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권능
세상이 처음 만들어지던 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도구는 오직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언어로 세상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라 하시니 그 말씀하신 것이 거기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세상을 존재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존재들은 막무가내로 방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질서를 갖추고 정돈됩니다. 하나님의 언어로 존재하게 된 세상의 모든 요소는 그렇기에 보기가 좋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세상을 존재케 하고 더불어 좋음의 상태로 만드십니다. 하여 하나님의 언어에는 권능이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이르면 창조 세계에서 언어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언어로 말미암아 존재케 된 세상 모든 것들에 하나씩 하나씩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움이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배운 적도 익힌 적도 없으면서 이름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언어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무엇을 의미하나요? 하나님은 인간을 말할 수 있는 존재, 즉 언어를 가진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의 코에 '루아흐'라 부르는 하나님의 숨결/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 생명이 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명이 된 인간은 자기에게 부여된 언어의 권능을 아름답게 사용합니다. 아담은 자기 앞으로 나온 살아있는 것들, 존재하는 것들에 이름을 줍니다. 존재에 이름이 더해서 비로소 의미가 됩니다. 가령, 하늘의 비둘기는 하나님의 언어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이 비둘기에게 비둘기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 비둘기는 비로소 비둘기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모든 존재는 이름이 부여되어야 의미를 갖추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가 있지요. 김춘수 시인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이라는 의미가 생성되기 전까지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몸짓이었지만, 이름을 부르자 내게로 와서 꽃이 됩니다. 그와 나 사이에 의미가 생긴 것이지요. 그러니 언어는 세상을 존재하게 만들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나님은 언어로서 세상을 존재하게 하시고, 인간은 언어를 통해 존재하는 세상에 이름을 부여함으로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언어라는 권능의 도구를 사용해 세상을 좋음이 충만한 공간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언어를 통한 존재와 의미 부여라는 사건의 절정이 어디인지 아시는지요? 아담이 하와를 만났을 때입니다. 아담에게 가장 의미 있는 존재인 하와를 만나자, 그 안에 담겨있던 언어가 터져 나왔습니다. 창조된 인간이 최초로 완성된 문장을 내뱉었습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 첫 번째 문장입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그러니까 인간의 첫 번째 언어는 경탄의 언어, 기쁨과 환희의 언어,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한 언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존재케 하신 여자, 하와를 향해 언어를 내뿜음으로 둘은 서로 의미로 연결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존재와 의미로 충만했던 언어는 점차 그 빛을 잃어가게 됩니다. 교활한 존재로 등장하는 뱀은 속임의 언어를 사용하고, 인간은 거짓과 의심, 그리고 회피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가인은 분노와 적대의 언어를 발하고 살인을 저지른 후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무정한 언어를 내뱉고 맙니다. 그러니 창세기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은 어떤 면에서 보면 언어의 타락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망가진 언어의 절정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바벨탑 사건입니다.
위를 향한 욕망의 언어
홍수가 지난 후 사람들은 다시 늘어났습니다. 번잡하고 정돈되지 않았겠지요. 사람들은 모여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로 합니다. 창세기 11장 4절이 이 결정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사람들은 두 가지 결정을 내립니다. 첫째, 도시를 세우는 것, 둘째 그 도시 가운데 하늘에 닿기까지 높은 탑을 쌓아 올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시 건설과 바벨 탑 건축은 수단일 뿐입니다. 이들의 진정한 목적은 이름을 날리고, 사람들이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온 땅을 강력한 통제 아래에 두어 일치단결시키겠다는 다짐입니다. 황당해 보이는 이 목적이 달성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당시 온 세상의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하나이기에 이 언어를 세상 가장 높은 곳에 둔다면 온 세상은 완전한 통제가 이뤄질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단일의 언어가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면서, 모든 사람을 통제하는 강고한 체계를 만들자는 것, 역사는 이런 세상을 가리켜 제국이라 말합니다.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모든 것을 통제하고 다스리겠다는 제국적이며 패권적인 욕망이 바벨 탑 이야기에 서려 있습니다. 하나의 언어로 구성된 세계에서 다른 언어는 양해될 수 없습니다. 명령만이 절대적으로 존재합니다. 다른 생각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단 하나의 언어, 하나의 생각, 하나의 사상만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혹 이견을 갖는다면, 바꾸어 말해 다른 언어를 내어 뱉는다면 그는 바벨 탑의 도시 바깥으로 추방되고 맙니다. 제국은 다른 언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의 무수한 제국들이 모두 바벨 탑의 길을 걸었습니다. 앗시리아가 그러했고 바빌로니아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제국이 피워낸 찬란한 문화와 유의미한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통치의 효율과 성장을 위해 약소국을 짓밟고 소수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며 바로 지금이 평화의 때라며, 팍스 로마나라는 프로파간다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가 참된 평화일리 만무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는 세상은 어떠합니까? 자국을 제국이라 칭하는 나라는 더는 없을지 몰라도, 제국의 통치 논리가 작동하는 세계는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사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작은 이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얼마나 무시했던가요. 더 크고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사소한 것들은 나중에 처리하자는 말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최근 환경 문제에 관한 뉴스나, 환경 운동가들의 목소리를, 매스컴을 통해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정말 찾기 힘듭니다. 정치와 선거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무수한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우리 사는 지구의 재앙적 위기를 다루는 기사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지구는 여전히 신음하고 있으나 누구도 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24살 용균 씨가 죽은 지 7년 만에 또 다른 노동자가 같은 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용균 씨가 일터에서 죽고 나서 그의 어머니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일터를 만들라고 소리를 치고 목소리를 내었겠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작은 언어들은 하늘 높은 곳의 언어에 의해 묵살당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바벨 탑의 논리가 버젓이 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잘만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언어로 통제되며 다른 언어를 용납하지 않는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거리가 멉니다. 서로 다른 언어들이 공존할 수 없다면, 다채로운 존재들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언어는 하늘 높은 곳에서 통제의 수단이 될 뿐 다양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언어라는 권능을 자기 이름을 날리고, 온 세상을 자기들 발 앞에 엎드리게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하여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어를 뒤섞어 온 땅에 흩으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이제 각자 자신의 언어를 갖고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바벨 탑 사건 후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스라엘의 그 기나긴 역사가 비로소 출발합니다.
아래를 향한 성령의 언어
이제 세상의 모든 나라는 각자 자기의 언어를 갖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각자의 언어를 갖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참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으련만, 바벨 탑 이후의 구약이 증명하는 이스라엘은 언제나 자기만의 바벨 탑을 세우고 흩어지기를 반복하지요. 인류는 창조 때에 부여받은 언어의 권능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끊어진 언어의 다리를 이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이 보여준 언어의 신비를 우리에게 다시금 알려주셨고 생명과 사랑의 언어를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가 증거하는 주님의 모든 언어는 연결하고 살리는 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고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습니다. 이윽고 기도 가운데 성령이 강하게 임하십니다. 성령은 마치 세찬 바람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불꽃들이 하나씩 자리하더니 놀라운 사건이 이어집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2장 4절입니다.
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령한 말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8절과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임재하여 방언을 말하는 제자들을 보며 사람들이 놀랍니다. 이들은 분명 유대의 갈릴리 사람들인데 저 멀리 다른 지방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내어 뱉는 말은 바대, 메데, 엘람, 메소포타미아, 갑바도기아, 소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그리스의 크레타, 아라비아의 말들입니다. 모두 당대에 실존하는 언어였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외국어를 공부했을 리 만무해 보이는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 세계 각지의 언어를 말하는 장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혹자는 말하길, 이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합니다.
베드로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일어나서 엄숙히 선언하길, 나의 동료들이 세계 곳곳의 언어를 쏟아내는 이유는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 말합니다. 본문 16절과 17절입니다.
16-17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성령을 받은 이들이 세계 각 처의 말을 쏟아내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하고 환상을 보며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지역들, 곧 소아시아와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 전역의 방언들은 그들이 복음을 들고 가야 하는 지역의 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나의 언어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의 세계에 잇닿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만약 제자들이 하나의 언어, 곧 예루살렘의 언어만을 고집한다면 이들은 결코 먼 이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세계의 언어에 집착하는 이가 다른 세계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세계의 언어가 유일하다고 믿는 이들과 대화하면 피곤하고 지칩니다. 그런 언어를 가진 이는 언제나 통제하려 들고 판단하려 듭니다. 자기 언어가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언어와 세계는 바벨 탑의 언어와 세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성령의 사람들이 내어 뱉은 언어는 바벨 탑의 언어와 그 작동 방식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바벨 탑의 언어는 하늘 높은 곳에 닿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언어는 이 땅 구석구석으로 흩어집니다. 바벨 탑의 언어는 하나의 언어만이 유일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언어는 온 세상의 언어와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바벨 탑의 언어는 군림하고 통제하고 억압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언어는 해방하고 놓아주며 풀어 다니게 합니다. 바벨 탑의 언어는 다른 언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언어로 말하는 이들은 온 땅 구석구석 들어가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고 그들의 언어로 말을 듣습니다.
그 영을 품은 사람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복음서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성령, 곧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영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맞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세상은 보혜사의 뜻을 헤아릴 언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압니다. 주님의 영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언어를 알고 있기에 성령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을 심령에 품은 이들은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온 땅에 흩어집니다. 그 뜻을 세상에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신앙인의 언어는 바벨 탑의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다양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쓰러지고 지친 자들의 언어를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약자들의 언어에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아래로 아래로 가야 합니다. 하여 우리는 오순절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언어를 다양하게 만들어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세계가 유일하다고 믿는 고집을 꺾어달라고, 나의 언어만이 유일하다고 믿는 아집을 무너뜨려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거는 결국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 여러분, 말의 폭력이 걷잡을 수 없을만큼 심해지고 있습니다. 조롱과 비하, 손가락질과 이죽거림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바벨 탑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성령강림의 역사가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바랍시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의 품이 넉넉해져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과 넉넉히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미세하여서 들리지 않는 신음도 정확히 짚어내는 민감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됩시다. 나아가 우리 사는 지구가 보내는 고통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입시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성령을 받아 여러 언어로 말하며 온 땅으로 흩어지는 날을 기대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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