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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숨을 불어넣으시고 (20:19-31)

by 청파비둘기 2025. 4. 27.

기쁨의 절기
부활절 둘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제 교회력 절기는 부활절기를 따라갑니다. 부활절기의 다른 이름은 기쁨의 절기입니다. 사순절이 고난과 침묵의 절기였다면, 부활은 기쁨과 희망의 절기입니다. 부활 절기는 성령강림절인 6월 8일 주일까지 약 50일간 이어지는 데, 이 50일 동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을 품고 그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은 교회를 자라나게 하는 건강한 거름이 됩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을 기쁨으로 전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앞으로 이어지는 총 일곱 주간의 부활절기의 첫 번째 성서일과 독서는 평소와 같이 구약 본문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읽습니다. 부활 절기에 사도행전을 읽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오르셨고, 이제 그 교회가 주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청년부도 부활절기 동안 사도행전을 복음서와 함께 말씀의 중앙에 놓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 이야기를 따라가며 부활의 기쁨이 어떻게 뿌리 내렸는지,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서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살피겠습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사도행전의 교회 이야기도 결국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성찰할 교회의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 곧 주님의 사도들입니다. 


재판정에 가득한 용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과 복음서 말씀은 매우 재미있게 배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은 재판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주님께서 당하셨던 심판정과 비슷한 구도에서 시작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재판정에서 대제사장 앞에 섰던 주님과 같이 사도들 또한 공의회 재판정에 섰습니다. 주님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심문을 시작합니다. 28절입니다. 

행 5:28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심문의 첫 문장을 살펴보면 대략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전하고 가르치며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공의회에 의해 금지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공의회의 지시를 어기고 거역했습니다. 바로 이 일로 기소되어 사도들이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은 우리가 읽은 본문 직전에도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미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었는데 성령의 놀라운 도우심으로 감옥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탈출 아닌 탈출을 한 사도들은 비밀 장소로 몸을 숨기지 아니하고 다시 성전으로 가서 주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정말 못 말리는 열정과 용기입니다. 당연하게도 사도들은 또다시 체포되었고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공의회는 어째서 우리가 결의하여 금한 결정, 즉 주님의 이름을 전하고 부활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여기에 더해 공의회는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공의회에 씌우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묘사들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5장 28절에서 공의회가 말하는 그 이름, 그 사람의 피 모두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입니다. 공의회는 예수라는 이름을 말할 용기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마치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볼드모트처럼, 예수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한 채 그저 '그 이름' '그 사람'이라는 지시 대명사로 돌려 말하고 있습니다. 공의회 스스로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의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금한 이유는, 그 이름 곧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되면 전파될수록 자기들의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공의회가 모든 권력 수단을 동원하여 사도들을 제압하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당당하게 맞서며 이렇게 말합니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참으로 멋지지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을 바라본다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 곧 공의회의 경고에 굴복해 그들의 질서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와 법을 세상에 선포하는 일이 더 귀한 일임을 사도들은 용감하게 증언했습니다. 공의회 재판정의 대제사장은 자신의 높은 신분과 강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조차 말하지 못했지만, 사도들은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게 예수의 이름을 말하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용기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락방에 가득한 두려움
이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 본문으로 넘어와 봅시다. 

19a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단어는 단연 '무서워서' 입니다. 지난 주 함께 나눴던 말씀을 기억해 봅시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문이 열려있음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제자들은 달려와 무덤이 빈 것을 확인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직 마리아만이 남아 무덤 안에서 울고 있었고,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두 천사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고 어서 형제들에게 가 나의 부활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장 17절을 보고 가겠습니다. 

17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전한 최초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상황은 이 마리아가 아직 제자들이 모여있는 집에 당도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왜일까요? 주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라졌다는 두려움, 주님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주님의 마지막마저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유대와 로마의 군대가 들이닥쳐 당장 주님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 어쩌지하는 공포, 우리도 주님의 시신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데 괜한 화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복잡한 마음이 뒤섞여 문을 닫아걸어 잠그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도행전과 복음서는 이렇게 상반된 제자들의 두 모습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재판정은 용기로 가득합니다. 반면 복음서의 다락방은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재판정과 다락방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었기에 같은 제자들이 이토록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까요? 게다가 재판정과 다락방 사이의 시간은 불과 몇 개월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제자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어떤 변화를 겪었기에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곱씹으며 성찰해야 할 주제가 이것입니다. 사도행전 속 재판정의 사람들과 복음서 속 다락방의 사람들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가 말입니다. 


연결된 고통
물론 우리는 답을 알고 있지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맞는 말이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을 가리는 말입니다. 일주일 내내 고민하며 씨름하다가 최근 출간된 에세이 한 권을 읽으며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지난주에 출간된 작가 한강의 에세이였습니다. 저는 예약 구매를 해 두었기 때문에 일찍 받아 볼 수 있었습니다. 에세이에는 이미 여러 차례 보도되었고 전문도 공개되었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들, 몇 편의 에세이와 미발표 시, 그리고 일기 일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강의 글을 다시 천천히 읽으며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이미 읽었음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문장들이 있었습니다. 작가의 말입니다.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 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한강, <빛과 실>, 21-22, 문학과 지성사

작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면서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책을 출간하고 나서 더는 인터넷 검색창에 '학살'이라는 단어를 치지 않아도 됨이 참으로 다행이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독자들도 동일한 고통을 느꼈고, 작가는 독자들의 고통과 작가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했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찾아야 함이 글을 쓴 이의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작가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소년이 온다>와 그 다음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후의 그 소외를 적은 에세이에서 윤곽이 나타납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고통이 대체 무엇이었던가를, 『소년이 온다』를 쓰고나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도 함께 느꼈다고 말하는 바로 그 고통을. 그 생생한 고통은 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걸까? 설마, 그건 사랑인가?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사랑에 대한 다음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한강, <빛과 실>, 55, 문학과 지성사

작가는 작가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고통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작가와 독자가 고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과거와 현재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고통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서로의 고통이 연결될 때, 그렇게 '연결된 고통'에서 사랑이 나올 수 있겠다는 작가의 통찰은 제게 매우 깊은 성찰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여 오늘 우리가 읽은 20절의 말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너무나 유명한 그 말씀이 제가 완전히 새롭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절,

20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주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 곁에 당도하신 후, 평화를 빕니다. 후에 자기 두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 자국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주님이신 줄 깨닫고 기뻐합니다. 후에 도마라고 불리는 이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27절입니다.

27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는 주님의 옆구리에 자기 손가락을 넣어보고서야 주님을 믿고 마찬가지로 기뻐합니다. 제자들은 모두 주님이 보여주신 상처 자국을 보고 기뻐합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의심도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상처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느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과 의심과 공포는 주님의 상처를 감각함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여 우리가 흔히 주님 부활의 증거라 일컫는 주님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 자국은 부활의 증거라기 보다는 고통의 증거입니다. 이 고통 당하시고 고난 겪으신 명징한 증거들을 제자들이 온몸으로 감각하고 나서야 제자들은 자기 안에서 옛 자아가 깨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연결된 제자들, 그리고 우리
고난의 증거를 시각과 촉각으로 공감각 함으로 제자들의 고통과 주님의 고통은 연결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였고, 주님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허무를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연결된 고통의 공감각의 절정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완성됩니다. 20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십니다.

감각의 점층적 증가가 느껴지시는지요? 고난 당하신 주님의 상처를 눈으로 보는 시감각, 덧난 상처 자국을 손끝으로 만지는 촉감각에 이어 고난의 터널을 지나오신 그 숨결이 제자들의 몸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숨이 몸 안으로 들어옴은 감각의 완성입니다. 타자의 숨이 내 안으로 들어옴은 완전한 일치이며 이제 내가 내쉬는 숨은 나만의 숨이 아니라 그의 숨과 함께임을 의미합니다. 이제 제자들이 숨을 쉴 때 그들은 주님과 함께 숨을 쉬는 것입니다. 

비로소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고통이 완전히 연결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생명을 창조하셨던 창세기 말씀이 다시 재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듯, 주님의 숨이 들어간 제자들은 이제 새로운 창조의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던졌던 질문, 재판정의 사도들과 다락방의 제자들은 왜 달라졌는가, 같은 사람임에도 어째서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였는지, 전혀 다른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는지에 대해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을 보고, 만지고, 들이마셨기에 제자들은 주님의 고통과 고통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고통과 연결되어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고통을 홀로 지시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이 고통은 제자들과 연결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고통과 연결됨으로 세상의 고통과도 연결되었습니다. 세상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주님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고통과 연결되어 아파하셨음을 제자들도 이제 고스란히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음이 온몸으로 전달되어 오기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 증거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이 연결되니, 그 연결 안에서 사랑이 흘러 나온 것입니다. 산헤드린 재판장에서 당장이라도 자기들의 목숨을 도려낼 수 있는 대제사장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이 고통당함으로 고통당하신 주님의 고통이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고통과 연결되었던 그날의 변화가 없었다면 이들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복음을 증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도들 안에 연결된 주님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은 후에 바울에게 이어지고, 3세기 4세기의 교부들에게 이어졌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음은 주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고통당하셨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부활 신앙의 출발입니다.

사랑하는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상처를 보았고 그 상처를 만졌으며 주님의 숨결을 들이마신 자들입니다. 바꾸어 말해 우리도 주님의 고통과 연결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숨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용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한숨결을 내어 뱉은 여러분, 주님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연결시킨 여러분, 무정한 세상에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