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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실패한 신념의 사람들에게 (눅 13:1-5), 사순절 셋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3. 23.

신념이 된 분노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1세기 갈릴리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녹록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그는 명목상 유대의 왕이었으나 유대 전역을 다스렸던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과 달리 유대 땅 가운데 4분의 1 규모의 갈릴리 지방만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성경의 용어로는 분봉왕이라고 합니다. 그의 통치가 이처럼 제한적인 이유는 당시 유다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의 왕이었으나 로마 황제의 신하였을 뿐입니다. 당연히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로마의 각종 요구를 들어야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많은 세금을 징수했고, 강도 높은 강제 노동을 백성들에게 강제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습니다.

정치 경제 상황만큼이나 갈릴리 사람들을 괴롭게 했던 것은 사회 계층 간의 불평등이었습니다. 상류층으로 분류된 헤롯 왕가의 사람들, 귀족들,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로마와 결탁했고 그 혜택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상류계급 사람들은 갈릴리 땅의 하층민들, 주로 소작농, 일용직 노동자, 자기 배가 없는 어부, 과부, 고아, 그리고 죄인들을 가르고 나누어 차별하고 무엇보다 이들을 하대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면서 누구는 로마의 권세 아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누구는 이중과세는 물론 종교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으니, 갈릴리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하루하루 메말라갔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갈릴리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분노입니다. 우리들의 왕이라 자처하면서 로마 제국의 앞잡이 노릇하고 있는 저 헤롯 일가에 대해서, 언제나 우리를 죄인 취급하는 저 성전의 귀족들을 향해서, 말씀으로 위로와 희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으로 죄인이라 낙인찍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그리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언제라도 핍박을 가하는 저 총독 빌라도를 향해서 사람들은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분노에는 정당함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정치 경제적 압박, 사회적 불평등, 종교적 차별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이유를 갖춘 분노는 이내 신념이 됩니다. 그리고 신념이 된 분노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 바로 두 종류의 사람들을 찾는 일입니다. 

첫 번째로 찾는 이들은 분노할 대상입니다. 주로 로마와 결탁한 유대의 귀족, 평범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유대의 총독이며 로마의 장군 본디오 빌라도가 그 타깃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일부는 과격 무장 단체를 조직해 테러 행위와 같은 무력 저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강력한 로마 군대에 의해 제압당했지만 말입니다. 한 번쯤 들어본 '바라바'라고 하는 이름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역시 무장 단체 소속으로 로마 정부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분노가 신념이 된 사람들이 찾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분노에 동의해 줄 사람들입니다. 강력한 신념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신념이 정당함을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자기 신념에 반대하거나 동의하기를 주저한다면 되려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나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너도 그들 편이라고 매도당하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이따금 지나치게 신념적인 사람들에게 불유쾌한 경험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누가복음 13장 1절에서 5절 말씀 안에서 주님은 신념이 된 분노와 마주하십니다. 주님은 거대한 분노를 보셨고, 당신도 이 분노에 참여하라는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십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
13장 1절입니다. 

1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사역과 치유 사역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때입니다. 유대의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의 사람들을 보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몇몇 사람들이 와서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을 주님께 전했습니다. 짧은 문장으로 되어있지만,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

갈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성전을 찾았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제사장에게 인도한 후 제사 집전에 참여하려던 순간, 그 거룩한 성전에 로마의 병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이들은 빌라도의 명령을 받은 군대였습니다. 군인들이 제사를 준비 중이던 갈릴리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칼에 몸이 찔리고 잘려 흘러내린 피를 사람들이 준비한 제물의 피에 섞어버렸습니다. 

이 패륜적인 사건 소식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도대체 어디까지 악할 수 있단 말인가? 로마의 군대는 인간이길 포기했단 말인가! 빌라도는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고 이런 무모한 짓을 허락하는가! 로마를 향한, 살육을 저지른 군인들을 향한, 그리고 빌라도를 향한 분노가 치솟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말을 전하러 온 이들과 이 말을 전해 들은 주님 곁에 선 사람들 모두 예수님의 입만 바라보았습니다. 거대한 악을 향한 적개심 가득한 말씀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가자, 성전으로! 가서 빌라도를 끌어내자! 이 죗값을 그의 손에 묻도록 하자! 라고 하셨으면 모여있는 모든 사람이 함성을 외치며 예루살렘으로 직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의 기대와 너무나 다른, 또한 우리의 기대와도 어긋난 말씀을 하십니다. 2절과 3절입니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 가공할 폭력에 대한 마지막 인준은 주님이 끄덕임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들의 분노는 정당하다는 말씀, 이것은 악이 맞다는 인정, 사람들의 기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엉뚱한 말씀, 성전에서 비극적인 죽임을 당한 그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커서 죽었겠느냐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그리고 그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말씀이 이어집니다.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 또한 모두 그렇게 비극적으로 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정당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신들의 분노가 예수님으로부터 부정당했습니다. 나아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과 같이 비참히 죽게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 곁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달래거나 비유의 비밀을 풀어 설명해 주시기는커녕 이번에는 더 복잡한 신학적 말씀을 던지시며 충격을 배가시키십니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는데, 이들 또한 죄가 많고 또 커서 그런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이들처럼 무의미하게 죽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씀입니다.

소재는 다르지만 맥락은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겠지요. 

아니, 주님,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가장 안전해야할 성전에서 죽었습니다. 불의한 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됐습니다. 분노를 터뜨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회개라니 그게 무슨 한가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저들과 같이 죽게 된다는 말씀은 또 무엇입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의 항변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민족에게 악 그 자체입니다. 오늘 기록된 사건이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선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뢰할만한 역사 기록들에 의하면 빌라도는 성전 유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유대 민족주의자들을 처단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특수한 본문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이해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본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은 정의에 관한 우리의 보편적 가치관과 충돌합니다. 의로운 분노를 마음에 품고 불의에 항거해야 함이 주님의 제자도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본회퍼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나찌의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했다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리스도인입니다. 암살이라는 비윤리적 행동과 불의를 막기 위한 스스로를 투신한 순교의 정신은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런데 본회퍼를 함부로 전유하는 이들은 암살과 순교를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으로 엮어버립니다. 매주 광화문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며 악한 말을 쏟아내는, 이른바 목사라 자처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본회퍼라 참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요. 본회퍼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한 번도 암살이라는 그의 선택을 정당하다고, 의로운 선택이니 나를 지지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존재의 나약함에 대해 괴로워했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 분투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불의를 향한 분노와 그 분노의 표출에 관한 정당함이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본회퍼는 자기 삶의 마지막 장면들을 통해 드러내 보였습니다.


분노에서 돌이켜
다시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와 봅시다. 정당하리라 믿었던 분노가 부정당한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메시지는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구원과 관련한 교리적 차원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헬라어 표현은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로 돌이키다, 방향을 바꾸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너희들이 회개, 곧 돌이키지 않는다면, 똑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으로부터 돌이키라 말씀하고 계십니까?

분노, 신념이 되어버린 분노로부터 돌이키라 말씀하십니다. 분노가 너희를 잠식하기 전에 돌이키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분노에 삼켜 너희 또한 망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새겨들으십시오. 빌라도는 너무도 분명한 악입니다. 13장 1절의 사건이 실제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이건 아니건, 빌라도는 충분히 이러한 일을 벌이고도 남을 인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빌라도가 악인인 것과 내가 의인인 것은 아무 관계가 없음을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의로움은 누군가를 향한 미움으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이 악인이기 때문에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누군가의 악한 모습에 집착하며 분노를 정당화하고 신념화하여 미움을 당연시하고 폭력을 합리화할 때 세상은 지옥으로 바뀝니다. 분노를 강하게 표현할수록 자기 의가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노가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될 때 언제나 폭력으로 변질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주님, 그렇다면 참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악이 저렇게 버젓이 준동하고 있는데 저희는 바라만 보고 있으라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분노 자체를 무시하거나 없는 셈 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불의 앞에 누구보다 분노하셨던 분입니다. 오만한 바리새 사람들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쏟아내셨고, 부패한 성전을 향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 예언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분노 안에는 '자기의'로 똘똘 뭉친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불의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불의의 중심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몇몇 사람이 주님께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참혹히 죽었다고 주님께 말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만약 주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시면 주님도 이처럼 끔찍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 곁에 선 몇몇은 어쩌면 사랑하는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예루살렘 바깥으로, 성전에서 먼 곳으로 주님을 도피시키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난주의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 13장의 마지막 단락 말입니다. 33절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33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분노에서 돌이키라는 말씀이 불의 앞에 눈 감으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불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중심으로 들어가기를 멈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살리기 위해 죽으러 가신 분입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을 지니신 그 분께서 어찌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살리기 위해서 불의와 폭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신념화되고 종교화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신념화된 분노에서 돌이켜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갚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왜 이토록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고 지탄받겠습니까? 의로움을 가장한 분노로 자기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신념화된 분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칼을 들고 혁명하길 바랐고, 하나님 나라에서 한몫 단단히 챙기기를 욕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신념은 십자가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그들의 신념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미움이 아니라 긍휼로, 저주가 아니라 축복으로 채워졌습니다. 하여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을 따라 불의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들 또한 주님을 닮아 죽음으로 살림의 길을 갔습니다. 그들은 칼과 창과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혁명한 사람들이었고, 그 사랑은 인류의 역사를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불의 앞에 의로운 분노하되, 분노에 잠식되지 마십시오. 매일 같이 목도하는 저 악한 사람들이 우리의 의로움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십시오.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당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의 말을 쏟아낼 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들이 돌이키기를 위해 기도하겠소'라는 마음으로 삽시다. 저주에 맞서 축복으로 기도할 때, 세상이 우리를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