 광야의 예언자 요한을 참수했습니다. 나라의 절반을 내어준 것과 같은 커다란 충격이 유대 사회를 휩쓸었습니다. 왕이 의인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참수는 의가 패배한 것 같은 상황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곧바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러 왔기 때문입니다. 요한을 무덤에 안치할 때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두려웠을 것입니다. 의로운 말 한 마디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유대를 뒤덮었을 것입니다. 권력자에게 대드는 일은 역시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 소식을 예수께서도 들으셨으리란 것입니다. 불의가 의로움을 집어 삼킨 상황이 되었습니다. 

 



두려운 헤롯

그러나 헤롯은 지금 두렵습니다. 세례 요한이 살아 돌아와 자기가 저지른 비겁하고 부정한 일을 다시금 폭로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헤롯이 비록 로마의 속국으로서 제한된 권력을 가진 자이지만 그는 엄연히 왕입니다. 세례 요한이 살아 돌아왔다고 한들 다시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면 될 일입니다. 그렇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실체도 보지 못한 사람의 소문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신의 불의가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권력에 의한 재판이겠습니까? 헤롯은 왕이었습니다. 불의한 자들은 이미 법과 제도 위에 있는 자들입니다. 불의한 이들을 견디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의로운 자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세상 모두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며 경배할 때 의로운 자들은 권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 앞에만 무릎을 꿇고 경배할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의로운 이들의 존재가 불의한 자들의 어두움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거짓 예언자들과 권력자들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게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헤롯과 같은 신약의 권력자들이 세례 요한을 죽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신들의 죄악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높은 성벽에 둘러쳐진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며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왕궁이 오히려 감옥이 되어 그를 고립시키고 있습니다. 불의한 헤롯을 가둔 것은 궁궐 바깥에 온 세상을 덮은 의로운 소문이었습니다. 바로 예수의 말씀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의로운 삶이 헤롯을 가두었습니다. 궁궐 바깥에서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니 불의한 헤롯은 두려울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헤롯이 요한의 목을 쳐냈을 때 불의가 의로움을 집어삼킨 것 같았으나 주님의 소문이 세상을 뒤덮자, 이제 반대로 의가 불의를 집어삼켰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된 J. R. R. 톨킨의 위대한 작품 <반지의 제왕> 두 번째 플롯인 <두 개의 탑>에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두 개의 탑이란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두 개의 악의 축을 의미하는데, 하나는 어둠의 왕인 사우론의 탑과 다른 하나는 어둠의 마법사 사루만의 탑을 의미합니다. 사루만은 한 때 정의로운 편이었으나 사우론이라는 절대 악의 힘에 매료되어 어둠에 길로 빠져든 인물입니다. 사루만은 사우론을 도와 세상을 지배할 야욕을 품었습니다. 거대한 전쟁을 준비하며 자신의 탑 주변의 모든 나무를 베어 칼과 갑옷을 만들었고, 강을 가로막고 댐을 만들어 전쟁을 도모했습니다. 사루만의 원대한 계획은 우리가 잘 아는 마법사 간달프와 그를 돕는 영웅들, 그리고 엔트족이라 불리는 거대 나무 요정들의 연합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특히 움직이는 거대 나무들의 공격과 강의 길을 막은 댐을 무너뜨림으로 사루만의 패배에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사루만은 영웅들의 군대와 자기가 파괴한 나무와 강물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거대한 탑 위에 고립되었고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제아무리 높은 탑 위에서 세상을 호령했지만, 의로운 이들의 그 탑을 둘러싸니 그는 고립되어 자신의 추악한 몰골을 드러낸 것입니다. 높은 탑에서 홀로 자신의 마법 지팡이에 의지한 채 기대어 그 탑을 둘러싼 나무와 물과 영웅들의 군대는 작가 톨킨의 의도적인 묘사입니다. 자기 욕망 성취를 위해 높은 곳에서 서서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고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한 악한 인간성의 패배에 대한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상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의 아름답고 의로운 소문이 세상이 퍼져가자 불의한 헤롯은 왕궁에 고립된 채 두려움에 집어삼킴 당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불의를 이기는 힘은 더 강력한 무기가 아닙니다. 의로움이 불의를 집어삼켜야 하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 더 강한 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선의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불의를 이기는 의로움을 정확하게 알았던 사도였습니다. 로마서 12장 17절은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바로 이것입니다. 악을 이기는 길은 선으로 악을 에워싸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방식입니다. 

 

의로운 길을 걸어가려 애쓰고 분투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언젠가부터 우리는 의로운 소식, 의로운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약삭빠르게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자를 치켜세우고 그것이 옳은 방식이라고 다그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의로운 판결을 통해 약자들이 그 설움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건설을 멈추었다는 소식은 단 한 번도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남과 북이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는 소문도 벌써 오래전에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오로지 돈의 논리, 힘의 논리, 효율의 논리가 우리 세상의 헌법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의가 의를 삼켜버린 것 같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답은 없는가, 진정으로 이번 생은 망했는가, 하는 자조와 패배감에 젖어 들 때면 저 높은 궁정 위에서 회심의 미소를 만면에 짓고 있는 헤롯이 떠올라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 높은 성벽을 단숨에 올라가게 해주는 초능력은 없지만, 저 성벽 위에서 있는 헤롯을 두려워 떨게 만들 방법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 의로운 소문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것이란 소문,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소문, 굶주린 자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라는 소문, 하나님 나라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소문,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던, 어떤 과거를 지녔던, 어떤 실패를 겪었던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소문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이를 팔복과 사복으로 우리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바로 그 복된 소문을 우리가 퍼뜨려야 합니다. 그렇게 의로운 소식을 세상에 알리고 우리가 그 소문의 전달자로의 삶을 산다면 의가 불의를 삼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의로운 소문의 전달자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위로의 말을 전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자리에 서는 것에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믿음의 승리들을 쌓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의 소문은 세상을 적실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의로운 소문이 가득하다면 불의한 자는 고립되어 아무런 힘을 발휘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