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웃는 세상 앞에서
우리는 지난 주 복음서 말씀을 통해 돈을 증식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발휘하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 밖에 없음을, 그렇기에 차라리 돈 앞에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울 수 있음을 성찰했습니다. 더불어 돈과 담을 쌓고 살 수는 없기에 이 불의한 재물을 그나마 바르게 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하며, 그것은 돈을 통해 사람을 세우는 일임을 살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성찰할 복음서 말씀은 지난 주에 이어지는 주님의 또 다른 비유로 역시 돈과 돈에 관련한 사람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 돌입하기 전에 먼저 살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내러티브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이 비유 말씀을 듣고 있는 청자가 누구인지 조명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전하실 때는 언제나 그 비유를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그 비유를 듣는 사람들과의 역학 관계를 살펴야 의미가 풍성해집니다. 지난주 비유 말씀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16장 13절입니다.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에 아멘으로 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이 물음에 하나님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었던 비유 이야기 속 청중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으나 14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를 비웃었다.
물질이라는 맘몬이 아니라 온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택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들의 귀에는 주님의 말씀이 우습게 들렸다는 뜻입니다. 말씀은 비웃고 있는 이들을 가리켜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돈의 노예인 사람, 돈을 추구하기 위해 두 눈이 충혈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주님의 당부에 조소를 날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비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긴 사람들의 태도를 가만히 보니 돈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태도가 다름아닌 부와 가난에 대하여 세상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와 입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서신서의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 후배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바울의 권고 말씀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자족은 경건에 큰 이득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기에 빈손으로 떠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정도로 만족하라.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고 파멸과 멸망의 길로 갈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들은 이 말씀에 '아멘'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성찰하겠지요. 그런데 세상은 어떠할까요? 돈을 좋아하는 세상, 돈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릴까요? 나도 예수 믿고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을까요, 한가한 소리하지 말라는 힐난을 들으며 비웃음을 사게 될까요? 후자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러시아의 의사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안똔 체호프의 소설 가운데 <6호 병동>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제목의 6호 병동은 정신병원인데, 이 병원에는 5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습니다. 시설은 매우 열악하고 환자들은 무미건조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환자 가운데 이반 드미트리치라는 인물은 흥미로운데, 냉소적이면서 불안증을 호소하고 동시에 삶과 철학에 대해 대단히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갖고 있지요. 또 하나의 주요 인물은 이 병동의 담당 의사인 안드레이 예피미치입니다. 그는 다소 몽상가다우면서도 세상에는 어떤 법칙이 존재하고 결국엔 합리적인 결과로 귀결된다고 믿는 사람이지요. 소설은 이반 드미트리치와 의사 안드레이 예피미치의 대화가 긴장감 있게 전개 됩니다. 의사가 삶과 세상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 환자가 그에 논박하는 식이지요. 소설을 읽다 보면 정상이라는 것,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세상의 원리와 원칙에 대해 그리고 부조리와 모순에 관해 재고를 요청하는 문장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화 가운데 제 시선을 사로잡았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의사 안드레이가 부유함을 멀리하는 삶, 헌신과 자족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자, 환자인 이반이 이렇게 반박합니다.
"부와 쾌적한 생활에 대한 무관심,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시를 가르치는 그 학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혀 이해되지 않지요. 왜냐하면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도 쾌적한 생활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안똔 체호프, <6호 병동> 열린책들, 68.
신랄합니다. 사람들은 부와 쾌적한 삶 자체를 모르는데 검약의 삶이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주장하지요. 조금 더 쉽게 말해 부자였던 적도 없으면서 부를 포기하라는 말은 하나 마나 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반의 냉소가 꽤 아프게 들립니다. 마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터져버린 비웃음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겠다는 이들을 비웃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자기기만이고 패배주의에 물든 어리석은 자세라고 조롱하는 시대입니다. 주님에게조차 비웃음을 날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무거운 마음이지만 이제 이어지는 주님의 두 번째 비유를 보겠습니다.
이름없는 부자와 이름있는 거지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에 비웃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시고 또 다른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청중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니 이제 오늘 비유 말씀을 보겠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옷은 자색 옷이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가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겠지요. 그런데 이 부자가 사는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고 몸도 성치 않았지요. 부자가 먹고 버린 음식을 먹을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잡으시는 이야기의 구도는 의도적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대문 앞에 있었다는 것은 부자가 드나드는 일상 중에 언제든 나사로를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나사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부자에게 나사로는 있으나 없는 사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집 안과 대문 밖이라는 의도적인 배치와 함께 주님은 다른 비유에서는 하지 않으셨던 독특한 장치를 하나 더 첨가합니다. 그것은 이름입니다. 지난 주일 비유 말씀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청지기의 주인, 그리고 채무자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역할로 구분될 뿐입니다. 누가복음의 다른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거지인 나사로입니다.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가 비록 가난하지만 하나의 인격적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반면, 부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의 존재는 그저 많은 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집 안에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는 무명의 부자와 부자의 집 바깥에서 굶주리며 살고 있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의 대조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름 없는 부자와 나사로라는 이름의 거지가 모두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지옥 혹은 망자들의 자리라 일컫는 하데스에 내려가 고통을 당했습니다. 자, 이 말씀은 비유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옥이란 단어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는 구도가 역전되었습니다. 생전에는 부자가 집 안에서 나사로가 집 바깥에서 우러러보았다면, 죽음에 이르러서는 부자가 하데스라는 아래에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과 그 품에서 편히 쉬고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24절입니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야말로 타는 목마름의 심정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 아니, 불가능하다는 아브라함의 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너와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텅이가 있어 서로 넘나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태를 빠르게 이해한 부자는 두 번째 요구를 합니다. 자기 아버지 집에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그들에게 나의 현 상태를 좀 전해주어 그들이 이 하데스에 오지 않도록 말을 좀 전해달라는 것이지요. 부자의 부탁은 분명 진심이고 또 간절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부자의 두 번째 요청도 거절합니다. 살아있는 자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지요. 절망에 빠진 부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30절입니다.
30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 형제들이 그러니까 자기처럼 부유하고 부족함 없이 살아온 이들은 산 자들의 가르침으로는 가당치도 않고 죽은 사람이 돌아와 경고해 주어야 겨우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웬만한 말씀으로는 부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뜻이지요. 부자의 마지막 탄원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전하는 주님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러합니다. 본문 31절입니다.
31b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여기 마지막 문장이 이 비유를 여는 핵심입니다. 설령 죽은 이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이고 그들이 제아무리 다그친다 하더라도 부유한 이들의 신념과 행실을 고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기적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진들 돈에 매혹된 이들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는 뜻이지요.
완고한 세계에 맞서
이야기를 잘 따라가다 보면 주님의 의도가 단지 부자처럼 살다가는 하데스에서 영원히 고통당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니 살아있을 때 가난한 이들을 잘 돌보며 경건하게 살라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걸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현장의 청중들 곧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에 두려움을 느꼈을까요? 혹시 내가 죽어서 저 부자처럼 영원히 하데스에서 고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아니, 두려움까지 아니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찔리는 것이라도 있었을까요? 아마, 먼저 비유의 반응과 마찬가지로, 이 비유에서도 비웃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방금 다시 읽은 31절 마지막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설령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기적을 보아도 저들은 안 바뀔 것이다. 맘몬은 이렇듯 지혜롭고 명민하며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이를 모르실 리 없었습니다. 비유 이야기를 다시 상기해 보십시오.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지만,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에게는 이름 대신 갖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지 나사로는 이름이 있지만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목소리입니다. 오늘 비유를 보십시오. 거지 나사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반대로 부자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말합니다. 말할 수 있는 자격과 힘이 있다는 듯 말입니다. 게다가 부자는 죽음의 자리에 있음에도 자기의 필요를 요구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요구하기를, 당신 품에 편히 쉬고 있는 나사로를 나에게 보내라. 그의 손에 물을 찍어 내 타는 목을 적셔달라. 나사로를 내 아버지집에 보내 형제들에게 말을 좀 전해달라.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부자는 나사로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미 죽었음에도, 모든 것이 끝났음에도 말입니다. 부자에게 나사로는 죽어서도 자기 노예일 뿐입니다. 게다가 부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가족만을 챙깁니다.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알려달라고 하지요. 여전히 이웃은 안중에 없습니다. 비유가 끝날 때까지 부자는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맘몬을 자기 신으로 모신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렇기에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의 비유 말씀은 하나같이 거대한 냉소 위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말씀에 사람들은 비웃음을 날리고 부자는 죽어서 고통당하는 순간까지 요구하고 가난한 이에게 명령하며 자기 가족을 챙깁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난다 한들 회개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가난이 옳다고 하는 기만을 집어치우라는 6호 병동의 이반 드미트리치의 이죽거림이 귓전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맘몬은 이렇게나 거대하고 강고합니다. 패배를 모르고 버티고 서 있으면서 믿음의 길을 가려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비웃음을 날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비웃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가난을 논하지 말라는 이반 드미트리치에게, 그리고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너희도 결국 나를 원하지 않느냐며 조소하는 맘몬 앞에 담대하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들과 맞서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너희들이 없는 사람 취급하는 나사로를 찾아 나서겠다. 이 세상의 나사로들과 함께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 일은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를 가르치시는 주님도 세상의 부유한 사람들이 회개하여 나사로를 찾아 나갈 리 만무함을 알고 계십니다. 말씀드렸듯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본다 한들 맘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회개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사 나사로를 발견하고 그의 목소리가 되어주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뿐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며 나사로를 대신해 그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인물을 아브라함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가라 하는 곳으로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오롯이 선택한 사람만이 이 세상의 나사로들의 목소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 하나님을 선택하고 나사로를 찾아 나서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다짐한 청파의 청년 여러분. 세상의 원리는 완고합니다. 돈이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는 시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돈과 거래에 지혜로운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의 결단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영원히 뒤처지고 말 것이라고 우리를 겁박할 것입니다. 여러분 맞서지 마십시오. 어차피 우리는 자본에 이길 수 없습니다. 대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나사로들을 찾으십시오. 그들을 발견하고 말을 걸고 대신 말을 해주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은 눈앞에 버젓이 살아있는 나사로를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이 일은 오직 맘몬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만이 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새로운 세상의 희망은 나사로의 목소리가 세상에 들리기 시작할 때 나타남을 꼭 기억하십시오. 신실하신 주님께서 문을 열고 나사로를 찾아 나서는 여러분들을 지켜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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