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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청 말씀 나눔

별의 세계를 바라보며(창 15:1-6), 성령강림후 아홉째 주일

by 청파비둘기 2025. 8. 10.


두렵지 말아야 하거늘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말씀과 복음서 말씀 모두 은혜로운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구약 독서로 읽은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32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마주할 때 우리는 큰 위로를 경험합니다. 말씀이 기록된 시기와 오늘의 우리 사이에는 수천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의 거리가 있지만, 우리를 위로하고자 마음먹으신 하나님은 그 거리를 단숨에 좁히고 계심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함 없는 '두려워 말라'는 위로의 말씀이 우리 마음 밭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탕탕 튕길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위로와 평안을 주던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오늘의 나에겐 전혀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나의 삶이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는가 하여 찬송을 듣거나 부르기도 하고 평소에 잘 하지 않던 기도를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이 별무소용하거나, 오히려 두려움에 더욱 깊이 빠지기도 합니다. 말씀에 능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신앙이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자면,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겠지요. 아니 두려움에 잠식되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한지도 모릅니다. 지금 오늘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까? 저는 이번 농활에서 만날 개구리들이 두렵습니다. 진담이지만 농담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선명하다면 피하든지 맞서든지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진정 두려운 것들은 언제나 막연하고 추상적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당신에게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아마도 쉽게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거나 피식 웃고 말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며 말하기도 어려운 장래에 대한 두려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취업에나 진학에서 미끄러진다면 나의 삶이 그대로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 저 사람이 나에 대해 부정적일지 모른다는 두려움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다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리를 뒤흔듭니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실체가 불분명함에도 우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유동하는 두려움, 실체 없는 액체 같은 두려움이라고 말했습니다. 근대 이후 세계는 우리 안에 유동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왔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의료 기술을 발달시키고, 자연재해를 사전에 막아내기 위해 산을 깎아내고 물길을 가로막았습니다. 또 국가 간 분쟁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사람들을 선별하고 불온한 사상을 가진 이들을 바깥으로 내쳤습니다. 두려움을 해소하고 안전을 위해서라는 목적입니다. 기업들은 오늘도 당신을 두렵게 만드는 건강, 관계, 진로, 생산성, 효율 등을 개선하고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주리라 장담하는 온갖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공급합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두려움과 불안에서 해방되었을까요? 여기 계신 분들을 포함하여 누구도 그렇다고 답할 수 없으리라 믿습니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가 인간의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결과 두려움의 양이 줄어들기보다 두려움이 사회적으로 재분되었다."고 말합니다(지그문트 바우만, 불안의 기원, 다산초당, 2025, 182). 참으로 아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만연한 두려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고 개선하고 갖출 때마다 그 두려움은 줄어들기는 커녕 더 크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모하여 우리 안에 스며듭니다. 불안이 재분배되어 나눠갖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또 다시 닥쳐오는 새로운 두려움을 막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플랜B 플랜C를 만드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본능입니다. 그럼에도 좀처럼 두려움이 가시질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이처럼 애처롭습니다.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고 안전장치를 갖추느라 지치고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아브람의 두려움과 그의 선택
두려워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들은 오늘 본문 속 주인공인 아브람, 그러니까 아브라함으로 불리우기 전의 아브람 역시 우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창세기 말씀을 먼저 봅시다. 본문은 "이런 이들이 일어난 뒤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이런 일이란 큰 전투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땅에 이웃나라 왕들이 동맹하여 처들왔기 때문입니다. 소돔왕은 두려워 도망쳤고 조카 롯도 위기에 빠지게 되었지요. 아브람은 군대를 이끌고 소돔으로 가서 적들을 물리치고 롯을 구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의 왕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매우 기진맥진한 상태입니다(창 14:1-24). 

전투에서 돌아온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후 하신 말씀하십니다. 본문 1절,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하지만 아브람의 대답은 뾰족합니다. 대답을 봅시다. 2절과 3절입니다. 
 
2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뿐입니다.
3b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진이 빠진 탓이었을까요. 아브람의 대답은 불퉁스럽습니다. 그러면서 불쑥 본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미 늙어버린 나에게 여전히 자식이 없다는 것, 그래서 다마스쿠스 출신의 엘리에셀을 나의 가문을 이을 상속자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커다란 축복을 주겠다는 하나님을 향한 대답치고는 가시가 돋혀있지만, 그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실현할 믿음의 사람으로 아브람을 낙점하고 그를 부르시면서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 아니 심하게 말하자면 배신감마저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이 시점의 아브람에게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의 몸은 하루하루 늙어갑니다. 그런데도 주시겠다는 아들은 소식이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자식 없이 죽는다는 것은 수치와 실패의 상징이며, 피땀 흘려 일궈놓은 많은 재산과 가축을 다스실 후계자 없다면 이 모든 성취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상속은 고대세계에나 지금에나 부자들의 가장 큰 과제인가 봅니다. 두려움에 조급해진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후사를 결정합니다. 본문의 엘리에셀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성경은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으나 아브람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그의 차선책 곧 플랜B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상황에서 아브람에게 왜 두려워하느냐며 그를 힐난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약속을 미루시는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대답
그러므로 엘리에셀을 자기 후사로 삼은 결정은 분명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절대자를 향한 한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노여워하시거나 벌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씀하시길,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고 하십니다. 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련한 너의 차선책은 내가 너에게 보여줄 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니 어쩌면 아브람이 자기 후사로 정한 다마스쿠스 출신의 이 하인을 자신의 후사로 어떠한지 하나님께 허락받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개를 가로저으십니다. 그 아이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난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도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의 기대는 한없이 무너졌겠지요. 그러면 도대체 언제 어떻게 아들을 주시겠냐는 겁니까? 속에 담긴 울화가 목 끝까지 올라오던 차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해는 이미 떨어져 온 세상은 어두워졌고, 하늘에 별들만이 총총히 빛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유명한 말씀을 여기에서 하십니다. 본문 5절입니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면 참 목가적입니다. 어둠이 드리운 너른 광야 위에 하나님과 아브람이 서 있습니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별빛이 쏟아집니다. 이윽고 저 별들의 수만큼 무수한 자손이 너에게서부터 시작된다는 약속의 말씀이 우렁우렁 광야에 가득합니다. 얼마나 벅찬 장면입니까? 그러나 아브람의 속을 들여다보면 말씀이 묘사하는 바와 같은 낭만이나 서정은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의 속은 오히려 타들어 갑니다. 말씀을 따라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을 보았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저 무수한 별들 가운데 내 아들 하나 없는가, 하는 애달픈 말만 속으로 되뇌지는 않았을까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티브이 뉴스를 보는데, 서울 어느 지역에 대단지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를 시작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화면 가득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들이 마치 촘촘한 도미노 블록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고 사람들은 한껏 들뜬 표정으로 이사에 한창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집이 저렇게나 많은데 우리 집 한 채가 없구나' 아마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여러분도 적잖이 들어보셨겠다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또한 이와 비슷한 말을 자주 읊조립니다. 서울 하늘 아래 저렇게나 빌딩이 많고 직장이 넘치는데 내 자리 하나 없는가? 저 많은 학교 가운데 내가 갈 학교 하나 없는가? 실없는 말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씁쓸하고 헛헛합니다. 그리고 이내 두려움이 찾아오지요. 저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 저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된 상태로 머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받은 약속을 애써 무시하고 엘리에셀이라는 차선책을 준비한 아브람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세계 안에서
그런데 말씀은 아브람이 주님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깊게 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믿은 것은 주님이지 별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 별을 바라본 아브람은 오히려 슬펐을 것입니다. 저 별 가운데 내 아들이 될 별 하나가 아직도 없으니 말입니다. 별의 규모를 믿었다면 아브람은 좌절했을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필요한 것은 아들 한 명이라는 별 하나이지 무수한 별천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믿은 것은 주님입니다. 저 별이 아니라 별을 지으신 하나님, 저 하늘에 별을 두시고 밝게 빛나게 하신 하나님, 별이라는 이 세계 전체를 만드신 하나님을 말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대비책을 마련한 아브람은 하늘의 별을 본 순간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 세계 앞에 선 아브람은 주님을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에서 믿으니의 히브리어 동사는 "아만(אָמַן)"입니다. 신뢰하다 믿다라는 뜻으로 이 단어의 명사형은 우리가 매일 매주 고백하는 단어, 아멘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앞에 서게된 자는 아멘할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의 아멘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에서 "의"는 우리가 여러차례 나누었던 히브리어, 체다카(צְדָקָה)입니다. 몇 차례 말씀드렸으니 아시겠지요. 공의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의 세계 앞에서 아멘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공의롭게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나에게 꼭 아들을 주실거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아!가 아닙니다. 나는 모른다.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하늘의 별을 만드신 분, 이 세계를 지으신 분이 내 곁에 계시니 나는 그저 하나님을 믿겠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두려움을 대해야 하는지 아브람의 아멘과 의로움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엄습하는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기를 쓰고 피해도 두려움은 그 모습을 바꿔가며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엘리에셀을 준비하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더 큰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별이 아니라 별을 지으신 분을 보아야 합니다. 별 하나 따기 위해 허공을 휘젓는 사람이 아니라 별빛 아래에 서서 차분히 주님이 내 옆에 계심을 알차려야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불행히도 우리의 상수입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았을 뿐 아들을 주겠다는 날짜와 시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아멘으로 답했을 뿐입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의 서두를 기억해 보십시오. 제자들을 향해 두려워 말라 말씀하시며 적은 무리라고 하십니다. 주님도 아십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빈약한 모임인지를 말입니다. 그럼에도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팔고 자선을 베풀라 말하십니다. 힘없고 두렵고 걱정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 것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됩니다. 돈이 나를 지켜주고 두려움에서 해방해 주리라 믿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본능과 정반대로 행하라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더 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공의롭게 이끄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두려움을 극복하려 재물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되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면 우리가 도와야할 이웃이 눈에 들어옵니다. 잊지 마십시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의 두려움을 매일 같이 자극하고 추동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분은 이 세계를 지으신 크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고 두려움이 극복되거나 제거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일을 의롭고 순적하게 됨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이지만, 두려움이라는 녀석이 못난 친구 녀석처럼 계속 따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 귀찮은 두려움 때문에 여정 자체를 포기하겠습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기꺼이 그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 바로 그것이 믿는 사람의 자세여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