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시기로
이제 교회력은 일상 절기 혹은 연중시기(ordinary time)라 부르는 시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청년부는 지난해 12월부터 교회력의 흐름과 호흡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탄생을 기뻐하는 성탄절, 세상에 나오신 주님을 바라보는 주현절, 고난의 길을 함께 걷는 여정으로서의 사순절, 기쁨의 부활절 그리고 교회의 시작과 성령의 역사를 개시하는 성령강림절을 지나왔습니다. 이처럼 대림절에서 성령강림절로 이어지는 교회력의 처음 6개월은 예수님의 삶을 뒤따르는 절기입니다. 여러 말씀을 함께 읽고 살피며 주님의 삶에 관하여, 주님의 말씀에 관하여 그리고 주님께서 뜻하신 바에 대하여 우리는 서로 나누고 성찰했습니다. 이제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남은 반년 동안 일상의 절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복음서 말씀의 첫 문장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2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새로운 연중 시기를 출발하는 믿음의 여행자들을 맥 빠지게 만드는 말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아직 할 말이 많지만, 너희들이 지금은 감당할 수 없다'니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거나 그들의 수준을 평가절하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 말씀 안에는 오히려 미안함과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말씀은 주님의 고별 말씀이자 최후의 당부 가운데 있는 한 단락인데, 바로 직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본문 16장 2절입니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에도 바쁜 때에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공동체에서 쫓겨나며 미움을 당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스승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이 이어지는 6절에 잘 드러납니다. 본문 6절입니다.
6 도리어 내가 한 말 때문에 너희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자책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제자들을 뒤흔들고 두렵게 만들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해야 하고 가르쳐야 할 많은 말이 남았지만, 지금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다는 말씀은 제자들의 무능력이나 무지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제자들을 지키기 위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당도하기까지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 받으신 후 누가 주님의 보좌 오른편에 혹은 왼편에 앉을지 엉뚱한 꿈을 꾸기도 하고 그로 말미암아 서로 다투기도 했습니다. 재판정으로 끌려가는 주님을 보고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던 모습도 우리는 지난 사순절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알 수 없었겠지요. 게다가 구원자요 메시아라 믿었던 자기들의 스승이 비참하게 죽고, 자기들 또한 곤욕을 치르고, 모든 희망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며, 이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임을 제자들이 감당이나 했겠습니까? 만약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쏟아내셨다면 제자들은 패닉에 빠진 채 뿔뿔이 도망하거나 어쩌면 스승에게 반기를 들었을지 모릅니다. 가룟 사람 유다의 비극이 여기에 뿌리 박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여 할 말이 여전히 많으나 너희들이 감당치 못할 테니 여기서 그만두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지키기 위한 주님의 뜻입니다.
말씀을 멈추시다
이렇듯 주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말씀을 멈추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을 지키실 때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적 지향이라면 어떤 신비하고 신묘한 소리, 혹은 아무 상황을 마음대로 전유하여 주님의 뜻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도대체 나의 상황 속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런 갈피를 찾지 못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만 갖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밀려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때를 마주하게 됩니다. 나와 하나님이 본래부터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던 것 같은 그런 감정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 놀라운 어쩌면 더 서글픈 진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점차 무뎌지고 있음에도 나의 삶, 일상, 일과에는 아무런 변화도 차이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저는 <콘클라베>라는 영화를 무척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몇몇 분들과는 이 영화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요. 영화에는 함께 나눠볼 만한 주제가 여럿 등장합니다. 여름 농활이나 엠티 때 기회가 되면 함께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겠다 싶습니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여러 시퀀스 가운데 저에게 남다른 의미로 남은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로렌스 주교는 교황을 가까이서 보좌하고 교황청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이른바 고위직 사제입니다. 당연히 영화의 큰 줄기인 교황 선출 선거 즉 콘클라베의 실무를 담당하지요. 그런데 영화의 초반, 주인공 로렌스 주교는 콘클라베만 잘 마치고 교황청의 직책을 사임한 후 본래 자기가 있던 수도회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연유를 묻는 다른 사제에게 로렌스 주교는 얼마 전부터 기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기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중직을 맡을 수 없겠다는 그의 고백에 저는 좀 낯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기도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노하지 마십시오. 기도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전념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기도에 어려움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얼마나 뜨끔하고 또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이내 슬픈 마음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자인데, 기도하지 않고도 넉넉히 살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감각이 무뎌지고, 기도하지 않는데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나의 삶이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데 어째서 내 삶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이 지속된다면, 이것은 은총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 차라리 반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이 엄한 징계라도 내리신다면 차라리 하나님이 우리를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것 자체는 의심치 않겠는데 말입니다.
무응답의 시기
나를 향한 말씀을 멈추셨음에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믿음과 신앙도 어떤 결정적인 변화가 있지도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예배드리고 적절히 봉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이 듣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의 신앙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시시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고 마는 것이지요. 말씀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고 그러다가 실망하고 결국엔 신앙에 시시해지는 이 시기가 여러분들과 같은 청년의 시기와 여러 부분에서 닮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어른들은 그리고 기성세대는 청년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운 청춘, 무한한 가능성, 비슷한 말로 내가 지금 너희 나이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 혹은 돌도 씹어 먹을 나이 등등. 돌도 씹어 먹긴요. 허리는 아프고 어깨는 짓눌려있고 여기 앉아 계신 분 태반은 거북목이고 과로, 피로, 잠을 자도 개운치 않고, 만성 피로에 절어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도전하고 쟁취할 수 있다고 다그치듯 말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작은 실패조차 용납하는 법이 없음을 말입니다. 무엇보다 청년의 때가 생의 주기 가운데 가장 괴로운 이유는 청년의 시기는 무응답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시기는 사방으로 신호를 보내는 시기입니다. 대학 혹은 대학원으로 이런저런 인턴십, 소망하는 직장, 각종 시험들, 혹은 친구나 연인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가장 많이 가장 적극적으로 보내는 시기가 청년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낸 신호는 대부분 무응답으로 돌아옵니다. 원하는 대학에 과정에 직장에 내가 좋아하는 그 혹은 그녀에게 내가 보낸 신호에 응답 없음이라는 시그널만 응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똑같은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다 단번에 신호를 받은 이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자책하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 청년들의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신앙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믿음을 가진 청년으로서 내가 보내는 신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또한 하나님께 나의 신호를 보내는데 어째서 하나님마저 무응답으로 일관하신단 말인가. 이것이 청년 신앙의 딜레마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청년이 이 무응답에 지쳐 잠시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믿음을 잠시 내려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믿음을 포기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똑같은 나날이 이어질 따름입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응답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응답받지 못하는데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고수함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럼에도 우리는 신앙을 지켜야 할 어떠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들은 왜 아직도 여기에 앉아 계십니까?
하나님이라는 세계
오늘 우리가 교독 찬송했던 시편의 시인은 아마도 높은 산 어딘가에 서서 세상을 바라본 것 같습니다. 산 위에서 하늘을 바라본 경험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거칠 것 없는 광활한 하늘 말입니다. 시인은 그곳에서 해가 뜨고 달이 뜨며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봅니다. 시인은 시적 은유를 사용해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이라 말합니다. 자연을 보며 압도적이면서 거룩함을 느꼈겠지요. 그러다 시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저런 것들을 지어주셨을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해와 달과 별과 광활한 하늘을 지으셔서까지 돌보아 주실까? 온 세상이 나에게 무응답으로 등을 돌리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은 오늘 아침에도 떠올라 나에게 새 하루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달을 뜨게 하셔서 나로 잠에 들게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걸까?
자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시인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응답을 주고받는 대상이 아니구나. 나는 하나님이라는 세계 안에 있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하나님이라는 세계 안에 있음을 믿고 자각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오지 않음을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시편 8편의 마지막 절에 담긴 의미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느냐는 고백은 온 땅이 주님의 세계이기에 나는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라는 세계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인의 본질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온 세상이 나에게 응답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마저 나에게 응답하지 않는 듯할 때 우리는 눈앞의 대상을 찾아 헤메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나보다 더 큰 세계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응답해 줄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나의 세상을 모두 감싸고 있음을 우리는 자각해야 합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우리 신앙의 참된 목표는 어떤 응답을 확인하고, 능력을 발휘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나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이 무정하고 난폭한 세상에서 작은 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음을 스스로 자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응답 없는 세상에 상처받고 신앙을 등지며 살아가다 보면 나의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음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때 잠언의 지혜를 경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지혜가 길가에서 네거리에서 마을 어귀 성문에서 여러 출입문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기억하라 네가 누구이고, 네가 어떤 분의 보호를 받는지.
하나님이라는 세계에 살고 계신 청파의 청년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해주실 말씀이 많으나 때때로 우리에게서 말씀을 거두실 때가 있습니다. 아직 그 말씀들을 감당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우리가 모자라서거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더 큰 세계 안에 있음을 깨닫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또한 우리에게 등을 돌립니다.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응답이 없습니다. 신앙의 시간도 일상의 시간도 분명 괴로운 시기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하라고 응원합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높은 하늘과 산, 바다와 강은 자기들을 지으신 분이 저와 여러분 또한 지으셨음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세계를 보여준다 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힘들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무응답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힘을 내십시오. 성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증하시며, 진리의 영이 오셔서 네가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일러줄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말씀을 마치며 알베르 카뮈의 스승이자 철학자인 장 그르니에의 글 가운데 한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 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를 벗으며 나사로 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다. 그런데 사실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 이었던 것이다. <'공의 매혹' in 섬, 장 그르니에>
내가 있는 곳이 절망의 그늘이 아니라 그보다 크고 넓은 하나님의 세계임을 자각할 때, 우리가 입고 있는 것은 나사로의 수의가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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