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사람들(The Hollow Men)
오늘 말씀의 제목이 좀 길지요. 영문학이나 영시를 좋아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 없이 흐느낌으로'는 T. S. 엘리엇의 시 The Hollow Men, 번역하면 '텅 빈 사람들'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고 이 행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이 시는 대단히 우울하고 어둡습니다. 첫 연만 좀 소개해 볼게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We are the hollow men
We are the stuffed men
Leaning together
Headpiece filled with straw. Alas!
Our dried voices, when
We whisper together
Are quiet and meaningless
As wind in dry grass
Or rats’ feet over broken glass
In our dry cellar
-
우리는 텅 빈 사람들
우리는 박제된 사람들
서로에게 기대고 있으나
머릿속은 지푸라기로 가득하지, 슬프다
메마른 우리 목소리들,
서로에게 속삭일 때 조차
침묵과 공허만이 있을뿐
메마른 지하창고 아래
마른 유리잔을 스치는 바람처럼
또는 깨진 유리 위를 지나는 쥐처럼
-
어떠십니까? 글로 쓰인 시임에도 서늘하고 잿빛 풍경이 연상됩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엘리엇은 이 시를 1차 세계대전 직후에 발표했습니다. 포탄 소리는 멈췄지만, 사방에는 흐느낌이 가득한 전후(戰後) 상황에서 이 시가 나왔지요. 시인은 세상을 무너뜨리는 소리는 쾅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숨죽여 흐느끼는 울음소리임을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 도처가 흐느끼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이 끝장나고 있다는 징조라는 뜻이겠습니다. 문제는 세상이 이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누군가의 흐느낌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아니 흐느끼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세상이 여전히 건실하다고 자부하지만, 목전에 닥친 세상의 끝을 알아차리지는 못합니다. 벌써 한 세기 전의 시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이와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본문은 매우 긴박하고 극적입니다. 단지 황금 송아지라는 참담한 우상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을 쓸어버리겠다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강렬하게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은 오늘로써 완전히 끝나게 되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오늘은 시내산 위와 아래에서 벌어진 이 기묘한 사건을 함께 통찰해 보겠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시내산 앞에 당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따로 불러 그와 독대하며 각종 언약과 규례와 법도를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안식일 규정을 말씀하시고 이 모든 가르침을 종합하는 열 가지 계명 곧 십계명을 손수 돌판에 쓰셨습니다. 모세는 이 돌판을 갖고 내려가는 것으로 시내산의 일정은 끝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오른 후 한 달 열흘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사달이 납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당장 아론에게 달려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청합니다. 최초의 대제사장이며 이스라엘의 걸출한 지도자였던 아론은 처참한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사람들에게 이르길,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든 금붙이를 가지고 오라고 명합니다. 모든 백성이 몸을 장식했던 금고리를 갖고 오자 아론은 그것을 녹여 그 유명한 금송아지를 만들지요.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입니다.
4 아론이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받아 녹여서,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상을 만드니,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이 황금 송아지가 너희들의 신 곧 야훼 하나님이라는 외침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선언입니다. 백성들의 헛된 욕망과 지도자의 무능이 민족 전체의 운명을 파국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패역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 아론은 자기 손으로 만든 하나님 대체물을 앞에 두고 내일 주님의 절기를 지키자고 제안합니다. 우리로 치면 황금 송아지를 예배당 가운데에 두고 주일 예배를 드리자는 격입니다. 끔찍하지요. 백성들은 아론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은 황금 송아지에게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에게만 드려져야 하는 제사인 번제와 화목제를 송아지 앞에서 드린 것입니다. 이 파국적 상황을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습니다. 모세가 부재한 상황에서 또 다른 지도자와 백성들은 야합하여 하나님 대용품을 만들어 그 앞에서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내산 아래에서 벌어진 참담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는 세상이 오늘 본문 속 상황과 무척 닮아 있지 않습니까?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의 삶에 별다른 개입이 없으신 하나님을 애써가며 찾는 수고를 해서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들어 통제하면 그만 아닌가! 라고 담대히 말하며 세상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기 위해 자기 것을 내놓기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충성을 맹세하지요. 현대의 황금 송아지가 별것이겠습니까? 생명과 안전을 파기하는 자본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그 자체가 황금 송아지 아니겠습니까? 거기에서 모든 이익이 나오고 나와 너를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약속하니 말입니다. 세상이 파탄을 맞이하는 줄도 모르고 그 앞에서 정신없이 뛰놀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흥청거리며 멸망으로 치닫습니다.
시내산 위에서
그렇다면 이때 시내산 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말씀드렸듯 모세는 하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직접 써주신 십계명 두 돌판을 들고 하산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긴급히 말씀하시는 장면이 오늘 우리가 읽은 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길,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깜짝 놀랐겠지요. 하나님은 이유를 말씀하시며, 내가 이집트에서 구해낸 백성들이 타락하여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이 나 야훼 하나님이라 명명하고 그 앞에서 흥청망청 뛰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말씀을 유심히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모세 너의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 백성을 버리기로 작정하셨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10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10절입니다.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큽니다. 당신의 형상으로 만들고 손수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당신의 백성을 모두 진멸하고 새로운 백성을 만들겠다는 하나님이 낯설기까지 합니다. 신학적으로도 커다란 쟁점을 만들어내는 구절이기에 해석하기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일, 그러니까 백성을 멸하고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 이 말씀이 직유인지 비유인지 과장인지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문맥 아래에 드리운 하나님의 거대한 진노 그 자체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맹렬한 노여움에 사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원하며 말하지요. 11절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끌어내 주신 주님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모세는 재앙을 거둬달라고, 이 백성은 하나님 당신이 사랑하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을 부디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1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4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셨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거두지 않으시고 유예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이 시내산 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황금 송아지를 하나님인 양 여기며 흥청거리는 동안 시내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막기 위해 모세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설득하고 파멸을 막아 세웠습니다. 산 아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죽음이 목전에 들이닥치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니, 산 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겠지요. 이 순간 모세는 두렵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흐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야말로 이렇게 비관했겠지요.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 없이 흐느낌으로.'
여러분, 지금 이 상황, 하나님은 진노하시여 진노의 칼을 드셨고, 모세는 극구 말리고 있고,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이 구도가 오늘날 우리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슬프지만 우리 세계는 분명 망가지고 있습니다. 진보와 발전을 이루는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여러 부분에서 힘에 겨운 것이 사실입니다. 기후는 더는 위기 상태가 아니지요. 기후 재앙, 기후 붕괴라는 말이 더 적절해졌습니다. 위기를 재앙이나 붕괴처럼 더 크고 센 말로 대치하는 것을 언어의 인플레라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문제에 대한 감각은 오히려 무뎌지고 맙니다. 그럼에도 더 크고 무서운 말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어졌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산업재해에 따른 사망 사고도 여전합니다. 한국 사회 자살률도 마찬가지고요. 혐오와 차별의 그림자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도착하는 소식이라곤 모조리 끔찍한 사태들 뿐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이렇게 무너지고 갈라지고 있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세상은 쾅 소리 한번 없이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성자가 되어
몇 주 전 말씀 시간에 30대 한 젊은 소방관의 죽음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사명감 있는 소방대원이었으나 지난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현장 구조 활동을 벌인 후 극심한 트라우마와 싸우다 슬프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셨지요. 마침 시사 주간지 <시사IN> 지난주 호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기사를 읽는 중에 우리 사회 공익을 담당하는, 이른바 제복 근무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가 우리 생각보다 몇 배나 더 크고 무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돈되지 않은 참사 현장을 가장 먼저 목도해야 한다는 공포,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 사건 후 어김없이 들이닥치는 각종 민원과 사회적 비난의 화살에 맞아 생기는 죄책감 등등. 참사 현장을 지켰던 소방대원, 경찰 및 공무원들이 공히 말하길,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쌓여 마음이 무너진다고 전했습니다.(시사인,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396)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고 버텨내는 사람들의 공익 활동을 우리는 잘 보지 못합니다. 모두 잠이 든 새벽 시간 어딘가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대원들은 지체 없이 현장을 달려가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들을 구조하고 잔불을 정리하죠. 소방대원에게 이 시간은 죽음을 넘나드는 극한의 순간들이지만, 우리는 그저 짧은 단신으로 어딘가에 화재가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입니다. 비단 소방 노동자들뿐만은 아니겠지요. 교대 근무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일 하는 분들의 삶이 그러합니다. 중증외상센터에 근무하는 의료 노동자들, 군인, 경찰, 또 폭염에도 전신주에 올라가는 한전 직원, 혹한의 새벽에도 거리의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미화 노동자 말입니다. 특정 직종에 계신 분들만 구별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꾸만 망가져 가는 우리 사회가 그래도 멸망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고 버텨주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종교와 관계없이 세속의 성자들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저는 이런 분들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시내산의 모세를 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무너지고 있는 이 시점에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세속의 성자들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세상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자기 자리를 지키며 버티는 사람 말입니다. 시내산 위에 선 모세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세상의 창조주를 가로막아 섰던 모세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온 세상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던 모세는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 세상의 붕괴를 홀로 막아낸 모세의 흐느낌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했던 시편 말씀을 상기해 봅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한결같이 썩고 더러우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하나님 없다고 말하며 제멋대로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무너지면 안 됩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아무리 엉망이지만 그리고 이 세상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이대로 끝나게 놔둘 수 없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죄 많은 이 세상 그래도 고쳐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 살려 주셔야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하며 생명을 존중하고 혐오와 차별에 맞서고 지구를 돌보기 위해 작고 소소한 실천을 행한다 할지라도 세상의 절대다수는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모릅니다. 우리는 그래도 해야 합니다.
청파의 청년 여러분, 황금 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흥청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리는 만무합니다. 우리 사는 세상도 고집이 셉니다. 한 치도 바뀌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심정으로 살아갑시다. 세속의 성자들과 같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나의 주변을 공의로운 공간으로 만들어갑시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며 소수자가 되기로 결단한 우리가 우리를 돌보아야 합니다. 앞서 소방·경찰·의료 종사자의 트라우마를 다루었던 <시사IN>의 같은 기사에서 '피어 서포트'라는 개념 또한 다루었습니다. 같은 고통을 함께 겪고 있는 동료들이 서로의 아픔을 적극 돌보는 일이 피어 서포트라고 하는데, 동료 간 돌봄이 잘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 극복에 정말 큰 도움이 된다고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세속의 성자로 살기로 다짐한 우리가 서로서로 피어 서포트하며 버텨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기들의 세상이 망하지 않는 이유가 자기들 덕택이라고 뻐기며 으스대더라고 개의치 맙시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의인의 편이시며 옳게 사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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