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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넘어서라 부르는 소리(눅 3:7-18), 대림절 3주

by 청파비둘기 2024. 12. 15.

세례
세례는 헬라 말로 밥티즈마(βάπτισμα)라고 하는데, 물에 잠기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인 되기를 원할 때, 교회는 그의 머리에 물을 부어서 혹은 몸 전체를 물속에 잠기게 했다가 나오게 하는 행위를 의례로 삼아 그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세례를 교회의 중요한 의례로 받아들였습니다. 공관복음서 전체가 주님의 세례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 교회가 얼마나 세례를 진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마다 묘사 방식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세 복음서 모두 주님께서 요단강으로 나오시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으로 주님의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세례는 주님 사역의 시작이자 복음의 출발입니다. 주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 안에서 초기 교회가 특별히 주목한 장면들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물 바깥으로 나올 때, 세상에 울려 퍼진 소리와 세상에 흩날리는 빛이었습니다. 

세상에 울려 퍼진 소리는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 1:11; 마 3:17; 눅 3:22 개역개정역)

요단강 주변의 사람들은 단번에 이 음성의 주인이 하나님임 직감했습니다. 세상에 실재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바가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저 요단강에서 나오는 이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자기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그 음성을 들으며 이는 하나님의 목소리임을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세례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 세상에 흩날리는 빛도 보았습니다. 그 빛은 마치 비둘기 같은 모양의 따스한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하늘을 뚫고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그 빛이 하나님의 영임을 확신했습니다. 훗날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이 빛을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라 칭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세례 장면에는 물과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물과 영과 음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태초의 창조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창세기 1장의 첫 세 구절을 보겠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그 물은 공허하고, 혼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 발화되자 어둠은 물러가고 공허는 질서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관통하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는 물 속이라는 혼돈의 세상에서 물 바깥이라는 창조의 세계로 나옴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된 존재임을 망각하고 공허라는 물속에 갇혀 있던 내가, 수면 바깥으로 나올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창조됩니다. 물에서 건져진 우리는 나를 사랑한다는 주님의 음성과 성령의 은총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복음서 본문은 요한이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외치고 가르친 말씀입니다. 지난주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황제가 사는 황궁도, 분본왕들이 사는 궁전도, 유대를 식민 통치하는 총독 공관도, 제사장들이 기거하는 성전도 아닌 광야에 임했습니다. 말씀이 광야에 멈추어 섰으니, 사람들이 광야로 나아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살길이 있음을 사람들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이 있는 광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을 때 요한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가리켜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사람들을 얼마나 애틋하게 여기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른 곳이 아니라 광야로 사람들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흔히 광야를 험난하고 위험한 장소로 여기곤 하지요. 하지만 성경의 많은 예언자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자기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광야는 적막하기에 하나님의 음성만을 오롯이 들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무엇보다 광야는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들을 가리는 법이 없습니다. 자격이나 재력을 갖추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높은 울타리가 쳐진 근사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럴리는 없었겠지만, 말씀이 왕궁에 내렸다면 유대의 사람들은 감히 말씀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갈 용기 또한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왕궁에는 왕궁에 걸맞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뜻을 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이 내린 광야는 비록 척박할지 모르지만 사람을 차별하여 받는 곳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차별 없이 자기 품을 열어주는 광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천천히 살펴보면 의문점이 몇 가지 떠오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장면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의 임무가 세례 행하는 자임에도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묘사가 없습니다. 또 다른 의문점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거의 유대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세례가 불필요합니다. 유대인은 어떤 입회 의례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혈통으로 그러니까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유대인니다. 죄에 대한 회개나 영적 갱신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이지 광야에서의 세례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누가의 의도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가 세례 장면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세례가 없었다기보다는 오늘 말씀의 강조점이 세례 행위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례가 필요 없는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왔다는 것은 요한의 세례가 신분이나 외적 형태의 변화와 관련하지 않고 본질적인 변화, 근본적인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가 요한의 세례를 일컬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명명하는 이유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형식적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 변화라는 점에서 그는 자기에게 세례받는 모든 이들이 그저 마음의 위로와 격려를 얻고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어둠과 공허의 세상에서 그저 하루 살아갈 힘을 주는 것으로 자기 책무를 갈음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일임을 요한은 자기 앞의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는 매섭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7절입니다.

7b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독사의 자식이라는 선언에서 긴장감이 감돕니다. 이어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알려주냐는 말씀에서 강력한 역설이 있습니다. 누구도 닥쳐올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설령 세례를 받고 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사람조차 말입니다. 뒤이어 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안심하고 있는 너희 태생과 혈통이 진노가 닥칠 세상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9절을 봅시다. 

9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긴박감이 느껴집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는 강력한 촉구가 느껴집니다. 요한은 말씀을 찾아 광야로 온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어째서 이렇게 날이 서고 무거운 말씀을 쏟아내는 것일까요? 세례의 핵심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넘어서서 돌아가기를 
앞서 세례란 공허의 물 아래에서 빛의 세계로 나아오는 의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 아래의 심연은 죽음의 공간입니다. 물 아래에 있을 때 우리는 공허와 혼돈과 죽음의 세계에 있습니다. 물 아래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함께 물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다시 살아난 존재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물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물 바깥으로 나와 세상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주님의 공생애라 합니다. 

세례를 통해 수면 바깥으로 나온 우리 역시 다시 물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물 바깥으로 나아와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물속이 아닙니다. 세상입니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무질서가 가득하지만, 이제부터 더는 우리를 뒤흔들 수 바로 그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물 바깥으로 나와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질서가 가득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보았습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는 사람들, 말씀을 따라 나온 사람들을 말입니다. 또한 요한은 알았습니다. 광야에서 말씀과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나온 그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함을 말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물 아래에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여 가르쳤습니다. 물 밖으로 나와 세상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요한에게 묻습니다. 

10b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은 세례받은 사람들이 물 바깥에서 해야 할 일,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속옷이 넉넉하냐?'
'없는 사람에게 주어라'

'먹을 것이 조금 더 있느냐?'
'배고픈 사람에게 주어라'

세리들도 세례받은 후 자기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횡령하거나 부당히 징수하지 말고 법이 정한 대로만 받아라'

군인들도 세례받은 후 자기의 자리에서 어떻게 복무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협박하여 빼앗거나 속이지 말고 받은 급료에 만족하며 복무해라'

여러분, 이 가르침을 들으니 어떠하십니까? 일상적이고 실생활과 관련한 윤리적 지침으로 보이십니까? 저는 요한의 이 가르침들이 진정으로 영적인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례받고 물 밖으로 나와 하나님의 진리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삶이 바로 이러해야 함을 요한이 가르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의 이 가르침은 참으로 영적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거짓의 방식으로 살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가르침을 다시 보십시오. 각각 개별 직군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각각의 가르침 같아 보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가르침이 사람을 살리는 일과 관련 있습니다. 속옷이 없는 자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속옷을 주라는 의미는 최저 생계의 책임을 서로 나눠지라는 뜻입니다. 돈이 없어 먹을 것을 살 수 없는 사람에게 내가 먹을 것을 나눠주라는 말씀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과도한 세금은 사람을 죽입니다. 물 바깥으로 나온 이는 법에 따라 정한 세금만을 징수함으로 불법적이고 과도한 세금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서는 안 됩니다. 군인들이 더 큰 권력과 재물을 탐하여 자기 무기와 세력으로 사람을 겁박하는 일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군법과 군율에 맞추어 사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세례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자리에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세례 받고나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래 너의 자리로 돌아가라. 이전의 너의 일을 그대로 하라. 그러나 전과 같이 하지 말고 과거의 나를 넘어서는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의 모든 당부는 나를 넘어서라 부르는 소리입니다. 이전의 나를 넘어서 새로운 존재, 살리는 존재로 살아가라는 도전입니다.

인간으로 남는 길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넘어서라 부르고 계신 데, 우리를 둘러싼 소리는 온갖 폭력의 소음뿐입니다.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작금의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생의 의지마저 꺾여버릴 정도입니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무감각과 혐오가 어떻게 자라나게 되는지 목도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잡음 가득한 말들의 혼란 속에 작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나를 넘어서라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리는 작고 연약했지만 단단하고 강인했습니다. 지난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들려온 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전해온 소리였습니다.

작가 한강은 도저한 그의 수상 소감에서 세상과 고통, 그리고 인간에 대해 전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늘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짧게 머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 속에서, 우리를 구성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언어,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 의 일인칭 시점으로 상상하는 언어,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 언어를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온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반드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맞서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서서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폭력에 반대하며,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강, 노벨 문학상 시상식 소감문 가운데>


작가는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인간은 어째서 없지 않고 있는지 그 존재 이유에 관해 묻습니다. 동시에 고통뿐인 세상처럼 보이지만, 이상하리만큼 사랑도 공존하고 있는 이 세상의 신비에 대해서 성찰합니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사건들이 도처에서 발발하고 있는 지금,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까닭에 대하여 작가는 고민하고, 묻고, 글을 써왔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작가는 이내 깨닫습니다. 제아무리 밤이 어둡고 깊다고 해도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연결해 주는 언어가 있음을 말입니다. 언어는 연결되어 있기에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체온을 간직한 언어가 문학으로 구현되어 이 폭력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이 여전히 인간임을 자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모든 문학은 폭력에 반대하며, 인간을 인간 되게, 곧 인간을 살리는 언어가 된다고 말하며 작가는 소감을 마칩니다.

저는 이 소감문을 읽으며, 제가 근래에 들었던 모든 설교, 강연, 책의 내용을 압도하는 거대한 울림을 느꼈습니다. 언어가 우리를 연결하고 나의 존재 이유를 말해줄 때 고통 가득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준다는 작가의 성찰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기 존재 안에 담아두어야 할 말이 바로 이런 말입니다. 물 바깥으로 나와 새롭게 창조된 우리 안에서 쏟아져야 할 말은 살리는 말이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지향하는 바도 다르고 생각하는 바도 다르고 정치적 입장도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공허의 심연에 들어갔다가 물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으로 돌아가 따듯한 말, 생명의 말, 체온이 있는 말,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말을 나눔으로 사람들을 살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폭력과 비방과 자기 변명과 남 탓으로 일관하고 있는 작금의 우리 사회 안에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박해에 반대하며 살림의 언어를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허와 혼돈의 물 바깥으로 나와 나를 넘어서고자 용기 내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세례자 요한이 세상과 불협하지만, 한 옥타브 높은 음성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회개의 세례를 전하는 이유는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이 되라는 뜻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내가 생명의 언어로 서로를 살리는 일이 대림절 주님의 기다리는 일과 같음 오늘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 바깥으로 나옵시다. 그리고 나를 넘어서 생명을 지닌 존재로 살아갑시다. 이 일이 주님을 기다리는 일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