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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폐허에서(사 66:10-14)

by 청파비둘기 2025. 7. 7.

옛 노래가 입가에 머물 때
요즘은 복음성가나 CCM과 같은 찬양곡들을 그다지 즐겨듣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득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전에 알고 있던 노래가 입가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가사도 온전하게 생각나지 않고, 곡의 제목도 가물가물하지만 한 두 마디의 음조나, 짧은 가사 한 대목이 반복되고 그렇게 며칠을 흥얼흥얼하는 경우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일 있으시지요. 지난주 제가 그랬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교회로 오고 다시 집으로 가는 중에 아주 오래 전 들었던 노래의 한 부분이 제 입에서 튀어나왔고 그렇게 일주일 내내 그야말로 흥얼흥얼했습니다. 

제 입에 머물며 한동안 자리를 잡고서 떠나지 않았던 노래의 가사는 

"내가 쓰러진 그곳에서 주는 나를 강하게 하리, 나는 다시 일어나겠네 주는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리"(내가 쓰러진 그곳에서, 박성민, 정장철 곡)였습니다. 98년도에 소개된 곡이니 어쩌면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햇수로 27년 전, 거의 30년 전,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대학에 들어가던 시절의 노래였습니다. 이미 철이 한참 지난 이 노랫말들이 제 마음 문을 두드린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요. 내가 쓰러진 곳, 내가 무너진 자리, 빠져버린 듯한 나의 절망스러운 공간에서 주님이 나를 오히려 강하게 하시리란 고백이 저의 지금과 우연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가 쓰러진 곳에서 서둘러 떠나는 것, 혹은 탈출하는 것, 그렇게 온전한 장소로 옮겨지는 것을 해방이나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과는 다른 더 나은 '삶'이나 '상태'가 있음을 믿고, 지체없이 그곳에 도달함을 좋은 믿음의 자세이거나 자랑할 만한 신앙의 열매라고 믿곤 하지요. 우리에게 익숙한 신앙의 언어들도 이와 비슷한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실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향해 큰 뜻을 갖고 계셔. 
주님께서 다 예비해 두셨으니 믿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등등. 

이러한 언어들은 언제나 지금이 아닌 나중, 이곳이 아닌 저 너머 어딘가를 가리킵니다. 저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신앙의 문장들을 비판하거나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과 신앙의 길은 분명 차안(此岸)의 세계에 사로잡혀서는 보이지 아니하고 피안의 길(彼岸)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본질이 어디 피안의 길, 곧 이 세상 바깥에만 있을까요.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셔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들을 향해 네가 믿음을 지킨다면 더 나은 삶이 찾아온다고 약속하신 경우를 찾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람들의 일상 자리로 찾아오시고, 오늘의 문제를 여쭈시고, 당면하고 있는 아픔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인형 뽑기 게임의 크레인과 같이 우리를 집어 올려 다른 곳에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쓰러진 그곳으로 오시고, 우리를 일으키시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다시 해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제 마을로 가서 네게 일어난 일을 말하라. 이제는 나를 따라오라. 죽지 말고 살아라. 주님의 응답은 언제나 '이제' 그러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출발은 언제나 내가 쓰러진 곳, 나의 폐허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오랜 포로기를 마치고 자기들의 고향 앞에서 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펴봅니다. 그들을 향하여 오늘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너희의 폐허를 바라보라. 그리고 기뻐하라' 


이사야의 마지막 장면들
이사야서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한 권의 책이지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지며, 그 기준은 역사적 맥락입니다. 먼저 이사야서 1장에서 39장까지를 이른바 '제1 이사야'로 유다의 패망이 짙어지던 때, 단호한 심판의 말씀들이 주를 이룹니다. 40장에서 55장까지를 '제2 이사야'라 부르며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6장에서 66장까지를 '제 3이사야'로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을 향한 당부와 나아갈 길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서 안에는 역사적으로 수 세기에 걸쳐 세 부류의 이사야 예언자들, 곧 이사야의 정신을 이어받은 예언자 혹은 예언자 집단이 이사야의 심정을 담아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예언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보고 있는 이사야서 66장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친 후 그들의 고향 땅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음에 쓰인 예언서입니다. 

이렇게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다의 최후, 역사의 최종국면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유다 최후의 왕은 시드기야였습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군대에 의해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유다의 성벽은 붕괴되었으며, 무엇보다 견고하리라 믿었던 성전이 무너진 바로 그날 유다 백성들의 모든 희망은 잿더미로 바뀌었습니다. 잔혹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바빌로니아 군대는 유다 백성들 가운데 유력하고 힘이 있었던 많은 이들을 포로로 삼아 바빌로니아로 압송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유린당했고, 주권은 상실되었으며, 국민은 포로로 사로잡힌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국가로서 존속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요. 

그렇게 낯선 땅에 도착한 포로된 백성들은 자기들의 포로 생활이 얼마나 길어질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금방 돌아갈 수 있다고 믿은 이도 있었고, 또 우리는 완전히 망했으니 바빌로니아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하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역사는 참으로 얄궂게도 이스라엘이 70년간 포로 상태였다고 기록합니다. 

70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여기 앉아 계신 분 가운데 70년의 세월을 실존적으로 경험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 절반의 시간에도 모자라는 청년들도 있지요. 그렇기에 70년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70년이라는 시간이 한 민족의 정신과 사고, 역사적 관점과 이해를 얼마나 뒤흔들 수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제국으로부터 주권을 침탈당하고 35년을 어둠 속에 있었던 역사적 기억이 있습니다. 35년임에도 그날의 상처와 아픔은 가혹했고, 여전합니다. 그러니 70년은 절대 만만치 않은 시간입니다. 

어떤 이들은 70년이라는 시간 안에 죽음을 맞았겠지요. 그들은 꿈에 그리던 고향을 다시 밟아 보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7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라를 잃은 패배한 민족의 후손이 된다는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당대의 아이들은 패배감 속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포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괴롭게 만들었던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 즉 성전의 부재였습니다. 고향 땅의 성전은 무너졌고, 남의 나라 땅에다가 그것도 감시당하는 처지에 성전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몇몇 사람들의 집에서 모여 서로의 기억에 의존하여 율법을 공부하고 익혔습니다. 이것이 회당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시나브로 사로잡힌 백성들의 마음에 불어왔습니다. 나라와 민족은 패망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패배하지 않음을 사람들은 점차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여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바빌로니아 포로기에 쓰인 두 번째 이사야, 제2 이사야의 시작인 이사야서 40장 7절과 8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7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우리는 부는 바람에도 쓰러지고 마는 풀과 같으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위로는 눈에 보이는 성전 부재의 공간, 희망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위로와 전망이 되었지요. 이런 불모의 시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니엘, 에스겔 등이 바로 포로기에 활동한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회복의 은총을 주심을 선포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희망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제 꿈에 그리던 고향,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음을 바라면서. 


고향 앞에서
이윽고 70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근동 지방의 패권은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로 전환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황제 고레스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그들이 포로로 삼고 있던 백성들을 해방했습니다. 유다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황제 고레스는 칙령을 내려 바빌로니아 땅에 사로잡혀 있던 모든 유대 백성을 향해 돌아가도 좋다고 선언했습니다. 70년을 기다려온, 바로 그날이 이제 눈앞에 온 것입니다. 백성들은 채비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입니다. 이집트를 뒤로하고 약속의 땅을 찾아 나섰던 선조와 같이 바로 오늘 자기들 또한 바빌로니아를 뒤로하고 본래 약속받았던 그 땅으로 돌아가니 말입니다. 홍해를 가르고 무수한 기적이 펼쳐지고 전쟁마다 승리하고 무엇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바로 그 땅으로 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설레겠습니까? 아무리 힘든 여정이라도 발이 아픈 줄도 몰랐겠지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떠나온 땅 예루살렘, 약속의 땅이며 하나님의 도성, 비록 무너졌으나 성전이 세워졌던 그 도시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고향으로 돌아온 백성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도, 화려한 연회도, 근사한 숙소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폐허였습니다. 성전은 무너진 그대로, 마을과 골목은 정다운 소리로 가득했던 그 시절의 그곳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온 귀한 백성들을 두려움과 적대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환대도, 위로도, 무엇보다 아무 희망도 없는 폐허 앞에 귀한 백성들이 섰습니다. 

폐허 앞에 선 백성, 바로 이것이 귀환 이스라엘 공동체의 현실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포로기의 예언자들이 약속한 새로운 시작과 놀라운 축복은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말씀 하나 붙들고 먼 길을 걸어온 백성들이 마주한 가혹한 현실을 제3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사야서 64장 10절에서 11절입니다. 

10   주님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광야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졌습니다.
11   우리의 조상이 주님을 찬송하던 성전, 우리의 거룩하고 영광스럽던 성전이 불에 탔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던 곳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폐허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약속대로라면 반전의 축복과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마주한 현실은 어지럽기만 합니다. 


페이드인과 페이드 아웃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되는 장면 전환 기법 가운데, 페이드인/페이드 아웃이 있습니다.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그 기법입니다. 현재 장면의 끝을 알리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사용되는데, 연출자들은 페이드인과 페이드 아웃을 통해 수십 년의 시간을 단숨에 넘어가거나 첨예했던 갈등이나 다툼이 페이드인과 페이드 아웃을 거쳐, 그러니까 시간상으로 1, 2초 정도 만에 해결된 국면을 보여주곤 합니다. 가끔 그런 상상할 때 있지 않은지요? 해결해야 할 과제, 풀어야 할 갈등이 가득한 데 페이드인 페이드 아웃 한 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히 휴가를 즐기는 상상 말입니다. 물론 인생에서 페이드인과 페이드 아웃은 없다는 것 모르지 않습니다. 삶은 영화에서처럼 분절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하지요. 눈 한번 감았다가 뜨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상황 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맥락도 이와 같지는 않은지요?

하나님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페이드인과 페이드 아웃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을 향해 출발하는 장면 다음 모든 것이 회복되어 기쁨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장면은 성경에 없습니다. 말씀이 오히려 주목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그사이에 놓인 처절한 현실, 곧 돌아온 너희의 현실이 폐허라는 현실입니다. 바로 이때, 폐허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아, 너희는 모두 그 성읍과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11   이는, 너희로 하여금, 위로를 주는 예루살렘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게 하고, 또한 너희로 하여금, 풍요한 젖을 빨아들여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이사야의 이 애정 가득한 축복의 말씀이 귀환공동체를 환영하는 만찬장에서 들렸더라면 얼마나 기쁘고 벅찬 감동이었겠습니까?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선율로 연주하고, 진귀한 음식이 차려져 있고, 값비싼 포도주들의 즐비한 곳에서 선포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이사야는 폐허를 향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음식이라곤 찾을 수 없는 광야에서 젖과 꿀을 먹으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을 보호해 줄 성벽이나 해자는 찾아볼 수 없음에도 풍요가 가득할 것이며, 평화가 강물처럼 넘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완전한 아이러니입니다. 이사야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짓으로 오도(誤導)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집단 인지 부조화를 요구하는 것일까요? 

아니겠지요. 여러분,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이사야도 눈이 있습니다. 그도 자기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이 폐허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생각하면 슬픔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여기서 기뻐합시다. 이 폐허에서 시작합시다. 우리가 쓰러진 이곳에서 시작합시다. 우리를 배부르게 할 젖과 꿀, 우리를 보호해 줄 어떠한 무기도 성벽도 없습니다. 평화는커녕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적대자들이 가득합니다.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방법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기뻐합시다. 그리고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우리를 어떻게 옮기셨음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한 시편을 떠올려 보십시오. 시인이 말합니다. "오너라. 와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아라. 사람들에게 하신 그 일이 놀랍다. 하나님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셨으므로, 사람들은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라는 시인의 요청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이 페이드 아웃과 페이드인이라는 장면 전환으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지난하고 고된 현실이라는 여정이 있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기적이지만, 그 땅을 걸어간 걸음은 현실입니다. 갈라진 바다 사이로 마른 땅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사야는 절망으로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여기에서 시작하자고, 무너진 세상을 돌릴 수 없으니, 재건의 기초를 바로 오늘부터 하자고 독려하고 있음을 우리는 헤아려야 합니다. 

귀한 청파의 청년 여러분, 신앙과 믿음은 우리의 현실을 페이드 아웃하고 페이드 인하여 단 몇 초 만에 반전시키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공동체는 그런 약속을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의 오늘과 약속의 그날 사이에 놓인 폐허를 지나야 합니다. 어떠한 믿음도 확실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현실을 단번에 타개하는 기적도 우리 삶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폐허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쓰러진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회복과 변화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됨을 믿으십시오. 신앙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태도를 바꾸는 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우리의 뼈가 무성한 풀처럼 튼튼해질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폐허를 응시할 때 결코 홀로 있지 않습니다. 무너진 곳에서 다시 시작해보고자 다짐할 때 혼자가 아닙니다.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합시다. 헤르만 헤세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소설 <유리알 유희>에서 주인공 크네이트가 쓴 시 한 구절을 들려드리며 말씀을 마칩니다. 

모든 시작에는 이상한 힘이 깃들어 있어
우리를 지켜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생의 부름은 결코 그치지 않으리니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