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이야기
23살 선빈 씨는 손재주가 좋아서 그림도 잘 그리고 만들기도 잘하고 요리도 잘했습니다. 인쇄소를 운영하는 부모님을 곧잘 도왔던 선빈씨는 살갑고 다정한 딸이었습니다. 선빈 씨는 일찌감치 취업해서 부모님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좋아하던 빵 만들기 특기를 살려 빵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어린 나이에 부모님 취업에 성공한 선빈 씨를 주변에서 많이 칭찬했습니다. 부모님도 좋아하셨고요.
선빈 씨와 같은 또래의 23살 선호 씨도 성실하고 착했습니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고, 일하는 와중에도 언제나 책과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일이 좀 고되긴 하지만 시급이 높은 항구에서 일하며 부족한 등록금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또 선호 씨에겐 장애가 있는 큰 누나 한 분 계시는데, 누나를 누구보다 살뜰히 챙기는 든든한 동생이기도 했지요.
29살 보경 씨는 학자의 길을 준비중이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어려울 것 같은 나노공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진학을 준비 중이었지요. 역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파트 건설 현장에 나가 창호 공사를 했습니다. 보경 씨는 홀어머니와 동생을 건사하는 집안의 가장이기도 했습니다.
24살 용균 씨도 비슷합니다. 성품이 우직했고 힘든 일을 도맡아 했지요. 그 역시 부모님 부담을 덜어드리려, 또 제 꿈을 이루려 서둘러 취업했습니다. 용균 씨의 직장은 화력발전소였습니다.
19살 김 군, 아마도 여기 앉아 계신 분들보다 어린,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우리들의 동생 김 군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김 군은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의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가며 일했고 식사 시간조차 부족했던 그의 가방 안에는 삼각김밥과 컵라면이 들어 있었습니다.
23살 선빈 씨, 23살 선호 씨, 29살 보겸 씨, 24살 용균 씨 그리고 19살 김 군은 우리 또래의 친구이자 동생 언니와 오빠 형 누나였습니다. 이들의 부모들에겐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고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빈 씨, 선호 씨, 보겸 씨, 용균 씨, 그리고 김 군은 일하러 나간 그날을 끝으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모두 일터에서 죽었고 이들의 청춘은 그날로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또 다른 우리 또래의 선빈 씨, 선호 씨, 보겸 씨, 용균 씨, 김 군들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도 내일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리란 점입니다. 생이라는 것이 젊다고 귀하고 늙었다고 하찮은 것은 아니겠지만,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젊은 생명들이 이리 쉽게 꺾이고, 오늘도 내일도 꺾이고 있다면 그건 문제가 맞습니다.
이 젊은이들의 생을 누가 그리고 왜 앗아간 것일까? 기업인가? 이윤추구라는 욕망인가? 저는 기업과 자본을 악마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적으로 만드는 일은 가장 간편한 회피입니다. 기업은 필요하고 자본은 유용합니다. 그러나 효율과 이윤이라는 미명 아래 가장 작고 약한 이들을 위험으로 내모는 일은 악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 김훈은 산업재해에 대한 그의 칼럼에서 "산업재해와 사망 사고는 한국 기업의 불치의 풍토병으로 고착되었고 이윤의 미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 풍토병은 광범위하게 확산돼왔다." (한겨레신문 칼럼: 1명의 죽음은 가볍고 2명은 죽어야 무거운가)고 말합니다. 이윤이라는 달콤한 말이 정말로 어떤 신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저는 지울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을 벼랑끝으로 내모는 사회는 옳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본문에 우리 또래의 한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어떤 힘에 사로잡혀 삶의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여인의 삶에 다가가 보겠습니다.
돈을 벌어다 주는 귀신들린 여인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던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 환대를 경험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큰 위로를 얻은 바울과 실라는 선교 여정을 계속 이어 나갑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는 곳, 추정컨대 아마도 루디아가 평소 기도하던 강가의 기도처로 가는 길에 돈을 받고 점을 쳐주는 한 여인을 마주합니다. 오늘날에도 돈, 그러니까 복비를 받고 점을 쳐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꽤 큰 돈을 받는다지요. 21세기에도 이러한데 1세기에는 어떠했겠습니까? 돈을 받고 점을 쳐주는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남달랐습니다. 누가는 이 여인의 점치는 능력이 출중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6절의 하반절입니다.
16b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였다.
여인의 점괘가 얼마나 신통했는지 큰돈을 벌어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지역 내에 유명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점은 이 여인이 치는데, 돈은 주인이 가져갑니다. 게다가 '주인들'이라는 말은 이 여인의 주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뜻입니다. 주인 여럿이 이 여인 하나를 소유하고, 이 여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점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꽤나 조직적인 사업이었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 여인과 주인들이 서로 협력관계였거나 동업 관계였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잘나가는 사업 파트너였겠지요. 그러나 누가는 이 여인이 첫째 귀신 들렸다는 것, 둘째 여종 곧 노예였음을 밝힙니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귀신에 들려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된 한 여인을 여러 주인이 노예로 소유한 후에 그녀를 길거리로 내보내 점을 보게 하고 막대한 돈을 벌어 자신들에게 가져다 바치게 한 것입니다.
말씀을 토대로 이 여인의 삶으로 조금 더 들어가 봅시다. 본문에 기록된 '여종'이라는 말은 헬라어 '파이디스케(παιδίσκη)'의 번역입니다. 여러분, '파이디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어린이라는 뜻입니다. 어린이의 어린의 형용사가 '파이스'입니다. 그러니까 파이디스케는 어린 여자아이 종/노예를 가리킵니다. 이 여인이 성인이 아니라 소녀 혹은 여자 청년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어린 나이로 점을 치는 노동을 하고 자기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삶을 살고있습니다. 이 어린 여인이 언제부터 사로잡힌 삶을 살았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삶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고되고 힘에 겨웠음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주인들에게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장이라도 이 저주스러운 삶을 청산하고 평범한 어린이의 삶 혹은 청년의 삶을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매일 일하고, 일하고 난 노동의 대가를 빼앗기는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바울과 실라가 이 여인 앞에 나타났습니다.
자기 눈 앞을 지나가는 사도를 본 이 여인은 단 번에 깨닫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자기 삶을 휘어감고 있는 고통의 사슬을 끊어버릴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여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울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17절입니다.
17 이 여자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 하고 외쳤다.
여기서 우리는 "따라오면서"와 "큰 소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집요한 몸부림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멀리서 외친 것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18절, 첫 문장을 보십시오.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라고 기록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울과 실라가 지나다니는 날이면 날마다 그들을 뒤쫓아가서 큰 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질렀다는 뜻입니다. 집요하고 끈질겼습니다. 외침이라기보다는 악을 써서 부르짖는 소리에 가깝습니다. 어찌나 드셌던지 바울은 이 여인을 귀찮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들지요. 바울 정도 되는 신실한 사람이 어찌 이 어린 여인을 귀찮게 여겼을까? 이 여인이 날마다 소리 지르며 자기를 따르는 중에 어째서 한 번도 이 여인의 사정을 묻지 않았을까? 먼저 바울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인간의 속을 단번에 알 수 없지요. 또 당대에 이 여인과 같이 귀신에 들리고 점을 치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입장에서도 이 여인이 그저 자기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을 귀찮게 여겼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울도 인간이며 인간에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여하튼 바울은 귀찮고 괴로운 마음에 이 여인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귀신을 내어 쫓습니다. 즉시로 귀신은 이 여인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이 시점부터 영원히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여러분, 이 어린 여인 혹은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 여인의 삶은 어찌 되었을까요? 당연하겠지만, 성경은 이 여인의 후일담을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습니다. 문맥을 통해 그리고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여인의 삶을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낭만화는 피해야 합니다. 자칫 본문의 의도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사건 직후에 벌어진 일을 통해 사도행전이라는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발전을 기록해 놓은 말씀 안에 어째서 이 에피소드를 기록되어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여인들
바울이 비록 귀찮음의 발로였으나 어찌되었든 여인을 구하고 난 후 즉시로 이 여인의 주인들이 반발합니다. 말씀은 이렇게 서술합니다. 19절입니다.
19 그 여자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광장으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
주인들은 자기들의 돈벌이 희망이 끊어졌기에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광장에 있는 관원들에게 끌고갑니다. 이 짧은 문장에서 이 주인들이 여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이들이 어떤 유의 사람들인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자기들 사업을 방해하자 득달같이 달려듭니다. 자기 수입이 줄어든 것을 이들은 참을 수 없는 이들이며, 이익과 이윤에 집착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여인이 사라진 단 하루 만에 바울을 잡아 세우는 것을 보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다른 말로 이 자들은 이 여인을 그야말로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 주인들의 행태를 보십시오. 만약 바울과 실라가 자기들 사업을 방해했다면 관청에 고소하면 됩니다. 영업 방해정도 될까요. 그런데 이 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가 광장으로 갑니다. 아마도 자기 수하들을 동원했겠지요. 바울과 실라를 질질 끌며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으로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치를 주기 위함입니다. 게다가 자기들의 이 폭력적 행위를 광장에서 전시해도 될 정도로 이들은 권력 있는 자들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이를 말리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무뢰배들입니다. 게다가 이들의 고소 내용을 보십시오. 20절과 21절입니다.
20-21 그리고 그들을 치안관들 앞에 세워 놓고서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비겁하지요. 실상은 자기들의 돈벌이가 끊어져 울화가 치밀어서 벌인 폭력인데, 겉으로는 근사한 말, 이들이 우리의 질서를 흔들고 부당한 풍속을 전한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어지는 상황은 더욱 황당합니다. 이들은 그저 이윤추구에 혈안인 자들인데, 로마 당국의 치안관들이 이들의 말을 듣습니다. 자초지종을 묻거나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습니다. 광장에서 어떠한 재판 절차도 없이 즉결로 처리합니다. 바울과 실라를 때리고 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주인들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런 권력을 갖고 있단 말입니까? 이들이 얼마나 부유하고 힘이 세길래 사람을 잡아다가 광장으로 끌고 와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못하고 당국의 관원들마저 압도해 버린단 말입니까?
그러니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무뢰배들이 이 작은 여인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가혹했겠지요.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인을 이 거리 저 거리를 보내며 점을 치게 했겠지요. 여인이 피로를 호소하여 쉼을 요구해도 모르는 체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때리고 윽박질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 여인이 지나는 바울과 실라를 보며 외쳤던 말,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는 이 말은 단지 바울의 정체에 대한 폭로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면, 와서 나를 좀 살려주십시오.'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말씀 앞에 서성이며 다른 수를 떠올려 보아도, 이 여인의 삶이 23살 선빈 씨, 23살 선호 씨, 29살 보겸 씨, 24살 용균 씨 그리고 19살 김 군의 삶과 이어져 있음을 저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극도의 이윤 추구를 위해 위험으로 내몰리며 젊음을 빌미로 착취가 당연시되는 바로 오늘의 삶을 저는 말씀 안에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세대를 그저 돈벌이의 희망으로 여기며 위험을 외주화하고 안전을 도모하려는 모든 노력을 힘으로, 돈으로 억누르려는 이들을 보며, 이 여인을 소유한 주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저는 막을 수 없습니다. 이윤보다 생명이 중요하고 효율보다 안전이 우선일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법을 만들고 제도를 확충하려 노력하는 이들을 향해 세상은 언제나 오늘 말씀 21절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이지요. 오늘날 말로 번역하면 '이 사람들이 건전한 자본시장을 교란하고 있다' 정도겠지요.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돈은 물론이고 권력까지 쥐고 있는 오늘날의 주인들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연대하고 소리를 내어도 그들은 우리를 향해 '도시를 소란케 하고, 부당한 풍속을 전하는 이들'로 매도하며 또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동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큰 소리로 비명처럼 부르짖는 살려달라는 소리에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나를 살려주세요.라는 그 말에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때때로 그 소리가 너무 크고 귀찮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응답해야 합니다. 응답이 연대의 출발입니다. 하여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20절에서와 같은 이런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에 응답할 때 그 응답만으로 도시를 소란케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담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진짜, 이 여인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저 바라기는 루디아가 이 여인을 품어 주었다면 참 좋았겠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바울에 대해서도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그는 귀찮음의 발로로 여인을 구했습니다. 그 일로 고초를 겪지요. 그런데 바울은 여인 때문에 당하게 된 고난을 불평하거나 여인을 탓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오히려 찬송을 부르지요. 바울이 처음에는 여인의 삶을 헤아리지 못했으나 감옥에서 그녀의 삶을 반추하고 자기 마음의 태도를 반성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가 갇힌 감옥의 문을 여시고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계속 이어져 오늘까지 왔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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