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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의미라는 은총(눅 8:26-39)

by 청파비둘기 2025. 6. 22.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만났을 때
저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합니다. 한강 잠수교 터널로 들어와서 녹사평 언덕을 넘은 후 전쟁기념관 앞, 요즘에는 용산 대통령실이라 부르는 그 길을 돌아 교회로 옵니다. 그 길 한 모퉁이에는 할머니 한 분이 거의 매일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한눈에 보아도 남루하고 왜소한 할머니는 당신 몸만 한 피켓을 들고 작은 확성기를 손에 쥐고 매일 무언가를 외칩니다. 제가 그 길을 지나는 날에 단 한 번도 이분을 뵙지 못한 적이 없으니 그야말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소리치고 계신 것이지요. 

그 할머니가 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매일 그 소리를 들었음에도 말입니다. 어느 날은 신호가 걸려 그 할머니 앞에 선 적이 있었습니다. 피켓에 쓰여있는 글귀들과 말씀하시는 맥락을 얼핏 보니 누군가 평생을 모았던 당신의 소중한 재산을 도둑질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신호는 바뀌었고, 저는 다시 페달을 밟아 출근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어른은 어째서 저렇게 매일 나오셔서 목청을 높일수 있을까? 원하는 바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 누구도 자기 말을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응당 할머니의 주장에 시시비비가 있겠지만, 누구도, 하물며 매일 그 앞을 지나는 저 역시 그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그렇게 매일 소리를 높이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할머니의 요구는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는 그저 소리, 조금 인색하지만 소음입니다. 

전철을 타면 이따금 알 수 없는 소리를 읊조리는 분들, 저 홀로 말을 내뱉는 분들이 타실 때가 있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말하지만 전철 안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은 나의 언어 체계와 인식 안에서 작동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분의 말은 외국어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전쟁기념관 앞에 서 계신 그 할머니도 마찬가지지요. 매일 말하지만,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언어 세계에 없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번역' 과정이 필요합니다. 번역은 형태가 다른 두 언어 사이에 의미의 다리를 놓아 서로 뜻이 통하게 하는 일이지요. 내가 지금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저 말에 분명 의미가 있으니, 번역의 노력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자는 노력이 낯선 타자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첫 번째 과제입니다. 그러나 앞서 제가 예로 든 분들의 언어에 대해 우리는 '번역의 노력'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저들의 말엔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 할머니의 주장, 전철에서 홀로 소리 내는 그분의 말은 무의미라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조리도 없고 사실 관계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중언부언하는 말의 꼴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정상이라 말하는 세계에서 그들의 언어와 경험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합니다. 


거라사의 광인으로 불린 자 
복음서에는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 고통 속에 외치는 언어가 소음 취급을 받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의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한 남성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말과 언어 그리고 삶은 그의 세계로부터 단 한치도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신 후 거라사 지방에 도착했을 때 이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행색이 남달랐습니다. 본문은 그가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고 있으며, 집에도 살지 않고 무덤가를 거닐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옛 성경은 이 남자를 가리켜 거라사 광인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이 남자가 주님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28b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말씀만 놓고 보면 언제나 예수님의 정체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는 존재는 귀신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 정확히는 귀신의 말을 잘 들여다보면 이 거라사 낭인과 예수님은 어쩐지 초면이 아닌 듯 보입니다. 이 남자가 이미 예수님을 알아본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본문도 이 추측에 근거를 제공합니다. 본문 29절 첫 번째 문장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29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미 이 남성을 만난 적이 있고 또한 그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은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귀신은 다시 이 남자를 사로잡고 괴롭혔습니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 주신 적이 한 번인지 그 이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본문 29절의 두 번째 문장을 보십시오.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라는 말씀을 토대로 유추하면, 주님이 이 남자의 귀신을 축출해 주신 적이 적어도 한 번 이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남자가 구면이라는 뜻이고 어떤 의미에선 꽤 잘 알고 있는 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제자들 입장에서 이 남자를 보았을 때 아마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 저 사람 또 만났네, 주님 돌아갑시다. 저 사람은 가망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귀신을 내어 쫓아 주시길 도대체 몇 번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또다시 귀신의 노예가 되었잖습니까!'

우리 여기에서 잠시 멈춰봅시다. 거라사 지방의 이 남자는 이미 주님의 능력으로, 귀신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했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말이지요. 그런데 다시 악한 귀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남자의 문제는 단지 귀신으로부터의 해방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뜻이됩니다. 이 남자에게는 귀신이 아니라 다른 문제,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고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다른 문제가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본문 29절의 나머지 문장도 봅시다. 이 남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29절 나머지입니다. 

29c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된 후 또다시 귀신으로에 의해 괴로움이 시작될 때마다 그 지방 사람들은 그를 돕지 아니하고, 서로 힘을 합쳐서 쇠사슬로 묶고 감시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이 남자에 대해 한 가지 오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남자를 가리켜 광인, 그러니까 사람들과 지역 사회에 피해를 주는 존재로 생각했으나 그가 한 일이라고는 사슬을 끊고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로 달려 나간 것뿐입니다. 어쩌면 이 남자는 비록 귀신에 들렸을지라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하여 이 두 가지 사항을 종합하면 거라사의 이 남자는 귀신으로부터 고통당할 때마다 사람들로부터 격리 당함을 통해, 그가 내뱉는 모든 말과 행동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 거리끼는 것, 불쾌한 것, 더러운 것, 사회 안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 비상식적인 것, 몰지각한 것,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분류될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이러했다면, 우리는 이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잠시간 온전한 정신의 상태였음에도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은 이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복된 그를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한 번 귀신 들렸던 자라는 꼬리표를 붙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회복된 이 남자가 마을에 남기보다 주님을 따라가고자 간청했음을 미루어본다면 이 남자가 지역사회로부터 얼마나 외면받아 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남자의 이야기를 보며, 거라서 지방의 이 남자에게 반복되어 일어났던 극심한 고통의 원인이 그의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냉대와 혐오에 기인하고 있음을, 그가 내어 뱉는 모든 언어를 무의미로 처리했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누구도 이 사람의 말을 번역하려 들지 않았음을. 

여러분, 인간이 언제 절망합니까?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나의 요구가, 나의 목소리가 무의미 취급 받을 때입니다. 온전한 정신과 논리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나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 취급을 받을 때, 인간은 절망합니다. 그대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은 채 광야로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은 얘기합니다. 적당히 하라고, 이제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았느냐고, 이제는 그만할 때 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이 거라사 남자에게도 그랬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아주지 않았느냐고, 그럼 되지 않았느냐고, 왜 아직도 힘들어하느냐고, 왜 아직도 고통의 말을 내어 뱉느냐고, 당신이 그 모양이니 또다시 귀신에 사로잡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이 남자의 반복된 고통의 책임이 이 남자에게만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의미를 부여하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셨습니다. '아 이 사람의 문제는 귀신이 아니구나' 주님은 당신을 보자마자 외쳤던 말,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말은 내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 주지 말라는 간청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내 주시면 나는 사람들로부터 또다시 냉대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는 침묵의 구조신호임을 알아차리셨습니다. 하여 주님은 귀신을 내어 쫓는 대신 '이름'을 묻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난 성령강림절에 창세기 1장을 다루며 아담이 피조된 존재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며 세상에 의미를 부여했음을 생각했습니다.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너를 의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물을 때는 언제나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와 나 사이에 의미가 생성됨을 용납하고 허용하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이름을 통해 그의 삶을 그의 세계를 함께 바라보겠다는 뜻입니다. 거라사의 이 남자가 대답합니다. "군대입니다." 군대, 레기온이라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이 남자 안에, 군대에 준하는 귀신들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레기온에 관한 다양한 주석적 시도들이 있습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레기온, 곧 군대 귀신이라는 말을 들으며 어떤 영적인 스펙터클이나 신비스러운 상황을 떠올려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이 거라사 지방의 한 남자 안에 가득 자리 잡은 귀신들의 숫자가 아니라, 그 안에 군대만큼이나 크고 켜켜이 자리 잡은 슬픔의 흔적들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내어 뱉는 모든 말을 무시로 일관하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의 개수가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그 사람 안에 귀신들의 숫자도 늘어났겠지요. 사람들로부터 무의미의 시선이 쌓일 때마다 자기 안의 귀신들도 그 힘을 키워갔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를 둘러싼 사회와 공동체로부터 의미를 얻지 못한다면, 그가 내는 모든 소리는 언어가 아니라 소음이 되고, 소음은 듣기 싫은 소리가 되어 사회로부터 추방과 격리를 명령받을 것입니다. 

지난 5월 청년부 광주 기행을 다녀왔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였던 숨쉼교회 서점에서 <광주, 여성: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 둔 5.18 이야기>를 사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읽었습니다. 그간 들어보려 노력하지 않았던 그 시절 평범했던 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는 책의 기획과 취지가 참 좋았습니다. 구술로 기록된 책에는 여러 여성이 등장하는데, 모두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 누이들이었습니다. 처한 상황과 경험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거대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분들이었죠. 이 책은 사실상 518을 겪은 여성들과 그녀들의 목소리를 거의 최초로 기록하고 편집한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출판이 2010년입니다. 그러니까 1980년 광주에서 참상이 벌어진 후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여성들의 목소리가 취합되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지난 30년간 여성들의 목소리는 그간 의미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 또한 이러한 반성을 하며 시작합니다. 

"그해 5월부터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18과 관련해 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해왔다. 그 일들이 주로 '남성', '당사자', '열흘간의 시간'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 활자화된 구술은 '여성', '이웃', '열흘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까지'를 담고 있다." <광주, 여성> 33.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그간 의미 없다고 여겨진 518 내외부 여성들의 이름을 묻고 그분들의 음성을 경청함으로 무의미가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의미를 갖추자, 518이라는 경악에 인간이라는 경이가 더해져 참상의 아픔을 더욱 도드라졌고, 반성의 결은 더욱 첨예해졌습니다. 


삶이 살아날 때
저는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이 사람에게 이름을 물으심이 바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귀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모든 말과 고통은 무의미의 소음이었고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었지요. 설사 잠시 치료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번역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무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누구도 듣지 않았던 그의 말을 들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지요. 군대 귀신을 내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레기온 곧 군대가 먼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저희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저 산기슭에 놓아기르는 돼지 들에게 보내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허락하십니다. 레기온은 즉시로 이 남자에게서 나와 돼지에게 들어갑니다. 돼지들은 비탈을 달려 호수에 떨어져 죽고 말지요. 무섭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한 상황입니다. 돼지는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귀신을 돼지에게로 보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럴듯하지만 이 자체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기이한 상황은 어떤 영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거라사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종의 경고, 곧 사람 하나를 억압할 때, 그 악함이 자신들의 일상을 파괴할 수 있음을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거라사의 광인으로 취급받던 이는 말끔한 옷을 입고 바른 자세로 앉아 주님과 대화합니다. 누구도 대화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아니 대화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름을 묻고 말을 걸자, 그는 더는 광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의미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대화의 장에 함께 앉아야 합니다.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은 이것이 불편합니다. 대화를 중단하고 떠나주길 바랐습니다. 무의미로 일관하던 이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이 사건이 불유쾌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에서 대화해야 합니다. 주님과 같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이름을 묻고 무엇보다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래서 의미를 갖추지 못한 저들의 말을 번역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이 사람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길 원하지만, 주님은 거절합니다. 대신 마을로 가서 네가 겪은 사건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두려웠겠지요. 자신을 멸시하던 사람들에게 돌아가리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용기를 냅니다. 그의 가슴 속엔 주님이 주신 생의 의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가 귀신에 사로잡혔을 때는 광야로 뛰쳐나가야 했지만, 의미에 충만할 때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로 가 전했습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신앙인의 삶은 주님과 나 사이에 그리고 나와 나의 타자들 사이에 아름다운 의미로 풍성해져야 합니다. 온갖 의미가 더해져 삶을 아름답게 일구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어 우리가 의미를 얻었듯이 여러분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말을 들어주며 의미를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들리지 않는 말을 듣기 위해 타자의 소리를 번역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사는 세상은 의미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