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청 말씀 나눔

기대의 방향 (눅 3:15-17, 21-22), 주현 후 첫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1. 12.



벅찬 기대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은 단지 세례만 베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몇 주 전에 살펴보았듯 그는 서릿발 같은 가르침으로 세례받으러 나온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부수었습니다. 서슴지 않고 독사의 자식이라 다그쳤고 닥쳐올 진노를 피할 생각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겼던 유대 혈통도 당신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조금 민망합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시를 떠나 광야로 나가 세례를 받는 일만으로도 벅찬 결단일 텐데, 생면부지의 예언자에게 질책과 훈계를 듣는다는 일이 선뜻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에 모인 사람들은 놀랍게도 요한의 예언자적 음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의 진심이 닿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세상, 거짓과 기만이 가득한 세상, 폭력과 박해가 당연시되는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광야의 사람들은 요한의 가르침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요단강으로 뛰어들어 세례받았습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살면 안 된다는 깨달음도 얻었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이제 광야는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가 바뀌게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오른 희망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을 듣자니 새로운 세상이 이미 눈 앞에 펼쳐진 것만 같았습니다. 기대감은 한껏 고양되었습니다. 유다의 백성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해방 사건이 당장에 펼쳐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 벅찬 기대가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자 그리스도의 등장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15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요단강에 세례받으러 나온 유다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저기 우리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토록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저 사람, 요한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린 바로 그 사람이 아니겠냐고 말입니다.

 



메시아다운 메시아
예수님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라 믿은 일은 분명 착각입니다. 하지만 세례받고 마음이 뜨거워진 유다 백성들의 착각을 그저 믿음 없는 이들의 허탄한 소리라거나 예수님을 몰라본 사람들의 무지라고 판단해서는 곤란합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처지를 조금만 들여다본다면 이 착각을 그저 미련한 기대라고 말할 수 없는 삶의 고단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이토록 간절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의 삶이 너무나 고단하고 괴롭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유다의 백성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 포로로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 옛날 바빌로니아에서부터 페르시아로, 때때로 이집트의 권력자들에게 그리고 이제는 로마 제국의 힘 앞에 숨을 죽이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의 정치 지도자들은 시시각각 바뀌는 열강의 패권 앞에 줄을 대기에 급급했고, 성전의 제사장들과 율법 학자들은 공의와 정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배를 불리고 약자들의 마지막 가산마저 삼켜 먹기 위해 온갖 모략을 부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 독서로 읽은 이사야의 예언을 기억하는지요?

1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이 아름답고 장엄한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회복시키시라는 약속이며, 반드시 신원하시라는 다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해진 지가 벌써 수백 년에 지났습니다.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입니다. 이사야 43장은 적어도 기원전 6세기의 문헌이니 최소 6백 년 이상 기다린 것입니다.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 도대체 어째서, 왜, 아직도 우리에게 구원의 날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보내주신다는 메시아는 도대체 언제 오신다는 것입니까? 수백 년을 기다렸으니 수십 년을 더 기다리라는 말씀입니까?

이사야 예언자의 이 희망 넘치는 예언의 말씀은 역설적으로 현실 유다 백성들에게는 사무치는 슬픔의 노래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구원의 말씀 그러나 오지 않는 메시아라는 이 역설적 상황은 그저 지연된 정의일 뿐이라는 허무와 절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수 세기 동안 이어진 하나님의 침묵에 답답하고 제국의 억압에 모든 희망이 끊어지려는 찰나에 한눈에 보아도 구원자임이 분명해 보이는 이가 백성들 앞에 섰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억압의 시간을 끝내줄 메시아가 나타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비루한 자신들의 삶을 바로 오늘부터 바꿔줄 강력하고도 확실한 그리스도가 나타난 것 같았으니, 이들이 얼마나 기뻤으며 요한이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들의 이 비극적인 삶을 얼마나 빨리 끝내고 싶었겠습니까?

요단강에 모인 사람들의 절망과 열망을 보며 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의로운 길을 걸어가려 노력하지만 여전히 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괴롭습니다. 생명과 평화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으로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지만, 세상에 빽빽하게 들어찬 불의를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무너집니다. 우리 사회가 오랜시간 쌓아올린 민주주의 가치를 무시하고 정당한 법 집행을 가벼이 여기는 정치인이라, 지도자라, 자처하는 이들의 안하무인을 볼 때 도대체 언제까지 정의가 지연되는 것인지 답답해집니다. 무기력과 허무가 몰려오는 길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럴 때 우리 믿는 사람들조차 확실하고 강력한 능력으로 모든 불의를 일거에 처단하고 뒤집을 수 있는 힘을 찾고 싶어집니다. 요한이라는 매력적인 아이콘을 메시아로 삼고 싶었던 유다 백성들의 심정이 진심으로 이해되는 요즘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강력한 메시아
지칠 대로 지친 삶을 살아온 유다의 백성들에게 예언자 요한의 등장은 가장 확실한 메시아 도래의 확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왕이자 장군으로 삼아 세상을 개혁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대를 시작하려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본문을 알았습니다. 여기에 요한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요한은 자신을 향한 오해를 즉각 부인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그 말씀,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눅 3:16b)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쏟아지는 압도적인 기대를 끊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이라고 해서 어찌 대중들의 기대와 관심이 달콤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복중에서부터 주님을 영접했던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작동 방식이 사람들의 기대대로 운영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요한은 자기 눈으로 그리스도를 본 적은 없지만 그는 분명 나의 방식을 뛰어넘어 보다 대단한 방식으로 사역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요한의 기대감은 17절에 나타납니다.

17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요한의 이 발언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타납니다. 누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사뭇 다르게 전개합니다. 가령, 마태는 요단강에 세례받으러 나오는 주님을 알아보며 자신이 주님께 세례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받았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기록하며,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를 보며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흐릿하게 묘사합니다. 누가복음의 맥락 안에서 보자면 요한은 예수를 한 번도 알아보지 못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17절 말씀,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란 요한의 발언은 그가 갖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 또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도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분이지 않겠느냐는 자기의 메시아 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손에 키를 드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분입니다. 알곡은 잘 모아 곁에 두시고, 쭉정이 같은 이들은 따로 구별해 불에 태우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강력한 심판자 메시아를 그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요한의 성정을 보면 십분 이해 가는 메시아 상입니다. 그가 살아온 궤적 그대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투영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린 메시아는 과연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일까요? 


줄을 서신 메시아
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요한에게 세례받은 이들이 기대한 메시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과 사람들은 세례를 나누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공히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고양되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가 강력한 통치자의 모습 혹은 위대한 예언자의 모습으로, 혹은 죄인과 의인을 갈라 심판하는 재판관의 모습으로 나타나 지금 당장 제국을 뒤엎으시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내리꽂으시리라 믿었습니다. 지금 요단강은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지연된 정의가 실현될 날에 대한 기대가 차오르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첫 장면에 대한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21절입니다.

21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누가가 보도하는 예수님 공생애의 첫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메시아의 첫 등장이라기엔 너무나 소박합니다.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억압과 박해의 사슬을 끊어낼 메시아의 등장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은 등장입니다. 세례 요한의 기대와 같이 강력한 심판자의 등장이라기엔 너무나 나약해 보입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차례가 되어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 행렬의 끄트머리에 줄을 서셨습니다. 차례를 지키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줄을 서고 계십니다. 그분은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뒤에 당신도 줄을 서셨습니다. 여기 요단강에 세례받으러 모인 사람들이 과연 여기 줄 서신 예수님을 보고 메시아인 줄 알았을까요? 요한은요? 세례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또한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거기에 계신 줄 그는 알았을까요? 십중팔구 몰랐을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누가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중에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는지 모릅니다. 한 마디로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 가운데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세례받을 준비를 하는 분이 그리스도임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구원자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성육신에 대해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합당한 모습으로 납득 가능한 모습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시길, 우리의 바람을 성취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호령하고 불의한 모든 것을 단번에 처치할 심판자를 기다리는 주님은 사람들 뒤에 조용히 나오셔서 줄을 섰습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주님은 세상에 등장하셨습니다.

나머지 주님의 세례 장면도 보겠습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21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줄을 서셨고, 사람들이 세례를 다 마친 후에 자기 차례가 되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주님께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세례받으시고 물 바깥으로 나와 조용히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역시 요단강에 모임 사람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후에 잔뜩 고양된 감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들떠 있었고, 급기야 요한을 메시아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기도하신 후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내려왔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음성, 곧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하늘의 고백이 들여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기대감에 고취되어 있을 때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의 뜻을 묻고 하늘의 시간을 기다린 것이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에 응답하십니다. 성령과 음성은 주님에게만 비밀리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요단강에 모인 모든 사람, 요한을 비롯해 흥분해 있던 모든 백성이 보고 들었습니다. 비로소 바로 그때 사람들은 누가 그리스도인지 알았습니다. 놀랍게도 자기들 뒤에 줄을 서셨던 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세례받으셨던 분, 사람들이 떠들며 미래를 논할 때 홀로 기도하셨던 바로 저분이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세상은 그제야 알아차린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여기에서 주님의 세례 장면을 마무리합니다. 그리스도로서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나 유다 백성들을 향한 동원도 없었습니다. 세상을 이런 모습으로 세우시겠다는 계획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불의가 어떻게 물러나게 될지, 정의와 공의가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첫 사역이 이렇게 싱겁게 끝나고 만 것일까요? 

아니요. 정반대입니다. 위대한 드라마는 이제 시작된 것입니다. 요단강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 바로 주님과 함께 세례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인정했고 새롭게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잠시 잘못된 그리스도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내 참 그리스도를 본 후 그들은 변했습니다. 자신들이 따라야 할 분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정말로 오래 기다렸습니다. 주님이 어서 오셔서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땅에 떨어진 정의가 회복되길 진심으로 오래 바라고 있습니다. 자꾸만 지연되는 정의를 보며 우리는 무너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차분히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함께 걸어갈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성취되지 않는 정의를 바라보며 낙심하지 맙시다. 대신 우리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의 윤리를 지키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지켜갑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세례를 받고 거듭난 사람들임을 잊지 맙시다. 불의에 물리서지 말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설 때 주님도 우리와 같은 자리에 서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맙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테니 주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우리 세상에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도구가 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