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체력이 소진되어…
제 지인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한 사진을 보고 눈길이 오래 머문적이 있습니다. 사진은 자주 가던 한 음식점 문 앞에 붙은 작은 쪽지였는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준비한 체력이 소진되어 더 이상 일이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_ 주인백"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동네 맛집으로 소문난 사장님이 더 넓은 자리로 새로운 가게를 차렸고, 자리를 잡기 위해 밤낮없이 일을 하다가 결국 몸에 탈이 났다고. 그래서 이날을 시작으로 며칠을 앓아누우셨다는 짤막한 후일담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짧은 한 문장이 우리 시대 자영업자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애환이 깊게 담긴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습니다. 준비한 재료가 아니라 겨우 붙들고 있었던 나의 체력이 모두 소진되어 더는 일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이 전해왔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교회 근처를 지나다가 가게 밖으로 나와 잠시 쉬며 통화하고 있는 사장님의 대화 한 토막이 귀에 오래 남았었더랍니다.
'바빠서 겨우 산다'
가게가 쉴 틈 없이 바빠야 겨우겨우 살 수 있다는 이 사장님의 말씀이 마음에 얹혔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대부분의 청년은 일하는 사람들이지요. 혹은 일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이기도 하고요. 물론 아직 학생들도 계시지만,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분이 없고, 또 학업이라는 것도 결국 없을 찾기 위한 준비 가운데 하나이니 우리는 모두 일하고 일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밥벌이와 영성
일을 가리키는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 가령, 근로나 노동, 업무, 사무와 같은 단어들 말입니다. 여기에 조금 친숙하면서도 우리 피부에 가깝게 다가오는 표현도 하나 있지요. '밥벌이'입니다. 밥벌이는 놀랍게도 사전에 등록된 표준말입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혹은 겨우 밥이나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버는 일을 밥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밥벌이라는 말에는 우리 사회의 어떤 애환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준비한 체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일해야 하는 수고로움, 또는 정신없이 바빠야 겨우 밥벌이가 된다고 말하는 이의 절박함 같은 것들이 밥벌이라는 단어에 녹아 있는 듯합니다. 더불어 밥벌이의 간절함 안에는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의 오늘과 내일을 지키기 위한 사랑과 용기 또한 담겨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밥벌이는 '숭고'라는 고상한 단어까지는 모르겠으나, 무겁고 중한 것이라는 말은 붙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밥벌이의 무거움을 겸허하게 대하는 태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할 중요한 자세입니다. 밥벌이라는 노동이 버겁고 피하고 싶은 현실일 수 있으나, 그 노동을 통하여 나와 가족이라는 타자, 그리고 일상의 소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시몬 베유를 아시지요. 흔히 신비로운 영성가이자 차분한 문필가인 듯 여겨지지만, 그녀는 상당히 급진적인 노동 운동가였습니다. 시몬 베유는 프랑스 사회에 '실업 수당' 제도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고 우리의 전태일과 같이 그녀 역시 최저 생계비로 생활하며 교사 일을 하며 받은 봉급을 가난한 동료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곤 했습니다. 시몬 베유의 노동 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 노동은 튕긴 공이 되돌아오듯이 궁극적 목적이 튕겨 돌아오는 현상을 지치도록 느끼게 한다.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먹는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궁극의 목적으로 보거나 혹은 둘을 서로 떼어놓고 각각을 목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진리는 이 둘의 순환 속에 있다. (시몬 베유, <노동과 신비주의>)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먹는다는 밥벌이의 단순성 안에 하나님의 신비를 알아차릴 불꽃이 있음을 시몬 베유는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밥벌이는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이어져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시대는 밥벌이의 영성을 가벼이 여깁니다. 사회가 풍족해질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욕망의 시대가 사람들의 일상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하나님은 이런 시대에 어떤 말씀을 주시는 주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그 답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목자 아모스와 그의 시대
먼저 아모스의 시작이자 예언자 아모스의 등장을 알리는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1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가 전한 말이다. 그가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의 계시를 볼 무렵에, 유다의 왕은 웃시야이고, 이스라엘의 왕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아마 수 킬로미터 내에 있었던 도시입니다. 아모스가 주로 활동한 지역은 북 이스라엘이지만, 그의 출신은 남 유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의 등장을 보여주는 이 단락에서 좀 특이한, 다른 예언자들의 등장에서는 볼 수 없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모스의 직업이자 그의 생계 수단인 목자, 양을 치는 사람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노케드'가 아모스라는 이름과 병기되어 '목자 아모스'라고 일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언자의 본래 직업을 언급하는 경우는 구약의 예언서 특히 아모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다른 예언자인 이사야, 미가, 호세아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특징입니다. 게다가 차차 살펴보겠으나 아모스는 예언자로 활동하는 중에도 자신의 생계인 목자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아모스가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예언을 하던 때에도 그는 여전히 목자였다는 뜻입니다.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 말씀을 전하고 다시 자기 일터로 돌아와 양을 쳤습니다. 한 마디로 아모스는 밥벌이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다른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신비로움 속에 살았던 바와 달리, 어째서 아모스는 자기 본업을 유지하며 예언자로 나섰던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예언자를 신비로운 영적 세계에 머물게 하는 대신, 그가 평소에 하던 밥벌이와 예언을 병행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앞서 말씀드렸던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상과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앞서 1절 말씀에 따르면 아모스가 살던 시대의 유다의 왕은 웃시야(주전 787-736)이고, 이스라엘의 왕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과 구별하기 위해 여로보암 2세로 부르던 왕(주전787-747)이었습니다. 이들이 통치하던 시기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사회적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제법 살만한 세상이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왕 때에 고대 근동 지방의 패권을 쥔 제국은 앗시리아였습니다. 특히 북이스라엘 관점에서 제국 앗시리아는 고마운 존재였는데, 북이스라엘을 줄기차게 괴롭히던 시리아가 바로 앗시리아에 의해 제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북이스라엘은 급격하게 발전했습니다. 요단강 동편에서 대치 중이던 아람 민족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해 영토를 확장했고, 경쟁국들이 사라지자, 교역이 활발해졌고, 자연스럽게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왕권이 강화되자 북이스라엘의 종교를 담당하고 있던 도시 '베델'의 영향력도 덩달아 높아졌는데, 경제적 축복과 국력의 신장이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당대 북이스라엘 수도의 권력자들과 함께 종교적 수도 베델의 제사장들은 큰 힘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힘으로 풍요를 누리는 세상이 으레 그러하듯 이스라엘은 정신적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무너졌고 무엇보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당대의 참혹한 사회상을 고발하고 있는 아모스의 일갈이 아모스서 2장 6절에 담겨있습니다.
2:6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용서하기를 기꺼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용서치 않겠다고 다짐하실 정도의 극악한 죄악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돈거래를 하며 의로운 사람들을 팔아버리고 가난한 빈민을 신 한 켤레 값으로 넘겨 버리는 일입니다. 힘없는 이들을 짓밟고 여성을 성적으로 짓밟기까지 했습니다. 한 마디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습니다. 이들의 이 가공할 폭력을 추동하는 힘의 근원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다. 풍요가 만들어낸 욕망이 타자의 인격을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마저 부서뜨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찰하는 주제와 함께 본다면, 가진 자들의 더 가지려는 욕심이 평범하고 가난한 이들의 밥벌이라는 일상을 파괴한 것입니다.
밥벌이를 모욕하는 시대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일하는 예언자, 밥벌이 예언자 아모스를 부르신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가공할 욕망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들고, 질주하는 욕심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바로 그때, 자기의 일상을 지키고 자기 밥벌이의 무게를 감당하는 예언자의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른바 경제적으로 잘나가던 시대의 북이스라엘은 온갖 편법과 불법으로 부를 획득하고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람을 사고팔며,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들을 팔아버리는 이 무도한 시대였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지키며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바보 취급당하는 시대란 말입니다. 착했던 사람들조차 결국 나도 저들과 같이 헐값에 사람을 사고팔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 보잘것없는 나의 밥벌이를 포기하고, 눈 한 번 감고 저들과 같이 행동해야 부자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그늘진 생각들이 이스라엘 사회 안에 퍼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사회가 타락하고 불의에 물들게 되면 단지 그 사회만 병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도 함께 병들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사는 사회를 돌아보십시오. 공직자가 되겠다고 나선 이의 재산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어느 연예인이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의 집을 현찰로 구매했다는 기사는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공격적인 투자로 20대 혹은 30대 매우 이른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는 스토리는 이제 익숙합니다. 이것들은 잘못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비난해야 하는 행위는 더더욱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일도 잘하고 투자도 잘해서 부자가 된다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다만, 유희거리처럼 연일 보도되는 이런 소식을 접하다 보면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의 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함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나의 밥벌이가 보잘것없어 보이고, 무력함과 냉소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준비한 체력을 모두 쏟아부어야, 정신없이 일거리가 밀려들어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의 밥벌이라는 것은 참으로 초라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막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밥벌이 예언자
여기, 지치고 낙담한 8세기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21세기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여기 자기 밥벌이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예언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베델의 제사장 아마샤의 인식을 눈여겨보십시오. 아마샤는 베델의 제사장이었습니다. 풍요의 시기를 보내던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권력을 쥐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아마샤에게 아모스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고 베델의 종교는 날마다 발전하는데, 아모스는 이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니 아마샤의 속이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중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예언을 빌미로 아모스를 고소하고 여로보암 왕에게 아모스의 추방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아모스에게 내뱉는 말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2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같은 본문을 공동 번역으로도 보겠습니다.
""이 선견자야, 당장 여기를 떠나 유다 나라로 사라져라. 거기 가서나 예언자 노릇을 하며 밥을 벌어 먹어라."
모처럼 돈도 잘 벌고 풍요를 맛보는 이 나라 사람들 앞에 초지는 말일랑 입도 뻥긋하지 말고, 고향으로 내려가 예언하며 밥벌이나 하라는 말입니다. 아마샤의 빈정거림에는 예언과 밥벌이에 대한 은근한 무시, 인격적 조롱이 담겨있습니다. 아마샤의 모욕에 아모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본문 14절과 15절입니다.
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오.
15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소.
여러분, 아모스의 대답이 얼마나 근사합니까? '그래, 당신 제대로 보았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 그러니까 정식으로 예언자의 과정을 밟은 사람도 아니다. 당신 말대로 가축을 돌보며 돌 무화과를 가꾸는 사람, 곧 밥벌이하는 사람 맞다.' '그런데 하나님은 양이나 치던 밥 벌이꾼을 세워다 당신의 뜻을 전하게 하셨다. 밥벌이하는 사람으로서 예언하겠다. 당신과 당신의 나라 북이스라엘은 풍요 속에 망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모스의 대답입니다. 밥벌이 예언자 아모스가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했을 때 자기 밥벌이가 끊어지고 생계가 가로막힌 이스라엘의 작은 사람들은 얼마나 큰 위로를 얻었겠습니까?
청파의 청년 여러분, 제동력을 잃은 사회적 욕망이 질주하는 지금, 아모스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밥벌이의 무게를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해 낼 사람들이 절실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여러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암담했던 정치권은 비교적 빠르게 안정을 취하고 있으며, 산적해 있던 사회적 갈등을 풀어 나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한 그림자가 가득합니다. 국내 주식시장의 주가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와 불볕더위 속에 쓰러져 다시 일어서지 못한 청년 노동자의 비극이 함께 보도되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풍요가 약속하는 환상에 휘둘리지 맙시다. 나의 일상과 함께 다른 이의 일상을 함께 돌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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