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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고향에서(막6:1-6) 성령강림후 7주(240707)

by 청파비둘기 2024. 7. 18.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조금 짧은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광고해 드렸듯 교회가 공사를 준비하고 있어 오후에 많은 일들이 있어서 부득이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마가복음을 따라 우리는 주님의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이제 어디까지 왔는지요. 마가복음 2장의 안식일 논쟁에서부터 시작해 회당에서의 사건, 여러 비유 말씀, 그리고 갈릴리호숫가에서 만난 폭풍의 바다,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면서 만난 혈루증으로 고통받는 여인과 야이로의 딸 이야기까지 주님의 여정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지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여정은 아직 지치지 않았습니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신 이후 걸음을 옮기신 곳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고향이었습니다.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작은 동네입니다. 도시라고 하기엔 작아서 경제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에는 은연중에 시골 출신을 비하하는 의미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나사렛에 왜 들르시게 되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주님의 여정 가운데 들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과 고향에 들르신 주님은 본가 가거나 가족을 찾지는 않으셨습니다. 1세기에는 당연하게도 기본적으로 대가족 사회입니다. 한 마을이 씨족으로 이뤄진 곳이 많았습니다. 주님도 아마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족을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회당에 들러 그곳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전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역시나 주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시는 주님 앞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처음 들어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 놀라운 기적 이야기, 지혜 모두 이전에는 들을 수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 장면을 시기하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 다른 적대자들과 사뭇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3절입니다. 

3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우리식으로 얘기하자면, '내가 너 아는데? 너 누구 집 아들인 거 아는데? 네가 그렇게 대단했어?' 바로 이 뉘앙스입니다. 적대적인 감정과는 사뭇 다른 비하와 모욕이 담긴 말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고향에서 몇몇 사람을 고쳐주는 것 이외에 다른 일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씁쓸한 어조로 예언자는 그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5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주님께서 능력을 행하지 못하셨음이 주님의 능력에 어떤 제한이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자기 한계를 극복하려고 내적 투쟁을 불사했던 이들에게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이로가 그랬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그랬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반쪽이라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의 고백에 상관없이 치료할 수 있으셨겠지요. 

그러나 자기 고백 없는 회복은 어떠한 감사도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바라지도 않았는데 눈을 뜨이고, 걷지 못했다가 걷게 된다면, 그에게 어떠한 감사가 있겠습니까? 또 그런 이들이 자신과 처지가 같았던 이들에게 찾아가 당신도 예수께 나와보시라고 말할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은 이들이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갈 때 이뤄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모험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커다란 파도를 일으키심을 잊지 마십시오.

 



한 가지 이야기만 더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많이 오해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주님을 배척했다는 것인데요. 본문에는 사실 주님의 가족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어린 시절부터 누구였는지 잘 아는 주변 사람들만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 주님의 가족들은 빠져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주님이 고향에 들어가셨을 때 당신의 고향 집에 가고 싶었을까요, 아닐까요? 집으로 가서 육신의 부모님을 뵙고, 형제들을 만나서 인사하고 격려의 시간을 갖고 싶지 않았을까요? 저는 주께서 누구보다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간혹 주님께서 가족들에게 매우 냉소적이었을 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근거는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31절에 주님을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들에 대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막 3:31, 34-35) 말씀을 근거로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해당 내용은 그것대로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라 자세히 다루긴 어렵습니다. 다만, 죄인들과 부정하다 낙인이 찍힌 이들, 귀신에 들려 배척받은 이들에게 한없이 따듯하셨던 분이 자기 가족들에게만큼은 냉소적이었으리라 보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가족들이 보고 싶고 그들을 위로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가족을 만나러 가지 않으시고 떠나셨습니다.

해석의 여백이 많은 부분이지만 저는 주님의 이 행동이 오히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고 봅니다. 자신에 대한 악의적 소문이 파다하고 폭력 행위까지 불사하는 상황에서 가족과 친밀함을 보이셨다면, 주님이 떠나신 후 적대적인 강성 유대인들이 주님의 가족을 어떻게 대했을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본다면 주님의 방문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고향 사람들의 태도가 한 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면 그 작은 나사렛 마을에 로마 당국의 압제를 비롯한 온갖 정치적 공격이 있었을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족, 특히 어머니를 등 뒤에 두고 떠나야 하는 주님은 마음이 아프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성을 부정함이 전혀 아닙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함과 헤어짐에 대한 아픔을 아셨기에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온전히 아시는 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고 온 인류의 메시아가 되기 위한 고독의 길을 우리 주님은 걸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그 고독의 길에서 아파하셨던 주님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고독, 그것은 주님의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고독을 받아 함께 해야합니다.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신 주님의 뜻을 우리는 반드시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게 십자가길 가시는 주님 옆으로 달려가 저도 주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믿음의 모험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도 힘겹게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 가가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