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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정의를 세우는 방식(창 18:20-32),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7. 27.

소돔에서 들려온 소리
지난주 우리는 아브라함을 찾은 세 손님에 관해 살폈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최선을 다해 손님들을 환대했고, 내년 이맘때쯤 아들이 태어나리란 축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라는 그 약속을 믿을 수 없어 웃기도 하였으나, 주님으로부터 재차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본문은 이 식사 시간 후의 이야기입니다.

식사가 파한 후 손님들은 떠날 채비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배웅하기 위해 그들과 길을 나서지요. 얼마간 길을 가던 중 주님과 그 일행이 어느 언덕에 멈춰 섰는데, 그 아래로 크고 화려한 도시가 펼쳐졌습니다. 그제야 아브라함은 자기가 대접한 분들의 본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으나 창세기 18장 1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들이 떠나려고 일어서서,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데로 갔다."

소돔을 본 아브라함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어째서 소돔, 나의 사랑하는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저 도시로 가시려는 걸까? 설마?' 아브라함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소돔은 이미 죄악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3장 13절은 이미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에 거처를 마련한 직후 이런 말씀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13:13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주님을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

아브라함의 불안한 예감은 이내 현실이 됩니다. 본문 20절과 21절에서 주님은 당신들 일행이 지금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가고 있으며, 그 이유가 저 두 도시의 죄악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기 위함이라고 일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20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 온 울부짖음과 같은 것인지를 알아보겠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가시게 된 이유는, 그 두 도시로부터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20절과 21절에서 '울부짖다'의 번역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 자아크(זַעַק)와 차아카(צַעֲקָה)로 두 단어 모두 고통스러워 내뱉는 비명을 의미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판단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사람들이 죽을 정도로 괴로워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그 이유가 도시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두 도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죄악들이 가득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죄악은 도시의 사람들을 살지 못할 정도로 괴롭히고 있음에는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지금, 이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이 그 죄악과 관련이 있는지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소돔으로 가시는 이유는 단지 저들의 죄악상을 파악하기 위한 방문 조사가 아니라, 도시 자체를 심판하시기 위함임을, 지도상에서 두 소돔을 삭제하기 위해 가시고 계심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요구하는 사람들
하나님은 소돔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들으시고 심판하시기로 이미 결정한 상태입니다. 소돔은 이미 죄악의 도시였고, 회복 불가능의 상태였습니다. 심판의 판결은 내려졌고 이제 집행만 남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불의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는 세상에서 사라짐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자정능력으로는 저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갱신 개혁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하고도 완벽하게 심판하시고 모든 일을 단숨에 처리하셨습니다. 죄악의 도시가 사라짐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이룩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떠올립니다. 인간이 풀 수 없는 꽉 막힌 문제들, 난점들,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거대한 악의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게 그리하셨듯 직접 개입하시어 심판하면 좋지 아니한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인간은 문제를 제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실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압도적인 힘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지워지는 장면을 보면 그야말로 속이 시원합니다. 죄악에 마땅한 결과입니다. 사이다 같습니다. 우리 시대가 직면한 거대한 악의 문제도 모두 이렇게 하나님의 힘에 의해 심판이 집행된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지 상상해 봅니다.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힘을 갈구합니다. 강력한 체제와 압도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를 기다리지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그랬습니다. 더 크고 강한 힘이 있다면 누구도 풀지 못한 저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강력한 지도자를 구하고 힘의 통치를 원합니다. 우리 인류가 걸어온 가장 어두운 길의 골목이 언제나 이런 욕망에서 시작했습니다. 힘에 의한 통치와 심판은 인류의 보편적인 욕망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몇 주전 나눴던 복음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의 행보를 가로막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하여 제자들이 주님께 요구했던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저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하늘에 불을 내려 모조리 태워버려 달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이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엄히 야단치셨습니다(눅 9:51-56). 2천 년 전에 제자들조차 신의 힘을 빌려 세상을 심판하고 이것을 정의라고 부르고 싶어 했으니 이 욕망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 역사를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1, 2>이라 부르는 연구를 통해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불행한 고통을 야기한 '전체주의'의 기원과 원인을 분석합니다. 세계 대전을 촉발케하고 대량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전체주의란 마치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총합으로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모든 판단을 힘과 권력에 의탁하고 사유하기를 포기했던 인간들의 작은 결정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태동시키고 거기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체주의 지배를 떠받치는 이상적인 신하는 확신에 찬 나치나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즉 경험의 현실)의 차이와 참과 거짓(즉 사유의 기준)의 차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2, 281) _ 번역 일부 수정

전체주의의 숙주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란 사실과 허구, 참과 거짓 사이를 구별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의 압도적인 능력이라는 허구적인 힘이 세상에 정의를 구현하리란 믿음이 세상을 지배할 때, 그리하여 모든 반론과 문제 제기, 사유의 책임들이 뒤로 미뤄질 때, 전체주의라는 먹구름은 짙어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적 욕망은 역사 속에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고 아렌트는 경고합니다. 사마리아를 하늘의 불로 태워버리자는 제자들이 딱 이러했지요. 사실과 허구는 물론 그 일이 야기할 문제를 이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반대자들을 처단해 달라는 혐오로 가득한 기도를 아무렇지 않게 내어 뱉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힘에 의한 정의라는 미명 아래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지연시킨 아브라함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정의는 무조건 옳으니,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심판을 지켜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게으른 믿음, 나아가 하나님의 힘을 통해 모든 난제를 풀어보려는 파괴적 욕망을 온몸으로 거부한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아브라함은 주님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본문 22절이 기록하기를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가로막음은 물론 하나님을 멈춰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하나님과의 거래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 도시에 사는 의인과 악인을 모두 쓸어버리시렵니까? 저 도시에 혹 의인 50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아브라함의 요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본문 25절 하반절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러한 표현이 주로 어디에서 발화합니까? 법정입니다. 변호사와 검사가 서로 법정 공방을 마친 후 재판관에게 부탁하는 말이지요. '재판관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는 말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하는 행위는 단지 거래나 부탁이 아니라 '변론'입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죄인들의 땅인 저 소돔이라는 도시를 위해 아브라함은 지금 변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래,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저 도시를 용서하겠다. 이어 아브라함은 말하길, 혹 저 도시에 의인 쉰 명에서 다섯 모자란 45명의 의인이 있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마찬가지로 그들을 보아서라도 용서하겠다고 하시지요. 아브라함이 요구하는 의인의 숫자는 계속 내려갑니다. 오십 명에서 마흔다섯으로 마흔다섯에서 서른 명으로 스무 명으로 그리고 마지막 열 명까지 말입니다. 주님은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변호사로서 아브라함의 변론은 자격 미달입니다. 무죄의 근거와 기준을 계속 바꾸고 있으니 말입니다. 현실 재판정이었다면, 아마 법정 바깥으로 쫓겨났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관대합니다. 아니, 애초에 이러한 변론을 개시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 자체가 의아한 상황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죄악의 땅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기에 옳고 그름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어째서지요?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실수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둘째, 소돔과 고모라는 누가 보아도 죄악의 땅이라고 인정되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시겠다는 감히 누가 하나님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말도 안 되는 변론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변론에 따라 심판의 시간을 늦추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결론을 알고 있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변론 시도가 무익하고 무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하늘의 힘으로 정의를 구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불필요한 변론 때문에 정의의 집행이 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물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요구하는 무수한 사람들에게도 맞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한번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째서 아브라함의 도전적인, 또 무용한 변론을 허용하셨는가? 그리고 왜 그 요구를 받아들이셨는가? 이 난제는 애초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땅을 향해 가신 이유를 다시 생각하는 데서부터 풀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로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도시를 불로 태워 심판하기 위해서입니까? 물론 결과적으로 두 도시는 유황불에 타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하나님의 본래 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로 가신 이유는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심판이 목적이라면 아브라함의 변론을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심판은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을 앞에 두고 변론을 들으셨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변론이 필요하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반드시 변론이 필요하셨기 때문에 그의 변론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우리의 커다란 착각인 힘의 심판으로서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도록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정의와 공의가 올바르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의견도 들어보아야 함을, 반대 의견도 살펴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이라는 동반자를 필요로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의 동반자
하나님은 죄에서 심판으로 직격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으셨으며, 당신의 형상으로 만든 사람들을 향한 뜻이 아닙니다. 힘의 논리에 매혹된 사람들은 하늘의 심판을 내려 달라고 악다구니하지만, 의로운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서 재고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재고를 들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세우는 방식입니다. 연영방 최고 랍비였던 조너선 색스는 "정의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며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그분의 동역자가 되도록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고 말합니다(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 137). 하나님께서 한계가 있고 오류 가능성이 있기에 정의를 구축하는 사업에 인간이라는 파트너를 세우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힘으로 구현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힘이 하늘의 힘, 신의 힘이라도 말입니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해 인간은 하나님께 탄원해야 하고 때때로 하나님보다 앞서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오히려 헤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뜻과 함께 의로운 마음을 품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세워가는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곳곳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핀 아브라함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으나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는 길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9절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가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옳고 바름이 유대 신앙의 근간이자 핵심인 '미슈파트'와 '체다카' 곧 정의와 공의입니다. 아브라함은 정의와 공의의 마음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 앞에 변론자로 설 수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맞서 사람들을 변론했던 이 가운데 모세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을 따라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인 양 기뻐했던 이들을 진멸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와 간절히 변론하며 말합니다. 출애굽기 30장 32절,

출 30:32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하나님의 심판 결정을 변론자 모세가 멈춰 세웠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을 따라 미슈파트와 체다카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영원한 변론자가 계시지 않습니까? 인류와 세상을 향한 심판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정의로운 판단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한 변론자가 나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서셨고, 그 변론자는 자기 목숨을 바치고 비참하게 죽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꾸시지 않으셨습니까? 누구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변론으로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공의와 정의 그 자체였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변론하셨기에 우리는 살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이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정의를 구축하기 위한 변론자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 심판을 뿌려 달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마음에는 정의에 대한 관념만 가득할 뿐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통해 당신의 정의를 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담대히 나서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해달라고,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우리가 조금 더 희생하겠다고 나서는 이들과 함께 정의를 세워나가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압도적인 악과 어둠 앞에 우리는 절망합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 내가 변론자로 나서야 하는가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생명과 평화라는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절망에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이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정의에 동참합시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당신의 동반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