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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눅 19:28-41), 종려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4. 13.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다
누가복음서의 전체 서사를 펼쳐놓고 보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의 여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세례받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곳저곳을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손을 잡아 주셨으며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갈릴리를 두루 다니신 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직전 주님의 마지막 거처는 바로 죄인 취급 받던 삭개오의 집이었습니다. 주님은 부끄러워 자기 얼굴을 가린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가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씀하셨습니다(눅 19:9). 이후로 주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무덤에 안치되기까지 거처가 없으셨고 한 번도 평안히 눕지 못하셨습니다. 주님에게 마지막 위로와 힘을 공급한 집과 그 집의 주인이 삭개오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삭개오 집을 떠나 주님은 예루살렘 인근에 당도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제자 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맞은쪽 마을에 가면 사람을 태워본 적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있는데 나를 위해 그 나귀를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영문 모르는 주인에게는 주님께서 그 나귀가 필요하다고 전하라 말씀하십니다. 나귀 주인은 선선히 나귀를 내어주고 주님은 그 나귀에 올라타신 후 그제야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다소 연극적으로 보이는 이 상황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말씀을 하나하나 성취하기 위해 의도된 행동이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지자였던 스가랴의 말씀 성취를 나타냅니다. 스가랴 9장 9절 말씀입니다. 

슥9: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어린 나귀는 주님의 겸손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바로 그 메시아임을 세상에 천명하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보고 스가려 예언자의 이 말씀이 오늘에야 비로소 성취됨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억압의 시대가 끝나고 해방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그 감격과 격정적 기쁨은 환호와 함성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올리브 산에서 내려오는 주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38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우리가 오늘 시편 찬송으로 함께 교독한 바로 그 말씀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를 들고 목청이 터져라 환호하며 하늘에는 평화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이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문학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에는 평화,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는 찬양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우리 귀에 익은 이 찬양은 바로 주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때, 하늘의 천사들이 한밤중에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내리신 말씀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과 14절입니다.

1:13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14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하늘의 천사와 더불어 나타난 하늘의 군대가 목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며 땅의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나심은 하나님과 땅 모두에게 기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셨을 때의 찬양과 오늘 예루살렘 입성 후 사람들의 함성 안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하늘에는 영광이라는 말은 있지만, 땅의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말이 오늘의 찬양에는 삭제됩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보며 사람들은 드디어 메시아가 우리 곁에 당도했다고 믿었습니다. 해방과 구원이 임함을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그렇다면 평화와 영광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의 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땅의 평화라는 선언은 삭제하고 하늘의 평화, 높은 곳에서 영광만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등장하신 주님을 보고 우리의 땅이 완전히 바뀌게 되리라 믿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의 평화에 대한 간구와 바람이 더는 필요 없을 정도로 온 세상은 일거에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복되리라 강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은 주님을 임금님, 곧 세상의 통치자, 하늘의 권세를 가진 강력한 지도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기들 눈앞에 새로운 왕이 오셨으니, 땅의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요.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왕이시니 하늘의 평화만을 노래해도 충분하다는 땅의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해방과 평화를 얼마나 오래토록 기다렸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땅의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대목에서 우리는 멀리에서부터 드리우는 어떤 먹구름을 보게 됩니다.


환호에서 저주로
그 이유는 이 벅찬 감동과 열정 넘치는 환호가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야유와 핍박, 그리고 저주로 뒤바뀜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입구에서 환호와 찬송을 드리던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선 주님을 향해서는 저주하고 힐난했다는 사실은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신약 성서학에서도 이 문제는 난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집단 감정의 문제인가? 아니면 예루살렘 입성 당시의 사람들과 재판정에서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들인가? 여러 해석의 시도가 있으나 명쾌하게 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저는 한 명의 성서 해석자로서 주님의 이름을 연호하고 칭송하던 오늘 본문의 사람들과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분노의 외침을 내던지던 사람들이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분명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그리고 어째서 그들의 환호가 저주로 바뀌었는가? 왜 바뀌었는가?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전제가 있습니다. 환호에서 저주로 자기 말의 방향을 바꾼 여기 모인 사람들, 평범한 민중들을 비겁하다고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조변석개를 대중의 어리석음으로 치환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하늘의 평화를 노래하고 높은 곳에 영광이라 외쳤던 이들은 분명 진심이었고 믿음의 고백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여기 모인 유대의 민중들이 평생 겪었던 고난과 억압의 깊이입니다. 우리가 몇 차례 살펴보았듯 갈릴리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헤롯 왕가에 빌붙은 귀족들, 성전 관리자들, 회당의 지도자들은 나름의 살아갈 방법이 있었고 또한 부유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평범한 유대의 민중은 그러하질 못했습니다. 부모가 가난하면 자식도 그러했습니다. 질병에 걸려도 치료받기가 어려웠습니다. 몸에 드러난 상처는 율법에 따라 죄로 분류되었고 마땅한 간호와 치료를 받지 못하니 상처는 덧나기를 반복했고, 사람들은 죄인이 되어버린 이들을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가난과 죄의 굴레는 이스라엘의 작은 사람들에게는 지독히도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질고와 절망의 깊이를 우리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한 번도 귀담아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통제하고 세금을 부과하고 율법으로 죄인이라 칭하기는 식은 죽 먹기로 하더니,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이런 대우 받는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누구도 자기 하소연을 진심으로 들어준 적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죄인이라 일컫는 이들과 먹고 마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 없던 자들, 목소리를 빼앗겼던 자들, 인격적 대우를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이들은 주님을 만나 비로소 인간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이들은 주님을 만나고서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찬양하며 목 놓아 부르짖은 오늘의 함성은 단순한 찬양이 아닙니다. 해방의 외침이고 살아있다는 선언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소리 지른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곧 유대의 중심이며 권력의 핵심이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감히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눈치보고 숨죽이며 갓길로 경우 다녀야 했던 도시입니다. 그런 보잘것 없는 민중들이 메시아 되신 주님과 함께 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찮고 지저분한 이들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사람들은 불편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39절과 40절을 보십시오. 이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 바리새 사람 몇몇이 조용히 좀 하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주님은 아시는 것이지요. 이들이 얼마나 억압당하며 살아왔는지를 말입니다. 자기 목소리를 한 번도 내본 적 없음을 말입니다. 하여 비명에 가까운 이들의 외침을 두고 보라 준엄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을 잠잠케하면 돌들이 대신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작은 희망이 꺾일 때
하여 우리는 재차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 민중의 폭발시킨 해방과 구원의 기쁨과 환희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저주로 바뀌어 버렸는가, 고난과 억압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기에 자기들을 살리기 위해 온 구원자를 되레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는 일이 가능한가에 대해 말입니다. 

제가 일전에 소개해 드린 사회 인류학자 조은 교수의 <사당동 더하기25>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빈민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그들 곁에서 연구하다 보면 이따금 여러 형태로 그들을 도울 때가 있다고 합니다. 빚의 일부를 탕감해 주거나 아이들 교육비를 지원하거나 두어 달 치 월세를 내주는 때가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일회적 도움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기에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도움을 주겠다고도 약속하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선 격렬하게 거부한다고 합니다. 그저 하루치 도움이 달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조은 교수는 이것이 참으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내 깨닫게 됩니다. 삶의 위기라는 것에도 계층이 있구나. 가령 한 중산층 가장이 갑자기 직장을 잃었다고 칩시다.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자산과 실업급여가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거나 자격증 시험을 응시할 수 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지요. 그러나 빈곤의 사람들에겐 불가능합니다. 만약 오늘 하루 건설 현장 일용직을 놓치기라도 하면, 당일과 그다음 날 그들은 종일 굶어야 합니다. 극심한 어려움 속에 사는 이들에게 삶을 바꿀 희망은 오히려 공포요 두려움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겐 한두 달의 고난이겠지만, 이들에겐 자칫 평생을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절이 깊을수록 희망은 두려운 법임을 교수는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사람들이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해 주겠다는 메시아를 함부로 따랐다가 자신은 물론 자기 가족들마저 목숨을 부지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좌절의 나날을 살았던 유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메시아라는 희망은 그 자체로 위험한 시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를 메시아라 고백하며 환호의 찬송을 부른 것은 이들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과 가족 전 생애를 건 도전이었습니다. 이분, 예수님이라면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주님이라면 우리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지 않으시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외친 것입니다.


울분을 이해하시는 주님의 눈물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가셨습니다. 세상의 왕으로 승리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가장 절망스러운 장소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느꼈을 배신감과 억울함이 얼마나 컸을지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하여 심판대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진 그 매정한 말, '저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은 악의에 가득 차 있다기보다는 울분에 가깝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을 꺼뜨린 당신에 대한 울분 말입니다.

여러분, 심판대에 서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오늘의 이 사람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한심하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사람이 되어서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괴로워하셨을까요? 아니요. 저는 주님께서 미안하고 괴롭고 아프셨다고 믿습니다. 저들의 억울함과 슬픔, 압도적인 허무감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저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너희들이 원하는 빵과 돈을 주고 싶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으니 나 또한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는 심경을 우리는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모욕하고 힐난하는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23:34b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저주가 악의가 아님, 저들이 아직 모르고 있음을,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너희의 하루가 아니라 생애 전체이자 창조 세계 전부를 살리는 일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임을 아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자기를 배반한 사람들을 징계하지 않으시고 다시 찾으신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시기에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 외친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41절에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환호와 영광을 한 몸에 받으신 주님께서 우셨습니다. 우리라면 아마 한껏 고양된 마음으로 어깨가 으쓱했을 텐데 주님은 우셨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살펴본 바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의 가련한 마음을 보았기에, 이들의 기대가 무참히 깨질 것이기에 그리고 그 기대는 깨져야 하기에 주님은 우셨습니다. 자기를 향한 공격에 화내시거나 억울해하지 않으시고 우셨습니다. 44절입니다. 

44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이 흘리신 눈물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늘 그러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우리는 자주 오해합니다. 주님에게 우리의 엉뚱한 욕망을 투영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탓하기보다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우십니다. 우리 안에 우리조차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어둠과 깊은 슬픔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주님 곁의 사람들이 그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부활 이후였습니다. 눈물의 의미를 깨달은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자기들의 선생과 같이 목숨을 던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울분에 쌓여 주님께 소리 질렀던 이들은 교회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되어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삶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입성 간에 주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청년 여러분, 종려주일은 예루살렘 성문에서 터져나온 환호와 심판대의 저주가 공존하는 그야말로 기이한 주일입니다. 그렇기에 종려주일은 우리의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은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다가도 주님을 모르는 체하길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때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우시는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 눈물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주님의 선한 일꾼이자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