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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있지만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눅 15:1~3, 11b~32)

by 청파비둘기 2025. 3. 30.

있지만 없는 사람들
예수님 곁에는 언제나 죄인들, 세리들, 당대의 거리끼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주님은 멸시와 천대에 익숙한 사람들을 넉넉하게 받아들이셨고 그들과 먹고 이야기 나누시고 즐거워하길 마다치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오늘 말씀을 시작하며 이른바 의롭다 일컫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렸다고 말합니다. 죄인들과 가까이하는 저 예수라는 자가 무엇보다 싫었지만, 그들의 심사를 더욱 꼬이게 만든 것은 죄인들의 태도였습니다. 죄인들이란 자고로 자기 죄를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얼굴에 보이며 무엇보다 없는 듯 지내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들이 주님만 만나면 얼굴에 꽃이 피고 웃음이 가득하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죄인들을 보거나 만지는 것만으로도 죄가 옮겨붙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나가도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했습니다. 그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를 부정하다 여기는 죄인들, 피부병 걸린 이들, 세리들, 고아와 과부들은 의로운 이들의 눈을 피해 다녔습니다. 자기 존재를 들키기라도 하면 자칫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 곁에 저 하찮은 이들, 있어도 없는 듯 살아야 하는 저 부정한 이들은 주님 옆에 서서 자기 존재를 한껏 드러내며 살았습니다. 의롭다고 하는 이들은 어쩌면 예수의 얼굴보다 저 죄인의 얼굴이 더 꼴 보기 싫었습니다.

멕시코의 시인이자 비평가이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옥타비오 파스는 그의 책 <멕시코의 세 얼굴: 고독의 미로>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합니다. 언젠가 파스가 집에 돌아왔는데, 주방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파스는 "아무도 없나요?"라고 소리쳤는데, 안쪽에 있던 가사 노동자가 "네, 아무도 없어요."라고 답해 무척 당혹스러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안에 누군가 있냐고 물었는데, 안에 있던 이가 아무도 없다는 대답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대답했다는 것은 분명 사람이 존재한다는 뜻인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없는 셈 쳤으니 말입니다. 그 가사 노동자는 자기가 있음에도 자신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노동자는 자신이 이 집안, 곧 파스의 가족 구성원이 아니기에 인간으로서는 존재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는 그리 별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으로는 존재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아니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치 유대 땅의 부정하다 칭함 받은 이들이 의로운 이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듯 말입니다. 그러나 파스의 이야기가 슬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이 자신이 사회 구성 바깥에 있는 존재로 여김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혹은 숙명처럼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바꾸어 말해 처지와 상황 때문에, 혹은 그가 과거에 지었던 과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없는 취급 당해야 하는 이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서신 독서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후서 5장 17절,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옛 가치들은 물러갑니다.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는 무정한 세상은 죄있다 칭한 이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바깥으로 내몬다 할지라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사회적 소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실패와 슬픔
오늘은 우리에게 익숙한 비유 말씀 앞에 섰습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 일컫는, 정확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지요. 그 몫을 갖고 먼 지방으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화려했던 삶이 급전직하합니다. 아들은 크게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큰형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이야기가 탕자의 비유 혹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대한 개요입니다.

막내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물려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먼 타국에서 사업을 하려 했거나 투자를 통해 재산을 불려볼 요량이었겠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막내아들의 유산 요구를 버릇없고 배은망덕한 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12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12b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 자기 재산을 분할해 미리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산을 요구한 막내아들에게뿐만 아니라, 형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습니다. 물론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상속법 안에 재산권과 사용권이라는 복잡한 법체계가 있지만, 오늘 비유는 장르상 이야기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유산 상속 과정이 가족 간의 합의에 의한 정당한 절차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다는 큰 형의 불평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다시 막내 아들에게 집중해 봅시다. 이 아들은 갑자기 얻은 큰돈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않았던 모양입니다. 두둑해진 지갑은 그의 마음을 허물어뜨렸습니다. 방탕하게 보냈고 수중의 돈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급기야 큰 흉년이 들어 아주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크레딧 카드는 한도 초과 메시지를 내보이며 결제를 거부했고 그는 편의점에서 빵 한 조각 사 먹을 형편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점차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천신만고 끝에 일거리 하나를 얻었는데, 들에 나가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인 그에게 돼지를 치는 일은 굴욕입니다. 돼지는 율법에 의해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치욕을 억누르고 일을 했지만, 주린 배를 채울 순 없었습니다. 하여 돼지가 먹는 여물이라도 먹어볼까 하는 극도의 상황에 내몰립니다. 재산을 모두 잃고 허기에 쫓기는 신세라는 측면에서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었고, 유대인으로 부정한 가축인 돼지 치는 일을 함으로 종교적 존엄성마저 잃었으며, 돼지의 먹이를 먹고 싶다는 욕구 앞에 그의 인간성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아들은 돼지우리 안에서 통곡합니다. 풍족했던 아버지의 품이 떠올라 서글픔은 배가 됩니다. 그제야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습니다. 그는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이렇게 다짐합니다. 19절입니다.

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대면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21절입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은 아버지의 아들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 하여 아들이 아닌 품꾼 가운데 하나로 여겨달라는 간청입니다. 나는 죄인이기에 마땅히 아버지의 가족 구성원 바깥에 있음이 옳다는 슬픈 토로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있지만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없는 사람입니다. 아들은 스스로 소외되기로 자신을 향해 낙인을 찍었습니다. 


형의 분노와 정의
이제 큰형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큰형은 동생의 난데없는 선언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만, 사용권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집안 살림을 꾸려 갔습니다. 그런데 있지만 없는 셈 쳤던 동생이 갑자기 돌아왔습니다. 남루한 행색을 보니 아버지 재산을 모두 날린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환대였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니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하여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형은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28절에서 30절입니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29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형은 지금 억울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자기 헌신이 부정당했기 때문입니다. 30절에서 형은 동생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이 아들이 오니까"라는 말로 동생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둡니다. 형에게 동생은 눈앞에 있으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창녀들과 어울려 재산을 삼켜 버렸다는 말도 순전히 형의 추측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 함께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형은 왜 화가 났을까요?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혹은 성대한 잔치를 벌여서? 그렇다면 형이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형이 납득할 만한 상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동생이 자기 입으로 말한 것 그대로입니다. 그를 아들이 아니라 품꾼 가운데 하나, 즉 종으로 여기는 것, 그의 존재는 인정하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바꾸어 말해 아버지의 적절하고 합리적인 징계, 바로 그것을 바랐습니다. 가장으로서 자식의 실책을 엄히 문책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그것이 이 형에게는 정의이고 공의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둘째 아들을 없는 셈 치면 내가 그때야 비로소 이 집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동생은 자기가 저지른 부끄러운 과오와 죄책감으로 스스로 낙인찍어 없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종이 되어서라도 일단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형은 마땅한 징계로 그의 권리를 박탈하고 존재는 하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정지시킴으로 정의를 구현하려 했습니다. 형과 동생의 비유는 놀랍도록 우리 사회의 어두움과 흡사합니다. 

슬프게도 우리 사회는 서로를 잘 신뢰하지 않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진정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상대방의 진정성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특히 사과에 대해, 뉘우침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상하리만큼 냉정합니다. 용서를 구함에도 용서를 의심받아 괴로움 중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유명인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어두움이 큽니다.  


공존을 향한 아버지의 뜻
이제 이 비유의 중심에 서 있는 아버지를 봅시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잃고 처량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의 존엄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자신은 아들의 자격이 없으니 나를 없는 셈 치고 목숨만 부지하게 해달라는 간청에 아버지는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며 신발을 신게 합니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이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세상에 공표함으로 너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24절입니다.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아버지의 모든 행동은 한 가지로 수렴됩니다. 너는 없지 않고 있는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자초지종을 따져 묻지 않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기뻐합니다. 자기 소외라는 그늘로 숨고자 하는 아들을 끌어내어 이름을 부르고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 줍니다. 아들은 더는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에게 하는 아버지의 말씀도 보시기 바랍니다. 없어야 마땅할 동생의 회복된 모습에 불쾌와 부당함을 느낀 형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너의 있음은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란 약속입니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니, 그것을 기뻐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너는 나와 함께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두 형제를 평가하거나 훈계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바는 두 형제 모두 없지 않고 있는 존재임을 서로가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두 형제의 공존과 화해입니다. 아버지는 두 형제가 나의 집 안에서 서로 가족임을 확인하고 공존하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이 유명한 비유는 방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는 두 형제의 모습이 우리 안에 뒤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제멋대로 굴기를 반복합니다. 부끄럽기 그지없어 하나님 앞에 우물쭈물 서 있기도 합니다. 또 한 편으로 우리는 마치 형과 같이 굴 때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처지는 헤아리지 않은 채 판단하고 저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의롭다고 생각할 때가 우리 안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소외의 그늘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존엄을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언제나 받아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타자들과 공존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가 마뜩잖을 수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한 이들의 얼굴 보기를 불쾌하게 여겼던 바리새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자기 의로움으로 철갑을 두른 오늘 비유의 큰형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영연방 최고 랍비이며 금세기에 가장 존경 받았던 랍비 조너선 색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 동료 인간을 공경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말을 들어 달라고 구할 수 없다."(생명을 택하는 믿음, 조너선 색스, 한국기독교연구소, 2024, 184p).

우리가 동료 인간을 용서하고 그들의 소외를 끊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소외 속에 우리의 이름을 불러달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여 여러분,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동생과 공존하기를 노력합시다. 우리에겐 모두 동생이 있습니다. 나와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마땅한 미움의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이유를 찾으려 노력합시다. 우리 아버지의 집 안에서 서로 화해하고 함께 살기를 위해 노력할 때 우리가 선 땅이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