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정의 방향을 잡기로 마음먹으신 연유가 당신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죽을 날이 다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예루살렘 여정은 곧 그의 죽음의 길, 고난의 길인 셈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이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남 없이 걸어가십니다.
주님은 먼저 사람들을 보내어 당신과 제자들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여러 사람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확인하도록 지시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작지 않으니 아마도 이런 심부름을 보내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북쪽의 큰 도시 사마리아로 가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도시 간에 갈등과 반목이 커서 두 지역 거주민들은 서로를 싫어했습니다. 그 분노가 예수님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지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누구도 주님을 맞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무언가를 도모하려는 주님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이 틀어지자, 제자들은 언짢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괘씸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이해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도달하려면, 사마리아를 거치는 길이 효율적이고 안전합니다. 세 지역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여행길은 꼬여버립니다. 비용과 시간에 손해가 발생합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을 화나게 했던 것은 지금 자기들이 하늘 일이 나 좋자고 하는 사적 목적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제자들이 조금 엉뚱하고 앞뒤를 분간 못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새로운 나라의 시작을 위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중대하고 고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길을 가고 있는 자신들을 돕기는커녕 발목을 잡고 있으니, 부아가 치밀다 못한 분노가 차오르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시작하면 너희들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 복을 누리게 될 텐데 지금 나와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고 있느냐? 제자들의 속마음은 바로 이러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그 분노를 가눌 길이 없는 상태가 바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분개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제안합니다. 본문 54절입니다.
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짐짓 무심한 듯 던진 말이지만, 들여다보면 참으로 섬뜩한 말입니다. 제자들, 그것도 주님께서 특별한 자리마다 대동한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자기들의 앞길을 막은, 다른 말로 자기들의 대의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로 태워 죽이자는 말입니다. 사마리아는 불의하고, 배은망덕하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루실 크고 바른 길을 가로막는 방해꾼일 뿐입니다.
멸균 교회
나는 정의롭고 또 대의에 동참하고 있으니 나를 따르는 것이 곧 정의이고, 나를 반대하는 것은 곧 불의라는 이 무시무시한 착각은 비단 제자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 착각을 반복하고, 이러한 퇴행이 반복될 때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참상을 맞이하고 맙니다. 알베르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바로 이 문제를 진지하고 섬세하게 다룹니다. 카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반항하는 인간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쟁취하고 신과 맞서서 그 존재를 계속 지탱해 가는 것을 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반항의 초심을 잊은 채, 정신적 제국주의의 법칙에 따라 무한정 되풀이되는 살인들을 거쳐 세계 제국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 185-186.
카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이 맞서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를 옥죄고 가로막는 모든 부조리한 체계들과 힘과 권력을 말합니다. 반항은 이런 것에 도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의와 정의에 사로잡혀 이것을 이념화하고 절대화하면 결국 살인을 되풀이하고 또 다른 제국을 만들어낸다고 카뮈는 말합니다. 그가 이 책을 쓰던 때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인 것을 감안해 보아도, 그의 시론이 오늘날의 전 지구적 폭력을 얼마나 잘 설명해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정의와 옳음의 이유로 자행되는 폭력을 우리는 매일 같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전의 모든 명분은 정의입니다. 비극적 아이러니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의로운 길을 걸으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자유와 인격을 무참하게 만들었던 율법과 제도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인 정의와 공의가 다스리는 세상을 말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만나 자유인이 되었고, 반항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이내 폭력의 방법으로 자기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불사르려 합니다. 제자들 안에 도사린 폭력의 그림자를 주님도 보셨습니다. 주님은 엄히 꾸짖습니다.
어떠한 정의도, 제아무리 바르게 보이는 대의도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정의가 아닙니다. 신앙과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 거리끼는 것들,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 파괴하면서까지 성취해야 할 믿음의 열매는 없습니다. 나의 신앙적 기준으로 보기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가 설령 성경이라던가 전통이라는 것의 어떤 부분을 충족한다고 해서, 내 앞의 사람들을 소거하는 것이 신앙적 정의의 완성일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멸균 교회를 구축하고 싶어 합니다. 교회를 어떠한 이질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 멸균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 보기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멸균한 상태는 오히려 면역을 크게 약화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로지 동질성으로만 구축된 공동체, 멸균한 공동체는 오래도록 존속할 수 없습니다. 작은 균 하나만 침투해도 무너집니다. 면역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공동체의 건강함은 모이는 인원들의 숫자나 예배 안에서 보이는 어떤 요소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느냐에서 결정됩니다. 여러분이 청년기를 지나 장년에 이르러 신앙 생활하다 보면 참기 어려운 사람 많이 만납니다. 세파에 시달리며 지금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 다소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눈앞의 상황이나 사람들이 한심하게 보이거나 옳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때 한숨 참는 것이 신앙의 연륜입니다. 주님이 직접 그 방법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려주시기까지 합니다. 56절입니다.
56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다른 마을로 가는 것, 돌아가는 것입니다. 포기나 타협이 아닙니다. 참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이 마음 지녀야 합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불태워 멸균으로 만들면 정의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하나님의 뜻이 오롯이 성취되리라 믿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때때로 참고 돌아가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타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품으라는 말입니다.
끊고 태워야 할 것은
대신 우리가 허물어야 하는 것, 우리가 태워버려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앞에 놓인 걸림돌이 아니라, 내 뒤에 놓인,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어두운 기억, 그릇된 습관, 나를 편협하게 만드는 완고함을 우리는 잘라내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과 신앙 모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붙들어 매어 놓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열왕기의 예언자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와의 만남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엘리야는 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로 구약의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카리스마틱한 예언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엘리야 홀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언자 850명과 싸워 이긴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엘리야만큼이나 놀라운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습니다. 엘리야는 광야를 경유해서 다마스쿠스로 가서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왕이 될 이들에게 기름을 부어야 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의지해 광야 길을 가던 중 한 청년이 소 열두 쌍, 그러니까 무려 24마리의 소를 통제하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소 열한 쌍을 앞세우고 열두 번째 소들을 몰고 있던 중이었지요. 규모가 상당합니다. 이 청년은 자기 옆을 지나는 분을 보고 단번에 그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임을 알아차립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야 역시 지금 소를 몰고 있는 이 젊은 청년이 자기보다 더 큰 일을 할 예언자의 그릇임을 직감하지요. 엘리야는 즉시 자신의 겉옷을 벗어 엘리사에게 던져줍니다. 자기 옷을 벗어 준다는 것은 그가 나의 후계자이자 나의 일을 이어받아야 하게 되리란 상징적 행위입니다. 엘리사는 그 의도를 간파하고 즉시 소를 버려 엘리야에게 달려옵니다. 마치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제자들과 같이 말입니다. 이때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열왕기상 19장 20절입니다.
20a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버려 두고, 엘리야에게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청년 엘리사는 자기 스승이 될 엘리야를 따라나서는 때로부터 어쩌면 영영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 직감했습니다. 하여 엘리야게에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겠느냐고 부탁하지요. 이때 엘리야가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본문 20절의 나머지 부분입니다.
20b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
새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돌아가게. 내가 자네한테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다소 냉정한 반응입니다.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겠다는 이 젊은 청년에게 내가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뜻이지요. 번역하기가 다소 까다롭지만, 이는 엘리야의 작은 테스트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엘리야는 이미 자기 옷을 엘리사에게 건네주며 그를 후계자로 낙점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예언자가 될 그릇인지 보기로 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부모님께 가서 인사를 드렸겠지요.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이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광야로 간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어 다음 장면은 본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소 한 쌍을 가져다가 제물로 드리고 소의 멍에를 불에 태웠습니다. 재물로 잡은 소는 백성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엘리사는 소를 몰던 사람으로 멍에는 소와 그를 연결하는 상징이며, 엘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엘리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의 옛 도구를 불사릅니다. 예언자의 삶이 고되고 힘들어도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이지요. 스승이 될 엘리야의 반응은 나오지 않지만, 엘리사의 각오를 그 역시 보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태울 것인가?
자, 이제 주님의 제자들과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를 나란히 봅시다. 두 제자 모두 스승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중대한 사명이었고,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모두 위대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불태우려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무고한 사람들임에도 말입니다. 물론 주님은 이를 막으셨습니다. 반면,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자기 뒤에 있는 것, 자기에게 익숙했던 옛 삶의 굴레를 불태웠습니다. 끊을 수 없으리라 믿었던 자신의 과거와 용기 있는 단절을 시도 했기에 엘리사는 위대한 예언자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신앙을 갖는 것,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내 앞에 놓인 것들 부서뜨리며 걷는 길이 아닙니다. 나와 결을 달리하는 이를 모두 삭제하고, 나의 공간을 멸균상태로 만드는 일이 신앙인의 목표가 아닙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하나둘이겠습니까? 환경일 수도, 제도일 수도, 또 많은 경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판단과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만날 때마다 불로 태워버릴 수 있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불의를 참고 넘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당히 타협하여 실속을 차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멸절의 방식으로는 어떠한 불의로 없앨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공명심과 허영심으로 무장한 나의 자아는 상대방을 불태우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최종적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이웃사랑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태워야 할 것은 다른 것들입니다. 우리 안에 비대해진 자아,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지난날의 후회와 아픔, 결별하기 힘든 익숙한 습관들, 이것마저 놓으면 정말 안 될 것 같은 바로 그것을 끊는 것에서 시작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인생길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거대한 벽 앞에 섰을 때 그 벽을 부수든가 아니면 내가 부서지든가 이렇게 양자택일로는 오래 걸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와서 호기롭게 장담하기를,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용기를 칭찬하기보다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58절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게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나를 따라 걷는 길을 귀하고 옳다. 참으로 고맙다. 그러나 그 길을 늘 고되고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나조차 머리 둘 곳 없는 고된 삶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걷는 길이 이렇게 힘이 듭니다. 그 힘든 길을 걸어가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 속을 뒤틀리게 하는 이들을 앞에 섰을 때, 모두를 불태워 정결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허망한 꿈을 단호히 배격하십시오. 대신 나의 자아를 뒤에서부터 끌어당기고 있는 지나간 그림자들을 끊어야합니다. 이것이 성숙의 길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신앙의 길은 앞에 놓은 어려움과 분투하고 뒤에 놓인 후회들과 화해하고 작별하는 여정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서신에서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고 말입니다(갈 5:1). 신앙의 길은 머리 두고 쉬기조차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는 분은 바로 주님임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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