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지간(三伏之間)에
말복을 앞에 둔 어느 날로 기억합니다. 목회실 식구들과 점심을 하는데 문득 복날의 의미가 궁금해져서 질문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복날의 복이 축복을 말할 때 쓰는 복(福)이 아님은 확실히 알겠는데, 그러면 무슨 뜻인가 싶었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전을 찾아보니 복날에 쓰인 복은 엎드릴 복(伏), 흔히 항복하다 할 때 그 복자를 쓰더군요. 그러니까 복날이란 날이 너무 더워 사람이 엎드려 쓰러질 것 같은 날을 뜻합니다.
내친김에 복날에 관해 조금 더 찾아보았습니다. 여름 한가운데 무더위가 시작되는 날을 초복으로, 여기에서 대략 아흐레에서 열흘 뒤를 중복으로, 중복에서 다시 아흐레에서 열흘가량이 지난날을 말복으로 정합니다. 초복에서 시작해 중복 그리고 말복에 이르는 스무날을 삼복지간(三伏之間)이라 불렀습니다. 이 기간은 너무나 무덥기에 가급적 일을 적게 하고, 특히 각 복날에는 일을 멈추고 보신을 위해 영양이 높은 삼계탕 같은 음식을 먹었지요. 너무 더워 사람이 복, 쓰러질지 모르니 일을 중단하고 쉬도록 했다는 데에서 선조들의 지혜와 아량이 느껴집니다. 복날의 쉼은 단지 놀고먹는 날이 아니라 살기 위한 생존의 선택이고 농경사회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멈추는 날
'안식일'의 본래 정신이 이와 무척 닮았습니다. 안식일은 단지 쉬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법으로 정한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이란 살기 위해 멈추는 날, 멈춤으로 살아있음을 감각하는 날입니다. 바꾸어 말해 안식일에 멈추지 않으면 더는 생명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은 생명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첫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쉼이 필요하셨기 때문이 아니고, 그분께서 지치셨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당신께서 쉬심으로 생명들이 호흡하고 작동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안식하시자 엿새 동안 차례차례 창조된 생명 만물들이 각자 자기 자리를 잡고 비로소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신명기가 전하는 안식일에는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5절입니다.
신 5:15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주 너희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
안식일은 이집트에서의 고된 노동과 억압해 해방하신 하나님의 강한 손과 팔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역시 생명의 날, 다시 살아남의 날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나날을 상상해 보십시오. 끊임없는 노동과 억압의 연속입니다. 이집트에서 태어나는 이스라엘 아이들은 생명이 아니라 +1의 노동력이었을 뿐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나이가 되면 파라오의 궁전을 짓고 제국의 경계를 넓히기 위한 공사 현장에 투입됩니다. 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쉼이 없기 일상은 언제나 죽음과 잇닿아 있습니다. 누가 이 거대한 과로의 굴레를 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집트의 왕자로 자란 모세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매질하는 이집트 관리를 쳐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모세가 비록 약간의 권력을 가졌다 할 수 있지만, 그의 흥분과 분노는 박해와 억압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습니다.
제국의 폭력적이며 불법적인 노동 명령을 중단시키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자유와 안식을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은 너희가 더는 종이 아니라는 선언이며 더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맞이할 때마다 지키며 창조의 섭리와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며 생명과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양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의 멈추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으니, 우리 역시 멈춤으로 생명을 나눠주어야 하는 책임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의 실천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두 멈춤으로 공동체적 자유와 안식을 함께 누리자고 결단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여 안식일을 맞아 멈추고 쉬는 일은 모두의 생명을 지키고 다시 살 수 있는 힘을 얻는 시간이 됩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본래 의미입니다.
안식일 정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 58장 말씀은 안식일 정신과 깊이 관련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이사야 58장은 바빌론 포로기를 막 마치고 귀환한 백성들을 위해 선포된 말씀입니다. 70여 년 동안 고향을 떠나 노예 생활하던 이들이 돌아왔으니, 모든 것이 얼마나 열악했겠습니까? 집과 일터, 이런저런 공공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거나 제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향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과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었지요. 그러나 이런 물리적인 당면 과제보다 더 중했던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삶과 정신을 지탱했던 신앙의 부재였습니다. 무너져버린 성전이야 어떤 식으로든 벽돌을 쌓고 벽을 세워 건축하면 그만이지만 상실된 믿음을 뿌리에서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여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신앙의 토대요 근간인 안식일 정신부터 다시 세워나갈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렇게 선포된 첫 예언은 이렇습니다. 본문 9절 하반절에서 10절 상반절입니다.
9b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10a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이사야의 예언은 조건절로 시작합니다. 너희가 너희 나라 곧 다시 돌아간 너희 땅 이스라엘에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이라는 조건, 그리고 '너희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고 어려운 이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무너진 신앙의 기초를 다시 세우고 붕괴한 믿음의 토대를 단단하게 다지는 데 필요한 조건은 단 두 개, 무거운 멍에와 폭력과 폭언을 멈출 것, 굶주리고 어려운 이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관심을 쏟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더 많은 제사도, 더 많은 예배도, 더 많은 헌금도, 더 많은 교회도 아닙니다. 새로 시작할 세계에 세워야 할 믿음의 전통은 바로 이 두 가지뿐입니다.
이어 이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지켜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게 될 축복을 나열합니다. 이 조건을 지키면, 다시 말해 폭력을 멈추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로하면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며, 주님께서 늘 우리를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우리의 영혼이 충족되고, 우리의 뼈마디가 생기를 되찾고, 마치 물이 가득한 동산처럼 맑은 샘물이 끊이지 않으며, 폐허에서 성읍이 재건되고, 버려진 기초가 다시 쌓일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복이 모두 이뤄진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세상입니까? 사람이 살만한 세상입니다. 어둠이 빛이 되고, 메마른 사람들이 생기를 얻고 생수가 가득하고 폐허가 재건되는 세상 곧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여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이 조건을 지켜낸다면 사람들은 너희를 향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사막 같은 세상을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폐허가 된 땅으로 돌아온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인 것 같습니다. 여전히 폐허요 사막이란 뜻이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 깃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지난주에도 우리는 여러 죽음의 소식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멈출 수밖에 없었던 세 분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지난 19일 경북 청도 경부선 선로에서 작업하던 노동자들이 어떠한 경고 신호 없이 다가오는 열차에 죽어 두 명이 죽고 다섯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목숨을 잃은 두 분은 모두 30대 신입직원으로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었으며, 그 가운데 한 분은 외동아들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죽음은 30대 그리고 40대 소방대원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3년 전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구조 활동을 벌였던 대원이었습니다. 참사 이후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우울증으로 고통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분 또래의 청년이고, 한 분은 저와 연배가 비슷했습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 간에 있지만 선로 작업 간에 지켜져야 할 안전 수칙이 간과되었고 사고 노동자들에게 전해졌어야 할 '접근 통보'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국 이 사건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 '인재'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익숙하기에 참으로 슬픕니다. 극심한 트라우마로 고통당하는 대원들이 더 긴 기간의 공무상 요양을 신청했지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사고 원인을 단순화시켜 시시비비를 가르자는 의도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분들의 죽음을 함부로 해석하거나 은유로 전환하려는 것 또한 아닙니다. 다만 30대 청년 철도 노동자의 철길은 더는 일터가 아니었고, 여러 목숨을 살린 소방 노동자의 현장에서 그의 생명은 조금씩 희미해졌다는 것, 다시말해 희생당한 분들의 일터와 일상이 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무엇이 그 열차를 멈추지 못하게 했고, 또 무엇이 회복하지 못한 소방관들을 또 다른 참사의 현장으로 내몰아야 했던 것인가, 우리는 멈춰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번 정부에서 임명된 고용노동부 장관과 영국 언론 BBC와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얄궂게도 이 인터뷰는 철도 사고 직후에 진행되었습니다. 장관은 선진국이라 자처하는 이 나라에 산업재헤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는 인터뷰 가운데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서 비용이 줄어드는 만큼 안전조치가 무너지고, 그 결과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이 문제를 손보지 않으면 사고는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j3l2ge4mrxo)
모두 알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하는 그 단어, '비용' 때문입니다. 비용을 줄이면 이익이 늘어납니다. 기업 재무제표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재무제표에 잡히지 않는 수치가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생명값입니다. 비용을 줄이면 이익이 늘어나고 동시에 생명의 값 또한 늘어납니다. 그러나 이 값은 잡히지 않습니다. 생명의 값을 낮추기 위해선 안전을 위한 비용을 늘려야 하고 그렇다면 이익은 줄어듭니다. 이익을 가장 중요한 지표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상황입니다. 하여 세상은 말합니다. 모두 잘살기 위해서는 내가 제시하는 주장을 따라야 한다고 말입니다.
안식을 선포하며
세상은 안전하게 일하고 평안히 쉴 기회를 자꾸만 앗아갑니다. 안전 비용을 줄이는 길만이 모두가 잘 살고 성공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체제와 논리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유일한 대안이 아님을 말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로완 윌리엄스는 세계는 진리를 낯설어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따라 충분히 안식하고, 생명을 위해 멈추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허나 세계는 경쟁을 추동하고 헌신과 희생을 나약함이라 말하며 잠시라도 멈추는 일을 싫어합니다. 세계의 논리 앞에 각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나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하나님의 세계와 연결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달라야 합니다. 로완 윌리엄스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이 세계를 관리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선택지에 안주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실현 가능한 유일한 선택지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인류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건히 유지합니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로완 윌리엄스, 비아, 16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류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이 믿음이 안식일 정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중단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우리의 정성을 쏟음으로 안식일의 참된 정신을 만들어 갈 때 우리 세상이 맑은 물이 가득한 동산과 같이 변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여 갈라진 벽을 고쳐지고, 길거리가 고쳐질 때, 메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어 살아나고 척박했던 이 땅이 다시금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안식일 살아내고 함께 안식하자고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안식일을 지킴은 내 몸 하나 쉬고 회복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 13절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안식일이 거룩한 날이 되기 위해선, 네 멋대로 하지 않고, 네 쾌락만을 찾지 않으며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안식일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함께 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도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은 안식일에 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렸던 한 여인을 고치십니다. 안식일의 본질을 망각한 바리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으름장을 놓지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안식일이지만, 아니 안식일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고통 속에 살아온 이 여인의 아픔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그리고 아팠던 이 여인도 살 수 있게 되는 날이 안식일이 아니면 어떤 날이겠냐는 주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우리는 쉴 틈 없이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계는 고도로 발달하고 성장했으나 그 틈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장과 발전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논리가 진리가 아님을 믿고 선포해야 할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을 가득 메운 폭력과 폭언과 멍에를 걷어내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홀려 보내야 합니다. 세상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쉬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이가 있다면 가서 그의 뒤를 지탱해야 합니다. 멈추지 못해 쓰러진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 정신이어야 합니다. 그때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말하길,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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