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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버려두지 않기로 합시다(요 2:1-11), 주현 후 둘째 주

by 청파비둘기 2025. 1. 19.


'나락'이라는 유행
최근 저는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거나 콘텐츠를 살필 때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것, 눈여겨보지 않으려는 것,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른바 나락 콘텐츠라고 하지요. 주로 연예인이나 인기 있는 인플루언서들이 말이나 행동에서 실수하거나 잘못을 한 경우 혹은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어떤 비행이 드러난 경우 그들을 희화화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유의 기사나 '밈'이라 부르는 소셜미디어 콘텐츠를 가급적 피하려고 애씁니다. 제가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비위를 두둔하기 위함 역시 물론 아닙니다. 누군가의 실수나 과오를 유희거리로 만들어 조리돌리는 행위가 당사자의 인격을 파괴하고 사회적으로 복구 불가능으로 만들며 무엇보다 회복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노리듯 누군가의 실수를 맹렬히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단 하나의 건수만 있다면 그것을 잡아 물어뜯는 파괴적 문화가 가득합니다. 어느 유명 연예인이 비판적 메시지를 던지려고 할 때 사회자가 가로막으며 '나락  감지'라는 자막이 뜨는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등장한 빅 브라더의 감시 장치인 텔레스크린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한탄스러웠습니다. 누군가의 의도치 않았던 생의 하락을 보며 비열한 웃음을 짓거나 내 그럴 줄 알았다며 무정한 도덕 교사 같은 태도로 멀찍이 서서 손가락질하는 일체의 행위, 단연코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은 이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위기의 잔치
오늘 우리가 마주한 요한복음의 말씀은 생의 가장 기쁘고 벅찬 감동의 순간에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절망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만 등장하는 이 사건은 참 재미있는 구석이 많습니다. 열한 절, 그리 길지 않은 분량으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발단, 전개, 절정, 위기, 그리고 결말이라는 서사의 전통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요한복음이라는 소설집의 잘 짜인 한 편의 단편소설 같은 느낌입니다. 다 같이 이 혼인 잔치집으로 들어가 봅시다.

갈릴리 가나라고 하는 작은 동네가 시끌벅적해졌습니다. 혼인 잔치 준비가 한창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부와 신랑뿐만 아니라 부모들과 가족 모두 정신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웨딩 플레너라는 직업이 있을 정도로 결혼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문 인력이 담당한다지만, 과거에는 가족들이 그 몫을 지었습니다. 게다가 당대의 결혼식은 지금처럼 한두 시간에 마치는 행사가 아니라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일주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기고 했습니다. 그러니 신부와 신랑은 물론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애를 쓰며 결혼식을 준비했을지 눈에 선합니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초대할 사람들을 정하고 연회장을 준비하고 먼 곳에서 방문한 축하객을 위한 숙소를 마련하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음식과 술을 준비했습니다. 잔치 전체를 총괄한 책임자도 선임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고대 사회의 혼인 잔치는 단지 결혼식만을 의미하지 않지요. 양가 부모들의 명예와 관련하고 새출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의 사회적 위신이 걸린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혼인 잔치를 무사히 마치는 일은 생의 중대한 과업이었습니다. 

오랜 준비 끝에 혼인 잔치가 시작됐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멀리서 사는 친지와 친구들도 찾아왔습니다.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이 잔치에는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제자로 삼은 갈릴리의 청년들도 함께였습니다. 잔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만 끝난다면 이 젊은 부부의 앞길도 순탄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중대한 문제입니다. 위기지요. 잔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술이 떨어진 것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새 술이 채워지는 속도가 느려지는 일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둘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잔치 자리에 술이 떨어지다니 이거야 원!'

험악해지는 분위기 가운데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부와 신랑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었겠지요. 요즘 말로 하면 '나락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오늘 본문에는 신랑과 신부의 정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나 반응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맥락 안에 숨겨진 이 젊은 청년들의 심정을 헤아려야 합니다. 앞으로 나타날 주님의 기적이 결국에는 이 청년들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은 기적의 표면일 뿐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가 늘어난 사건은 그저 기적의 일환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진짜 기적은 사람들의 허기가 사라졌다는 것, 그 공간 안에서 더는 배고픈 이가 없어졌다는 것, 허기로 가득찼던 갈릴리 호수가가 축제의 잔치로 뒤바뀐 일이 바로 기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혼인 잔치 자리로 돌아가 봅시다. 신랑 신부를 향해 축하의 말을 전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만과 조롱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 잔치를 준비하면서 포도주 준비를 이렇게 미흡하게 하느냐는 말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저 집 부모가 자린고비라든가, 돈도 없는 집안이 허세를 부리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둥 있지도 않은 말이 이러쿵저러쿵 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
이때 이 혼란을 중단시키고자 나선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3절입니다. 

3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어머니 마리아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다소 관계없어 보이는 이 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단지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연결 장치가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자신과 아무 관련 없는 이 사건에 개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어머니 마리아의 눈에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신랑과 신부가 들어왔을 것입니다. 오늘만큼은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해야 할 이 젊은 부부의 불안과 눈물이 어머니의 마음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식뻘 되는 두 청춘이 발을 동동 구르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이 혼란한 결혼식장에서 오직 어머니 마리아만이 두 청년의 불안에 가장 먼저 공감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 마리아는 이 혼인 잔치의 청년들을 보며 아들 예수를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내 아들이 평범했다면 여기 이 자리의 저 아이들처럼 결혼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육신으로는 자기 아들이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여인입니다. 그렇기에 수치가 닥친 자기 자식 또래 젊은이들의 고통에 민감했고, 자기 아들이자 메시아인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을 그녀는 믿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이 긍휼한 마음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앞으로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과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때에 대한 깨달음 
어머니의 부탁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보겠습니다. 4절입니다. 성서공회가 공인 번역한 새한글 성경 번역으로 보겠습니다. 

4   그러자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말씀하신다. "저한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어머니? 아직 저의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과 부탁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혼인 잔치의 신랑과 신부를 가엽게 여겼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이 개입해 주길 바라고 계심은 아들된 주님은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째서인지 잠시 머뭇거립니다. 아직 자신의 시간, 곧 자기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때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불화하여 영원히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바로 그 시간을 정확히 가리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자신의 사명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실 것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때가 아직은 이르지 아니하였음을 아셨기에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도 미지의 영역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목적지가 십자가임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 길을 가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어떤 걸음으로 그 길을 가야 할지 그것은 아직 미답의 상태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시고 세상에 나와 처음 당도하신 장소입니다. 공생애의 첫 번째 관문이었습니다. 나의 여정에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주님도 모르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내보일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에 주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말씀, 아니 정확히는 절망에 빠진 두 젊은 신혼 부부의 슬픔에 깊이 공감한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의 소리를 읽으시고는 불현듯 깨닫습니다. 나의 때, 곧 십자가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나의 여정을 채워야 할 내용들이 바로 이것이구나. 십자가로 이르는 나의 길은 수치를 당한 사람들 곁에 서주는 것, 슬픔을 당해 어쩔 줄 모르고 주저앉은 이들 옆에 있어 주는 것, 말문조차 막혀 눈물만 흐르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느껴주는 것, 나의 시간은 이런 것들로 채워야 하는구나. 주님은 혼인 잔치에서 기쁨을 잃어버린 신랑과 신부에게 마음 깊이 공감한 어머니 마리아의 다정함에 공생애의 마지막 퍼즐을 풀어내셨습니다. 십자가에 이르는 길은 수치 당한 이들, 상처받은 이들,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가야 함을 말입니다.

십자가와 구원받음과 같은 신앙의 표상들은 우리 믿음의 목표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이 신앙의 표상들을 참 열심히 가르쳐왔습니다. 소중한 열매도 많이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 신앙의 목표이자 도달할 지점입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이 전했듯 우리의 목표가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로마서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숙제는 그 목표를 향해 우리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목표에 우리는 어떤 길로, 누구와 그리고 어떻게 도달할지에 대해 우리는 숙고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신앙이 잃어버렸던 것은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슬픈 이들의 눈물을 모른채하지 못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잔치가 시작되다
십자가라는 목표는 분명했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이 여전히 안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안개는 완전히 물러났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분명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혼인 잔치의 일꾼들에게 부탁합니다. 7절과 8절입니다.

7    "물 항아리들을 물로 채우세요." 그들이 물을 항아리마다 채웠다. 8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제 떠서 잔치 책임자에게 가져다주세요." (새한글 성경)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일꾼들은 항아리(약 40L) 여섯 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 잔치 책임자에게 갖다줍니다. 잔치 책임자 또한 신랑과 신부만큼이나 망연자실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총지휘를 맡은 이 행사가 파국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갖고 온 이 항아리에 이전보다 훨씬 품질 좋은 포도주가 담겨 있었습니다. 잔치 맡은 이는 놀라며 주최자인 신랑을 불러 말하지요. 보통 질이 좋은 포도주를 처음에 내오고 시간이 지나면 품질 나쁜 술을 내오는 게 일반이거늘 어째서 이 집은 그 반대로 한단 말인가요?! 진심으로 놀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영문을 모르기는 신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을 목도한 이는 오직 일꾼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혼인 잔치의 연회장은 품질 좋은 상등품 포도주의 향기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흥은 다시 돋아났습니다. 멈출 뻔했던 잔치가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망가질 뻔한 잔치가 다시 기쁨의 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포도주의 성분이 변해서가 아닙니다. 잔치의 성분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 그들의 부모, 잔치를 돕는 일꾼들의 마음 모두가 두려움과 수치, 슬픔과 낙담에서 기쁨과 환희로 변하였기에 잔치는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재개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주님의 첫 번째 표징이라고 정리합니다. 표징이란 주님이 정년 누구이신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장면 또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이신 기적은 주님이 누구인지 세상에 밝히 보이신 사건이 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기 위함은 아니겠지요. 수치 당하는 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기려고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 드러난 첫 번째 표징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마지막 11절에서 제자들이 이 표징을 따라 주님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이 포도주가 된 화학적 변화를 믿은 것이 아니겠지요.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 곧 슬픔 당한 이들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며 자신들의 길 또한 여기에 있음을 믿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버려두지 않는 길 말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 신앙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은 우리에게 여전히 미답입니다. 주님은 그 미답의 길을 수치 당하는 이들과 함께하시기로 마음먹으시고 십자가로 향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세상은 실패와 실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절망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시시덕거리며 조롱합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불행한 사건의 마지막은 언제나 회복적 정의여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을 마치기 전에 일부러 다루지 않았던 오늘 본문의 첫 단어를 보겠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는 '사흘째 되는 날'이라는 명사구로 시작합니다. 사흘째란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주님의 부활의 시간입니다. 무덤이라는 어둠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된 바로 그때가 사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살펴본 가나의 혼인 잔치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거대한 복선인 셈입니다. 슬픔에 빠진 이들이 모두 기쁨으로 변하는 바로 그 부활의 기쁨 말입니다. 이 잔치는 잠시 중단될 뻔했으나 어머니 마리아의 긍휼한 마음, 일꾼들의 순종, 그리고 주님의 말씀하셨기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버려두지 않으시는 주님을 따를 때 우리 또한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험악한 시대입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을 버려두지 맙시다. 어머니 마리아의 따듯함을 갖춥시다. 즐거운 부활의 잔치에 서로를 초대하여 기쁨으로 누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