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와 야곱
이삭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손자가 되는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형제였지만, 두 사람은 아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형의 칼을 피해 잠시만 몸을 피하면 될 줄 알았건만 무려 20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버렸습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일과 구약 말씀은 두 형제의 20년 만의 재회 직전 장면입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의 뒤엉킨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한 어머니에서 태어났지만 외양이며 성격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다른 결을 지닌 형제였습니다. 형 에서는 살결이 붉고 털투성이로 태어납니다.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인물임을 시사합니다. 에서는 외모에 걸맞게 사냥꾼이 되어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살았습니다. 반면 동생 야곱은 성격이 차분하여 집에만 있었다고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양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누가 보아도 에서가 장남다운 풍모는 물론 가업을 이어받을 기개 넘치는 남자임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를 가른 결정적 차이는 단지 이들의 외모나 성격, 장남과 차남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8절을 들어보십시오.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이더니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창세기의 세상은 철저한 가부장 사회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큰아들을 사랑함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가 이승우는 "장자에게 주어진 권한과 특혜가 사랑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모든 장자들이 과도한 권한을 부여받고 특혜를 누린 것은 아마 사살이겠지만 모든 장자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 '허기와 탐식' 132) 이승우는 소설가다운 눈으로 이삭의 에서에 대한 편애에 근원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 죽음의 길로 내쫓긴 이복형 이스마엘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 의식이 있음을 봅니다. 이삭에게도 이스마엘이라는 이복 형이 있었습니다. 형 이스마엘이 장자였기에 아브라함 가문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의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 버리지요. 이삭의 야곱에 대한 사랑은 자기 형 이스마엘에 대한 연민, 미안함, 과거의 상처들이 뒤섞인 결과인 셈이지요. 깊이가 다른 해석입니다. 소설가의 섬세한 시선이 신학자와 주석가보다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으나 야곱에게는 사랑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편애입니다. 문제는 아버지 사랑의 부재가 야곱에게는 결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고 싶었습니다. 형 에서가 잡아 온 고기를 맛있게 드시는 아버지를 보며 야곱은 공허를 느꼈습니다. 나에게도 형과 같은 날랜 몸과 강인한 육체가 있다면, 그래서 아버지께 맛있는 고기를 대접할 수 있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나에게도 올 텐데…. 야곱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결핍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맙니다.
어느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형은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낍니다. 마침,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고, 에서는 어서 나에게 그 팥죽을 달라고 말합니다. 이때 야곱은 그 유명한 거래를 제안 하지요. 나에게 장자의 권한을 팔면, 이 팥죽을 형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에서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그깟 장남의 권한이 무어 대수냐며 어서 팥죽이나 달라고 합니다. 야곱은 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사지요.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는 한낱 해프닝에 불과합니다. 장자의 권리를 사고판다고 해서 장남이 차남이 되고, 차남이 장남으로 뒤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야곱이 이를 모를리도 만무합니다. 장자는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이렇게 무의미한 일을 하면서까지 쟁취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야 합니다. 장자권 거래의 이면에는 큰형 에서가 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향하는 저 사람이 바로 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지요. 야곱은 에서의 장자의 권리를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에서의 얼굴을 갖고 싶었습니다.
얼굴없는 야곱
에서의 얼굴을 갖고 싶다는 야곱의 욕망은 그가 태어나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시작됩니다. 에서가 먼저 태어난 후 동생 야곱이 이윽고 나오는데, 말씀은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말합니다(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이 '발뒤꿈치를 잡다' 즉 '속이다'는 뜻). 그는 본능적으로 에서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시간이 흘러 아버지 이삭이 늙었습니다. 눈이 어두워져서 앞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삭은 자기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서둘러 두 아들을 축복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에서를 불러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겠으니, 너는 나를 위해 사냥을 하고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말합니다. 이 모습을 본 동생 야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형의 음식을 잡숫고 싶어 하시는구나. 나에게까지 올 아버지의 사랑은 없겠구나. 이것이 야곱의 판단입니다. 하여 야곱은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 앞에서 에서가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돕기로 결정합니다. 에서가 사냥을 떠나 자리를 비운 사이 야곱은 형의 옷을 입고, 털이 많은 형의 피부를 흉내 내기 위해 염소 새끼 가죽을 그의 매끈한 손과 목덜미에 두릅니다. 그리고 형이 만들어 드렸던 음식과 비슷한 음식을 지어 아버지 앞에 나갑니다. 이 연극적 상황이 연출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장자에게 떨어질 축복을 가로채기 위한 술책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형의 옷을 입고 동물 가죽을 덧대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서라도 야곱은 에서의 얼굴이 갖고 싶었습니다. 형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아버지 이삭은 야곱과 리브가의 어설픈 계략에 속고 맙니다. 몇 번이나 의심하긴 했으나 앞을 볼 수 없기에 야곱이 에서라 착각하고 놀라운 축복을 내려줍니다. 말씀은 이삭의 축복이 끝나자, 야곱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물러갔다고 기록합니다. 그에게 축복 자체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지요. 이윽고 형 에서가 당도합니다. 모든 상황을 파악합니다. 이삭 역시 그제야 자기가 야곱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지요. 에서는 꺽꺽 소리 내 웁니다. 그리고 타오르는 분노를 느낍니다. 내 동생 야곱을 내 손으로 죽이겠다. 에서는 칼을 들고 날뛰고, 야곱은 그 칼을 피해 도망합니다. 이것이 이 촌극의 결론입니다.
에서의 얼굴이 되고 싶었던 야곱은 결국 비뚤어진 결핍과 욕망 때문에 형으로부터 도망쳐야 했고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야비한 술책으로 획득한 장자권과 장자의 축복은 그저 허울뿐이었습니다. 갈 곳 없는 야곱은 겨우 외삼촌 라반의 집에 몸을 의탁하지요. 그러나 라반은 야곱을 거의 노예나 다름없이 여기고 그에게 강제에 가까운 노동을 시킵니다. 그렇게 굴곡진 20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잊지 않으시고 축복하시어 그에게 큰 부를 이루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부유함이 오히려 독이 되어 라반의 아들들에게 목숨을 잃을 처지가 되지요. 결국 라반의 집에서도 쫓기듯 밀려나게 됩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야곱은 고심 끝에 고향 땅, 그리운 어머니와 노년의 아버지가 계신 곳, 그리고 형이 있는 고향으로 말입니다. 이제 대가족이 된 야곱은 고향으로 방향을 잡아 걸어갑니다. 그리고 이내 고향 어귀 얍복 나루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야곱은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섭니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바로 고향인데 말입니다. 형 에서가 여전히 분노의 칼을 들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두려웠던 것은 에서의 칼이 아니라 에서의 얼굴이었습니다. 나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 그 멋지고 늠름한 형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지난 과거의 상처를 직면하는 일은 야곱에게나 우리에게 어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다
머뭇거리는 사이 밤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두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개울을 건너가게 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고향을 떠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어두운 밤, 모든 겉치레를 물리고 홀로 남아 보니 회한이 몰려옵니다. 한평생을 다른 이의 얼굴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이의 삶이란 얼마나 처량합니까. 타인의 얼굴을 보며 나에게 없는 것을 괴로워하며 사는 삶이 행복할 수 없겠지요.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며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부러웠습니다. 아버지가 형만을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둠 속에 홀로 서게 되니 다른 이의 얼굴을 자기 얼굴 삼기 위해 그토록 애쓰며 살아온 지난 삶이 덧없이 느껴지고 만 것입니다. 야곱은 평생토록 얼굴 없이 살아왔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어둠 속에 홀로 탄식하는 야곱을 보며 우리 시대의 곤경을 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얼굴을 잃은 채 살아갑니다. 타자의 얼굴을 보며 나의 결핍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어설픈 에서가 되게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소셜미디어에 과도한 전시는 자기 것을 드러내겠다는 자신감이라기보다 내게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임을 우리는 직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자의 얼굴을 보며 나의 결핍을 발견하고 괴로워합니다. 야곱이 에서의 얼굴을 구하듯 우리도 타자의 얼굴을 취하고 그의 옷을 입고 그의 행동을 흉내 내지만, 공허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나의 진정한 얼굴은 무엇인지 우리는 찾아내야 합니다.
새까만 밤, 홀로 남겨진 야곱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옵니다. 말씀은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낯선 이는 다짜고짜 야곱과 씨름합니다. 씨름이라 했을 때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샅바 싸움을 생각할 수 있지만, 창세기에서 말하는 씨름이란 서로 엉버티고 서서 밀고 당기는 레슬링에 더 가깝습니다. 그 말은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 힘을 겨룬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이 낯선 사람의 얼굴을 마주합니다. 얼굴을 맞댄 두 사람의 싸움은 팽팽합니다. 힘의 균형은 밤이 맞도록 어느 한쪽으로 무너지지 않고 서로를 밀고 당깁니다. 야곱은 그 낯선 사람을, 낯선 그 사람은 야곱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이윽고 싸움을 걸어온 이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 싸움을 끝냅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야곱은 싸움에서 지지만, 이 남자를 붙들고 축복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묻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낯선 이가 야곱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본래 자기 이름인 야곱이라 답합니다. 야곱도 낯선 이의 이름을 묻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신 너의 이름은 이제부터 야곱이 아니라 말합니다. 본문 28절입니다.
28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는 사라져 없습니다. 그리고 동이 떠오릅니다. 야곱은 그제야 자기가 얼굴을 맞대고 씨름했던 이가 바로 하나님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겨룬 것입니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고도, 목숨이 이렇게 붙어 있구나!"라고 말하며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브니엘은 야곱에게 있어 존재적 죽음의 장소입니다. 부러진 뼈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야곱은 자신이 죽음을 지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은 이제야 형의 얼굴을 볼 용기가 생깁니다.
형의 얼굴을 다시 보다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33장 1절은 에서가 사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뼈가 다쳐 절뚝이는 야곱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전의 야곱이라면 절망하여 도망가거나, 맞서 싸웠을 겁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야곱은 에서의 군사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야곱은 가장 먼저 나서서 에서를 맞습니다. 형 앞에 선 동생은 땅에 엎드려 일곱 번이나 절합니다. 두 형제는 서로를 끌어안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합니다. 야곱은 형에게 용서를 빌며 자기가 일군 모든 재산을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평소의 야곱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그는 이미 집착에서 벗어났습니다. 형의 얼굴만 보면 자기 결핍이 떠오르고 그래서 괴롭고 어떻게 해서든 형이 되고 싶었던 동생 야곱은 더는 없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야곱이 에서에게 말하는 장면에 그 답이 있습니다. 창세기 33장 10절 하반절에 야곱이 말합니다.
10b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야곱은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형의 얼굴만 보이던 나의 단점, 한계, 결핍, 욕망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 보입니다. 앞에 선 이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니, 그를 욕망하고 쟁취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섬김의 마음, 선대하는 마음, 존경과 귀히 여기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했던 야곱은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그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야곱은 형의 얼굴을 더는 욕망하지 않습니다. 에서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에게도 얼굴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린 시절 다닐 때 찰흙 놀이 해보셨지요? 찰흙을 빚어 컵도 만들고 차도 만듭니다. 어느 정도 숙달이 되면 으레 자기 얼굴을 빚어 보는 시간도 갖게 됩니다. 찰흙으로 얼굴을 빚기 위해 한 덩어리 흙뭉치를 대강 만들어 놓고 시작합니다. 청년 시기가 바로 이러합니다. 청년의 때를 논하는 다양한 묘사들이 있겠으나, 자기 얼굴 빚어나가기를 막 시작하는 때가 청년의 때입니다. 학교 교육을 마치고 막 사회로 발을 들인 여러분은 이제 조금씩 여러분 얼굴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렇기에 청년의 얼굴에는 이렇다할 무엇이 없습니다. 찰흙 덩어리에 아무런 조각이 되어 있지 않듯 청년 시기의 얼굴은 막연합니다. 그래서 불안하고요. 내 눈과 코와 입이 이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지만 단번에 그런 모양이 나오지 않지요. 그렇기에 근사한 얼굴을 찾아다니며 흉내를 내며 따라 합니다. 하지만 내 얼굴이 아름다워지기보다는 결핍만 늘어갑니다.
얼굴 빚어가기를 시작하는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밤새도록 하나님과 겨루어야 합니다. 삶의 선택과 지향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하나님의 뜻을 듣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과 겨루는 일입니다. 내 욕망의 부름에만 응답하는 사는 것은 하나님과 씨름하기를 외면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은 다른 이의 얼굴만 쫓아가는 삶입니다. 생명과 평화 정의와 공의에 인생 그 어느 시절보다 민감하고 예민해야 합니다. 아직 뭘 몰르고 철이 없어 저런다는 말을 기성세대로부터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겨루는 자의 자세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이라는 벽에 부딪혀 삶의 가로막히기도 해야 합니다.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이며, 나의 얼굴을 찾아가는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욕망과 결핍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때, 세상은 우리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 얼굴에서 하나님의 빛이 난다면 그 생애가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얼굴로 빚어가는 삶을 사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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