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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용기 내라고 말해주는 사람(마가복음 10:46-52), 창조절 9주, 종교개혁주일

by 청파비둘기 2024. 10. 27.

환대에 대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받아들이고 감싸안기보다는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으로 내치는 데 익숙합니다. 비단 한국 사회의 현상만은 아닙니다. 세계적인 문제지요. 이민자에 대해서, 난민에 대해서, 나와 입장을 달리하는 모든 사람을 거절하고 울타리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 모든 정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낯선 타자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에 기인합니다. 저 낯선 사람이 나의 평온한 삶에 균열을 가하지 않을까, 나를 위협하지 않을까, 나의 명성이나 명예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렇기에 의로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낯선 타자들을 환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환대란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덕목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환대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환대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환대가 어떤 조건이나 제한 없이 타자를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개념이라면, 사실상 환대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본능이 말해줍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을 자기 집 안으로 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환대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낯선 타자가 두렵고 거리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시하는, 곧 세상이 요구하는 환대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신분이 분명할 것, 다른 의도를 품지 않을 것, 우리 문화와 법질서에 절대적으로 따를 것,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말 것(나대지 말 것), 환대를 요청하는 자답게 조신할 것, 한 마디로 내 말을 잘 따르고 복종하고, 내가 제시하는 모든 기준과 조건을 만족한다면 너에게 환대의 문을 열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가 간에, 민족 간에, 그리고 여러 크고 작은 커뮤니티 간에 익숙한 장면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현대 사회에서 환대란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말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바로 이 문제에 깊이 천착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의 환대가 조건적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 환대가 신화에만 존재하고 우리의 환대는 반드시 조건적일 수밖에 없다면, 이 모순 사이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그는 깊이 성찰했습니다. 데리다의 철학을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는 우선 낯선 타자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걷어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다름과 낯섦을 인정하되, 통제하려거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어떻게든 다가가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때 환대의 조건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성찰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특히 우리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작지 않습니다.

 

*<환대에 대하여>는 자크 데리다와 안 뒤푸르망텔의 환대에 관한 세미나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으로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 ~ 2004)




예수께서 보이신 환대의 조건
자, 이제 우리의 신앙 세계 안으로 들어와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환대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치료하시거나, 위로하시거나, 제자로 받아들이실 때, 바꾸어 말해 누군가를 환대하실 때 조건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요한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고치신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봅시다. 5장 14절,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간음하여 붙잡혀 온 여인을 돌려보내시며 하신 말씀, 8장 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우리가 두 주 전에 함께 살폈던 말씀,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 10장 21절,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주님은 당신의 은총을 내리신 이들에게 분명한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가서 죄짓지 말아라. 가진 것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 여러분, 이것은 분명한 환대의 조건들입니다. 네가 예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세상,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세상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네가 반드시 이행해야 할 조건과 자격이 있다. 이제부터 너는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죄를 멀리해야 한다. 약자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이것들이 너를 환대하기 위해 내가 너에게 제시하는 조건들이다. 네가 이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너는 그리스도인이다. 따라서 주님의 환대는 조건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거나 오해해서는 안 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가려가며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환대받을 만한 적당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은총의 세계로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누구나 만나셨습니다. 낯선 타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출신을 보지도, 피부색을 따지지도, 정치적 입장 차이를 괘념치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적대적인 이들까지 만나서 환대의 문을 여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환대와 예수의 환대 사이의 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낯선 타자를 내치기에 바쁘고 온갖 조건을 갖다 붙이며 밀어내기에 선수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타자의 모습이 무엇이건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손을 잡고 은총의 세계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일원이 되는 유일한 조건, 이제부터 의롭게 산다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네게 있으리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환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디매오와 환대의 조건
이 성찰을 조명 삼아 오늘 말씀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지난 한 달 동안 살폈던 마가복음서 10장 말씀의 마지막이며, 예루살렘 입성 전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비롯해 많은 무리와 여리고로 떠나실 때, 디메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하는 눈먼 거지를 지나쳤습니다. 바디매오의 정체를 알려주는 정보들이 많습니다. 우선 이름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바디매오는 이름이 아닙니다. 바디매오의 '바'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의 히브리말입니다. 따라서 바디매오는 바-디메오,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디메오라는 이름 역시 당시에 유대에서 흔하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저 사람은 '김철수 아들'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이름 없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또한 거지였습니다. 이름이 없는 눈먼 거지 한 사람, 달리 그의 상황을 표현하지 않아도 어떤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무일푼 맹인이 거리를 지나는 예수님을 보고 일어나 외쳤습니다.  장면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맹인이 예수님을 보고 일어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의 눈은 닫혀있었지만, 귀는 열려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거리에 앉아 구걸하던 그는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늘 귀를 예민하게 열어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의 귀에 흘러 들어간 소식이 갈릴리에서 온 예수라는 분의 소식이었겠지요. 누군가 그에게 정돈된 주님의 말씀을 해주었을 리 만무합니다. 그는 이런저런 파편 같은 예수님 소식과 그분의 말씀을 조각처럼 들었겠지만, 그 말씀들을 스스로 맞추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말입니다. 조각난 말씀을 이어 붙이고 나니 아름답게 빛나는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디매오는 깨달았습니다. 이 분은 예수,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말이지요. 

어느 날 기적처럼 예수님의 일행이 자기가 늘 앉아 있는 거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직감했습니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인파들의 웅성거리는 소음 안에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이 있음을 말입니다. 이윽고 주님께서 지나가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는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온전한 방향으로 말을 걸었는지 확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박대의 소리였습니다. 48절입니다.

48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조용히 하라는 윽박지름과 더 큰 목소리로 자기가 거기에 있음을 주장하는 맹인이 서 있는 장면이야말로 환대의 실패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만약 다윗의 자손이라는 저 위대한 표현을 행색이 근사하고 지체가 높은 사람이 했다면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은 주저 없이 그를 주님께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한 눈으로 보아도 몰골이 거지 같고,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환대한다면 자기들의 명예와 명성에 큰 흠집이라도 날듯이 그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환대의 조건에 한참이나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낯선 타자인 바디매오와 대면조차 하기 싫은 이들의 옹졸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를 불쾌하게 여긴 또 이유가 있습니다. 큰소리로 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약자들이 큰 소리 내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잠잠히 숨죽여 있기를 원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목청을 높여 자기 요구를 쏟아내는 일을 세상은 참지 못합니다. 

좀 차분히 공손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원하는 바를 말하면 누가 안 들어주나, 꼭 저렇게 큰 소리를 내야만하는가, 주변 사람들 불편하고 불쾌하게 말이지!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수가 없네! 

어디서 많이 듣던 표현 아닌지요. 우리 시대 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나마 한 줌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용기 내어 모여있을 때 세상은 잠잠하라고 닦달합니다. 꼭 저렇게 과격하게 말해야 하겠느냐고 따집니다. 환대하려야 할 수 없게 만든다고 끌끌 혀를 찹니다. 그렇기에 오늘 48절의 사람들처럼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목청을 높인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둠으로 점철되었던 자기 삶에 유일한 희망의 빛이 주님이었기에 그는 잠잠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추운 거리에서, 자기가 일했던 일터에서, 참사의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나는 사람들은 불쾌를 표현합니다. 저렇게 과격하게 말할 필요가 있냐고 힐난합니다. 겸손히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가르치듯 말합니다. 이들은 소리치는 이들을 바디매오 대하듯 그들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앞서 나누었던 세상이 제시하는 환대의 조건을 기억하시지요. 자기 주장을 하지말 것, 나대지 말 것, 환대를 요청하는 사람답게 처신할 것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환대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디매오가 침묵했다면 그는 불필요한 욕설과 모욕을 당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주님께 닿았습니다. 주님은 바디매오를 불러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환대하겠다는 뜻입니다. 너의 행색, 몸의 장애, 그의 평판을 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주님 앞에 온 바디매오에게 예수께서 묻습니다. 

5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바디매오가 답합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시절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력을 잃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다시 보고 싶다는 말은 잃었던 일상을 되찾아 달라는 부탁과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주님께 잃어버린 나의 일상을 되찾아 달라고 목청을 높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52절입니다. 

5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52절의 마지막 단락은 그가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나섰다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그러니까 자기 일상을 다시 찾게 된 이 사람이 본래 자기의 생활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의 길에 동행한 것입니다. 주님과 바디매오 사이에 다른 대화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대화들과 비교해 보면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신 사람들에게 대부분 행동 지침을 일러주었습니다. 제사장에게 회복된 몸을 보이라던가, 치료받은 사실을 알리지 말라던가, 혹은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제가 되라는 말씀을 바디매오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디매오는 스스로 제자가 됩니다. 바디매오는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의 진의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았음을 직감했습니다. 그 환대의 초대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음을 그는 알았습니다. 옛 삶을 버리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 바로 그것이 이 환대의 조건임을 바디매오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름으로, 즉 제자가 되므로 주님의 환대에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마치고 예루살렘 길에 오르셨습니다. 그 길은 무슨 길입니까?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의 죽음의 길에 동행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용기 내라고 말해주는 사람
마지막으로 바디매오를 환대하는 중에 잠시 등장했던 그러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일단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하겠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며 주님의 일행을 가로막았던 바디매오에게 주님의 모든 사람이 그를 꾸짖고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바디매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께서 바디매오를 데려오라는 말씀을 하자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록이 49절 중간에 나타납니다. 이들은 바디매오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합니다. 49절 하반절입니다.

49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모두 외면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에게 달려가 용기를 내라고 말해주는 사람, 주님께서 당신을 찾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 저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환대의 조건을 주님께 맞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낯선 타자에게 다가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함께 예수를 믿자, 그리고 의롭게 살며 약하고 작은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자고 말해주는 사람 말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그들을 침묵하게 한다면 우리라도 그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높여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가르고 자르고 정죄의 언어가 도처에 가득합니다. 나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주님의 환대가 있을까 묻는다면 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사람의 외모와 능력과 지향과 입장을 보았습니까? 주님께서 물으시는 환대의 조건은 한 가지입니다. 죄짓지 말고 의롭게 살아라.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라.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바디매오들을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먼저 달려가 용기를 내라고 말하십시오. 함께 주님을 따르자고 권하십시오. 이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청파 청년 공동체는 낯선 타자에게 용기있게 나가가며 의롭게 살자는 주님의 부탁을 함께 하자고 말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