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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다음 해 이맘때에(눅 10:38-42), 성령강림 후 여섯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7. 20.


마르다의 집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중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어떤 마을에 도착하셨고, 이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사는 집에 방문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는 오늘 본문이 다루는 이야기가 전부이기는 하지만, 요한복음에서와 같이 누가복음에서도 주님과 마르다 마리아 자매는 무척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주님을 집으로 모시는 일은 제법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요. 당연합니다. 주님은 홀로 다니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딸린 식구가 기본적으로 열두 명, 제자에 속하지는 않으나 주님을 가깝게 따라던 이들까지 포함하면 규모가 제법 되었습니다. 손님 대접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시지요. 두어 명 식사 준비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예수님 포함 최소 열 세 명, 게다가 대부분 건장한 남성들이니 맏이였던 마르다에겐 대단한 도전이었습니다. 

누가복음 본문도 마르다가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손님을 환영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식탁을 차리고 또 유대의 풍습에 따라 손과 발을 씻을 물을 준비하고 그야말로 할 일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언니 마르다의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가 있습니다. 동생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마르다의 일을 돕기는커녕 마치 언니의 분주함을 모르는 체 무시하고,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에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마르다는 화도 나고 속도 상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을 우리는 한 번쯤은 겪어 보았습니다. 주로 마르다 입장에서요. 어떠셨습니까? 이거 그냥 넘기기 쉽지 않습니다. 표정 감추기도 어렵지요. 복음서가 쓰인 때가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2천 년 전인데, 마르다의 속상함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참다못한 마르다가 결국에 한마디 하지요.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 문장에는 확실히 언짢은 감정이 서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르다가 말을 거는 대상은 분명 주님이지만, 말 속에 담긴 화살이 향하는 방향은 동생 마리아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의 볼멘소리는 지극히 타당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에는 어쩐지 마르다를 향한 배려나 위로를 찾기 어렵습니다. 본문 41절과 42절입니다. 

41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42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주님 말씀이 참으로 알 듯 모를 듯합니다. 마르다의 마음을 격려하는가 싶으면서도, 동생의 행동을 용납하는 듯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 짧은 에피소드를 마주한 어떤 사람들은 교회나 선교 사역을 위해 분주하게 봉사하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이, 그리고 염려하고 들떠있는 상태보다 차분하고 고요한 마음을 지키는게 더욱 훌륭한 신앙의 본이라고 해석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말씀 대 봉사라는 대조는 적절치 못합니다. 주님께서 마르다를 책망하고 마리아를 드높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마리아의 행동을 단지 말씀 듣고 묵상하는 일로 치환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보다 대안적인 분석 가운데 이런 것도 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 즉 주님과 같은 자리에 앉아 거실에서 말씀을 듣는 행위를 당대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이 집 안의 권위자인 주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앉을 수 있는 이는 대개 남성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거실에서 토론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남자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남성의 자리에 스스로 앉음으로 세상의 권위와 질서를 전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원리를 드러냅니다. 여성도 권위를 지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근사한 해석입니다. 저 역시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 한편에 석연치 않은 무엇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환대의 사역을 온몸으로 그것도 홀로 감당한 한 여인의 배려와 수고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마르다를 향해 마지막 말씀을 마치시고 두 자매는 누가복음 이야기 안에서 완전히 사라져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답없는 마르다
마르다는 속 상하고 답답한 마음을 주님께 아뢰었지만 이렇다 할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끝이 납니다. 마치 할 얘기가 남았는데 갑자기 끝나버리는 영화 같습니다. 어쩌면 말이지요. 기대했던 대답을 듣지 못한, 아니 면박당했다고 느낀 마르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을 수도, 억울한 마음에 울음을 터뜨렸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마르다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 기록해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누가복음 10장 42절과 누가복음 11장 1절 사이의 한 뼘도 되지 않는 공간 안에는 마르다의 공허가 깊게 서려 있습니다. 

42절 한 문장을 여러 번 읽다 보니 마땅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복음서에서 사라진 마르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꼭 우리의 모습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도 딱 여기, 누가복음 10장 42절과 11장 1절 사이의 공간에서 서성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용기 내어 속상하고 아픈 마음을 주님께 토로하지만 주님은 예외 없이 우리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말씀만을 들려주십니다. 

'주님, 이 암담한 상황 속에서 내 마음이 괴로운데, 이것이 해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우리의 항변에 주님은 '그 마음 이해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납득할 만한 말씀을 주십시오. 내가 듣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주님은 야속하게도 언제나 침묵하십니다. 우리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채, 그렇기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응답을 구했으나 답을 듣지 못하고, 답을 듣지 못하니 드릴 말씀이 없는 상태, 이것이 우리의 지난한 일상의 신앙생활입니다. 자, 우리 이 응답 없는 헛헛한 마음을 간직한 상태에서, 오늘 함께 읽은 창세기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라의 집에서 
오늘 구약 본문에도 답을 듣지 못한 채 살아간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사라, 아브라함의 아내입니다. 아브라함이 한창 더운 대낮에 자기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습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멀리서 세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주님께서 보낸 손님임을 직감하지요. 그대로 달려 나가 세 사람을 환대합니다. 제 얼굴을 보아서라도 반드시 집에 오셔서 먹을 것도 잡수시고, 손과 발을 씻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세 사람은 답하길, 정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합시다라며 흔쾌히 수락합니다. 아브라함은 세 손님을 장막으로 모십니다. 창세기 본문 6절을 봅시다. 

6   아브라함이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이 하는 일이 이렇습니다. 손님은 자기가 초대해 놓고 대접은 아내에게 떠넘기는 것 말입니다. 사라는 느닷없이 닥친 손님들의 식사, 특별히 빵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빵 만드신 분들 아시지요. 밀가루가 적당한 수준의 반죽이 되기까지 힘과 시간이 많이 필요함을 말입니다. 사라는 빵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메인디시라 할 수 있는 기름진 송아지 요리는 하인이 담당합니다. 고기 요리는 완성이 되어 식탁에 차려졌고 아브라함은 젖과 우유를 함께 냈습니다. 아마 빵은 한창 구워지는 중이었겠죠. 식사 순서가 엉키면 곤란했기 때문에 사라는 분주했을 것입니다. 화덕에 빵이 서둘러 익기를 바라며 안절부절못했겠죠. 

일단 식사를 시작한 세 귀인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답합니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아직 빵을 만드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사라는 사막 기후의 무더운 날씨 속에 화덕을 지키며 구슬땀을 흘리며 환대를 실천하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본문 10절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정신없는 아브라함에게 주님은 네게 아들을 주겠다고 갑작스러운 약속을 내리십니다. 난데없는 이 말씀을 장막 밖에서 일하고 있던 아내 사라도 듣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참으로 오랜 시간 아들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청하기를 수없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으로 답하셨습니다. 두 부부의 나이가 이제 고령이 되었고 당대의 의술로는 임신은 물론 출산이 불가능해진 상태였습니다. 주님의 이 약속에 사라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웃었습니다. 기쁨의 웃음일까요? 아니요. 실소입니다. 한 마디로 어이없다는 거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주님도 이 웃음을 보시고 사라에게 왜 웃느냐고 물으시죠. 사라는 너무도 당연하고 합리적인 말을 합니다. '주님, 내가 고령의 노인이고 남편도 그러한데, 어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라의 물음은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물음과 닮아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응당 던질 수 있는 정당한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도 답하셨습니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때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말씀은 확신을 주는 만족스러운 답변이 아닙니다. 어째서입니까? 아들에 대한 약속에 단서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다음 해 이맘때에' 여러분, 제가 만약 여러분께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선물을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내년 이맘때에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이건 그냥 놀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을 찾은 세 손님은 떠났습니다. 마르다가 마땅한 답을 듣지 못하고 퇴장했듯, 사라 또한 주님께 받은 약속의 말씀은 단 한 번도 다시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비록 창세기 이야기에서 퇴장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허전한 한 해를 보냈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임신, 내년 이맘때라는 궁색한 조건은 사라에게는 응답도 약속도 될 수 없는 텅 빈 말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리라 당장 아이를 주신다고 하면 믿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해 뒤라니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이니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보지만, 자신의 늙은 몸을 보고 이내 실망하고 단념합니다. 게다가 일 년 뒤라는 막연한 시간은 허무감에 공허감을 더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우물쭈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마르다의 공백, 일 년이 지난 뒤에나 선물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듣고 살아가는 사라의 허무한 시간, 그리고 우리의 이렇다 할 변화나 변곡없이 그저 어제와 같이 오늘도 이어지는 신앙은 어떤 면에서 참 닮았습니다. 믿음을 통해 마땅한 답을 얻고 그 힘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주님이 주시는 응답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고, 그렇기에 답할 수 없는 삶 말입니다. 하여 우리의 신앙은 착잡한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라의 일 년과 닮았고, 아무런 대답 없이 사라져 버린 마르다의 공백과 흡사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한 해 뒤 사라는 약속 받은 아들을 잉태하고 건강하게 출산하였을까요? 우리는 이미 창세기 이야기를 알고 있지요. 사라는 임신이 불가능한 몸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삭입니다. 이삭의 탄생은 창세기 21장에서나 가야 다시 언급됩니다. 창세기 21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창 21: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하나님은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뤄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앞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사라에게 약속하신 다음 해 이맘때 동안, 그러니까 사라가 공허와 허무의 일 년을 보내는 동안 그녀를 돌보셨습니다. 사라는 잊었으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한 해 동안 사라를 떠나지 않으셨지요.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믿음은 기한을 정해놓고 성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돌보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응답에만 심취하면 일상은 곤고해집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9할은 막연한 일상의 연속입니다. 영어 단어를 써서 죄송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이나믹하기보다는 루즈합니다. 이따금 말씀을 통해 감동과 은혜가 있고 확신의 다짐을 할 때가 물론 있습니다만, 대개 우리는 응답 없으신 것 같은 하나님께 적응하고 나 역시 별다른 고백을 하지 않음에 익숙한 삶을 살아갑니다. 강렬한 영적 체험은 이제 옛말이 된 듯합니다. 내 신앙의 이야기는 사라진 마르다처럼 그렇게 잊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허무한 시절을 주님께서 보살피고 계셨습니다. 나를 돌보시는 분이 계심을 신뢰할 때 우리의 일상 신앙은 의미를 갖추게 됩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은 사라에게 주어진 믿음의 성취가 아닙니다. 사라는 이삭을 통해 그 허무하고 공허했던 지난 한 해가 무의미가 아니라 모든 순간이 의미였음을 깨닫는 시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드리는 오늘의 예배에 관한 관점을 확대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통해 무언가 깨닫고 새로운 힘을 입어 또 한 주를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옳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이 예배를 드리기까지,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까지 주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내가 어디가지 않고 오늘 여기로, 예배의 자리와 시간 안으로 우리를 이끄신 것입니다. 덥고 습한 7월 20일 오후 2시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의지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보살피셨기에 겨우 겨우 여기에 나왔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매주 예배에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보살피셨기 때문임을 잊지 마십시오. 혹 오랜 시간 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오랜시간 주님은 한 번도 어김없이 보살피고 계셨기에 언젠가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올 것을 믿습니다. 

마르다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마르다를 향한 마지막 말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였습니다. 새번역 성경이 택하고 있는 들떠 있다는 표현은 아쉽습니다. 들떠 있다는 번역은 헬라어 튀르바조(τυρβάζω)인데,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상태에 있음이 더 적확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역개정 번역인, 근심하다가 더 나은 표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은 마르다를 향한 마지막 말씀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구나. 이것이 주님 말씀의 본뜻입니다. 

많은 주석가와 설교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어떤 가르침 혹은 지침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르침이나 지침 혹은 교정의 의도가 담긴 질책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위로와 격려 그 자체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마르다를 깨우치기 위함이 아니라 염려하는 마르다를 달래고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잘 대접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고, 염려하며 근심한 당신의 사랑하는 딸을 다독이는 마음입니다. 하여 마지막 말씀, 주님의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마리아는 하나를 선택했다. 바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말이다. 염려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자. 그것 하나면 된다. 주님 말씀의 속뜻이 여기에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마르다가 부디 염려하는 마음을 헤아려 돌보신 주님의 뜻을 알아차렸길 간절히 바랍니다. 

청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잘 해보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마음,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음을 헤아리며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돌봄을 믿는 다면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신앙은 하찮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기쁘게 걸어가는 아이처럼,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평범한 우리의 삶과 신앙은 든든해 질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